심성이 착한 사람이 죽으면...
본문
질문
스님의 자비심에 감사드리며 주인공 공부를 열심히 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내가 없는 공부를 열심히 한 사람은 죽은 후에도 환상에 속지 않고 걸림이 없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그런데 함이 없이 하는 도리는 모르지만 심성이 착하고 진실한 사람은 죽어서 걸림이 없이 나아갈 수 있는지가 궁금합니다
댓글목록
큰스님 말씀
예전에 이런 걸 봤어요. 아주 가난한 어느 여인이 어린애 하나를 데리고 살았는데 너무도 가난해서 둘 다 죽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너무 가난하고 아무것도 모른 채 죽었어도 마음이 그렇게 착할 수가 없었습니다. 남한테 요만큼도 언짢음을 주려고 하지 않고, 남의 것을 거저 먹으려고 하지도 않았기 때문에, 말하자면 자기의 그대로를 가지고 갔기 때문에 그만 죽게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요.
그래서 어느 공부한 스님이, 그분은 보이지 않는 데 사람이라고 해 둡시다. 보이는 사람이라고 해도 좋습니다만. 그분이, 말하자면 그 사람을 항상 믿고 열쇠를 맡기고 일을 하게 했습니다. 그래, 아주 깍듯하게는 하는데 융통성은 없었어요. 좀더 지혜가 있고 그러면 좋을 것을 말입니다. 그런 게 조금 아쉽긴 해도 너무나 착하니까 모든, 우주 법망에 어디든지 통과가 안되는 게 없는 거죠.
항상 얘기했듯이 그게 본래 전부 있기 때문에, 단계 단계가 인간에게도 다 주어져 있고 이 지구에도 주어져 있고, 어떠한 물체든지 다 주어져 있습니다. 어떠한 별성에도 그렇게 주어져 있기 때문에 통신이 되는 겁니다. 전체 통신이 가능하지요.
그런 거와 같이 우리가 그렇게 착한 사람은 어디서 돌보든지 돌봐요. 그러니까 마음을 닦는 공부를 하는 분들은 상대방이 어떠한 잘못을 했다 하더라도, 어떠한 것이라도 남한테 있는 그걸 보지 마라 이겁니다. 지금 내가 나가기도 바쁜데 왜 거길 보느냐 이거예요. 왜 상대를 봅니까? 여러분이 그것부터 배워야지 만약에 그거부터 배우지 못한다면 만날 그 그릇에 엎어져서 그 그릇에서 헤어나질 못해요. 그게 습이거든요. 그래서 잘못된 것을 보지 마라 하는 게 아니라 그대로 보면서 보지말고 안에다 놓으라고 하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잘못된 물건은 용광로에 넣어서 다시 새로운 물건으로 생산해 내도록 자비를 가져라 이 소립니다. 물건이 잘못되고 녹이 쓸었으면 용광로에다 넣어서 다시 좀 더 다듬어서 내 놓으면 좋을 것 아니냐 이거예요. 언젠가는 그렇게 거기다 넣으면 다시 생산이 돼서 나오게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걸 참지 못해서 ‘이 그릇이 쪽이 떨어졌어.’ 이렇게 말한다 이겁니다. 쪽이 떨어졌으면 쪽이 안 떨어지게 용광로에 넣으라고 해도 말입니다. 다시 쪽이 안 떨어진 것이 나오도록 용광로에만 넣고 말을 하지 말아라 이겁니다. 지금 내가 바빠서 죽겠는데, 자꾸 용광로에 넣어서 다시 생산을 해내야 할텐데, 생산하는 것은 나중이라 해도 일단 자꾸 넣어야 될 텐데 뭐 돌아볼 게 있고 남의 잘못 볼 틈이 있습니까? 그렇게 스스로 넣게 되면 스스로 용광로에서 새로 또 발견이 되면서 ‘아, 그때는 이렇더니 새로이 나오는구나.’하고 달리 보이는 때가 있고, 달리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이겁니다. 물건이 달라졌으니까 말입니다. 그러니까 고정되지 않다는 얘기입니다.
그래서 일체를 고정되게만 보지 마라는 겁니다. 하루에도 몇 번씩 마음이 달라지고, 하루에도 몇 번씩 다른 행을 하고, 고정된 게 하나도 없는데 어떻게 한 가지를 보고 고정되게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내일 다르고, 모레 다르고, 일년 후에 다르고, 몇 달 후에 달라질 그런 문제들을 가지고 말입니다. 안 그래요?
그렇지만 착하다 그래서 너무 착한 일만 한답시고 자기 앞에 다가오는 것도 “너 먹어라!” 이렇게 줄 수는 없겠죠. 그러니까 잘하고 못하고를 다 자기 주인공한테 맡겨 놓고서 모든 것을 그 자리에 일임하고 정도에 넘치지 않게 잘 판단을 해서 산다면 그것이 바로 부처님의 법이자 우리들의 법입니다.
- 이전글무엇을 관해야 하나요? 21.10.25
- 다음글'공체의 몸 속에서 뛰어나서'의 의미 21.10.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