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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묻는 이에게


길을 묻는 이에게는
큰스님 법문 중에서 발췌하여 답을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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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가귀감의 내용에 대하여...

본문

질문

선가귀감에 “知幻卽離 不作方便 離幻卽覺 亦無漸次” 이런 글이 있습니다. 환인 줄 알면 즉 벗어난 거요 따로 방편을 짓을 바 없고, 환을 여읜 즉 각(깨달음)이다, 또한 점차(漸次)가 없는 것이다. 견성하고 나서 그 바른 눈만 올곧이 가진다면 점차적으로 닦아 나가는 것을 부정하신 말씀으로 짐작되는데 가르침을 청하옵니다 

댓글목록

큰스님 말씀

관리자님의 댓글

관리자 작성일

일체 만물이 다 환상인 줄만 안다면, 그릇은 비우면 그릇이 되니까 방편을 또 지을 게 없죠. 그리고 “환상을 여의면 곧 깨친 것이다. 또한 닦아갈 것도 없다.”고 한 건 두말 할 것도 없죠. 그릇을 비워서, 그릇을 비웠단 말조차도 없는데 무슨 거기다 또 말을 붙이겠소? 본래 비어 있는 자리인데, 본래 비어 있는 자리라는 말조차도 없는 건데 서로서로 대화를 하면서 서로가 공한 줄을 알게 만들려니까 대화가 필요하고 방편도 필요하고 그런 거죠. 본래 전부 공한 자리라, 공한 자리다 공한 자리가 아니다 하고 애를 쓸 필요가 없거든요, 사실은.

그런데 그 공한 자리를 공한 자리로 알지 못하고 내가 나라고 하고 환상을 보고, 주인은 모르고 못 보고 그냥 내 것 네 것 하고선 서로 이러니까 보다 못해서 부처님들이 나오신 겁니다. 애들 싸움을 말리려면 어른이 나오듯이. “야! 너도 옳고 너도 옳으니까 고만 두자.” 이러고는 싸움 말리듯이 말입니다. 나중에는 “이놈아! 네가 있으니깐 싸웠지 딴 놈이 싸운 게 아니지 않느냐?” 하고서 일러 줬다는 겁니다.

이 육신이 살아 나가는데 몇 날 며칠이나 살 거 같습니까? 영화를 만드는데 어린애든 어른이든 아슬아슬한 데 막 올라가고 그래도, 떨어져서 죽는다 하더라도 그건 죽은 게 아니라 영화의 그림자이죠? 실제로 죽는 게 아니기 때문에 아슬아슬한 데서 떨어져도 겁이 나질 않는 거예요, 그냥 실감나게 볼 뿐이죠. 안 그럴까요? 그렇듯이 지금 살아나가는 이 형체가 바로 그런 셈이나 한가지인 겁니다.

우리가 아슬아슬한 데 올라가서 떨어져 죽게 생겼는데도, 깨우친 사람이 볼 때는 아둥바둥할 필요가 없어요. 떨어져서 죽는다 하더라도 그건 죽는 게 아니니까요, 실상이 아니거든요. 떨어져 죽는 건 그림자지 실상이 아니기 때문에 아둥바둥할 게 없다 이거예요. 이 도리를 알면은 우리가 애착을 가지고 모든 걸 붙잡고 모든 거에 얽매이지는 않을 거예요. 그런데 왜 죽을까 봐 쩔쩔매느냐 이겁니다, 그게 껍데기인데.

사람이 자기를 몰락 버리지 않으면 의정도 없고 의정이 없으면 이루지 못하죠. 보이지 않는 50%를 알 길이 없죠. 그러기 때문에 몰락 버려야 의정이 있고 의정이 있어야 몰락 또 탐지하게 되고 적응이 되죠. 그래서 그것을 다 이해를 하고 돌아간 뒤에 다시 또 의정이 생기게 되고, 의정을 내서 스스로 이건 뭔가 했을 때 그게 또 다시 새삼 이해가 돼서 풀리고 이러다 보니까 세상을 다 집어먹고 말았더랍니다.

그런데 세상을 다 집어먹은 사람은 별나게 생각 낼 게 하나도 없지 않습니까? 본래 내가 기술을 배워서 기계의 모든 걸 다 알 수 있는데, 그 기계는 어떻게 됐을 것인가 하고 또 의정을 내겠습니까? 그러니까 평소 때 자기가 알고 있으니까 그냥 무표정하게 무심으로, 누가 물으면 그냥 “어, 그 기계는….” 하고 무심코 말이 나옵니다. 본래 자기가 알고 있으니까. “그 기계는 어디에 나사를 좀 조여 놔.” 이렇게 그냥 무심코 일러줄 수 있는 거죠. 내가 알지 못하고는 일러 줄 수가 없거든요.

그러기 때문에 알지 못하면 중생이고 알면 부처라는 말과 같은데 우리가 평소에 하던 일은 훤합니다. 훤하기 때문에 그걸 일부러 생각하면서 알 양으로 의정을 낼 필요도 없지 않겠습니까? 여지껏 해 나오신 거니까. 그러기 때문에 그 일에 대해서 누가 묻는다면 서슴지 않고, 그냥 무심코 쑥쑥 말해 줄 수 있는 그 성품 말입니다. 고게 바로 본래면목이거든요.

그런데 이것은 알지도 못하고, 가량도 못하는 사람들이 체험을 해서 말씀해 놓으신 걸 가지고 응용을 한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엇갈릴 수밖에요. 그렇게 응용을 하고 있으니까, 체험을 못 해 본 사람이 남의 말을 가지고 응용을 하다 보니까, 체험을 안 해 봤으니까 “이러이러하다더라.” 이러는 게 아니라 “이러이러하다” 하고 자기 걸로 그냥 말한다 이겁니다. 그러나 자기가 체험을 못해 봤으니까 가늠을 할 수가 없습니다, 말만 했을 뿐이지.

만약에 내가 남의 소리를 듣고서 “몰락 놔 버리고 이렇게 해라.” 이런다면 그것은 자기 혼자의 힘이기 때문에, 말의 힘이기 때문에 절대로 그것은 안 됩니다. 경험해 보지 않고 절대 말을 해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론으로 수행은 할 수 있을지언정 마음을 깨닫게 할 수는 없다는 결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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