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품을 본 후의 공부 과정 > 길을 묻는 이에게

길을 묻는 이에게


길을 묻는 이에게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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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품을 본 후의 공부 과정

본문

질문

주인공이라고 하는 것도 알고 보면 따로 이름을 부를 것도 없는 자기 자신인데, 다만 우리들이 믿지 못하고 알지 못하니까 그것이 본래 나라는 것을 알게 될 때까지 방편으로 붙여 둔 이름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자신의 성품을 본 이후에는 어떻게 공부를 해야 하는지요?  

댓글목록

큰스님 말씀

관리자님의 댓글

관리자 작성일

보림을 잘해야 합니다. 첫째도 보림이요 둘째도 보림이다 이겁니다. 첫째도 죽어야 하고 둘째도 죽어야 하고 셋째도 죽어야 합니다. 초발심시변정각(初發心時便正覺)이라고 했습니다. 처음 먹은 마음이 이후 회향할 때도 똑같아야 합니다. 세울 것이 없는 게 일체 처입니다. 세울 게 없다는 것은 프로펠러 돌아가듯 하는 만법의 작용이죠. 그 작용이 어디에서 나옵니까? 성품에서 나오지 않습니까. 그러면 그 성품에서 나오는 작용을, 만법의 작용을 심봉이 있어야 프로펠러가 돌아가듯 내 한생각에 꿰어들 수 있다면 바로 그게 도, 바로 진여자리, 진(眞)입니다.

그래서 일체를 놔서 보림하고, 보림하는 사람조차도 없기 때문에 모든 게 찰나찰나 돌아가면서 체험하면서 거기다 다시 보림하기가 상당히 어렵더라는 얘기죠. 모든 작용을 하나하나 듣고 봤다고 해서 꿰어 든다면 그것은 진짜 보림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봤을 때 하나하나 체험하고 놓고, 보고 체험하고 또 놓고, 듣고 체험하고 또 놓고…. 부처님께서 갈빗대가 몇 갠지, 숨쉬는 것까지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알고 있는 것도 고정되어 있지 않습니다. 금방 요리 변덕 조리 변덕 그러니 어떤 것을 생각했다고 지적하겠습니까. 자기도 지적을 못하는 반면에 여러분도 지적을 못합니다. 모든 것을 지적할 게 없음으로써 그대로 보림을 하는 것입니다. 바깥으로 난설을 하고 바깥으로 풍기고 바깥으로 안다는 소리를 하고, 밖으로 “너는 오늘 누굴 만났지” “요런 생각을 했었지?” 하고 아는 소리를 한다면 마구니에 말려서 세세생생 끄달릴 겁니다. 그것이 더 무섭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자기 주장자를 봤어도 자기 주장자를 봤다는 착을 둔다면 고정된 관념 속에 착을 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품으로 하여금 작용하는 것이 다 한군데서 나오니 한군데다 놓게 된다면 일체 만법이 돌아가는 그 심봉을 바로 자기가 느낄 때 그 심봉은 자기가 일체 만법의 돌아가는 그 프로펠러를 꿰들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거를 꿰들지 못하고는 생동력 있고 여여한 삶을 살 수가 없게 되는 거죠. 고정됨이 없어서 두루 걸림이 없이 본래 돌아가는 것을 우리가 모르기 때문에 이거를 세세히 가르쳐 드리느라고 이렇게 말을 하지 않으면 안 되고 말할 건덕지가 없어서 말을 해도 안 되고, 이것을 이럴 수도 없고 저럴 수도 없어서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일체 만물이 없었더라면 내가 이 법을 어떻게 배웠을까? 어떻게 느꼈을까? 그렇다면 저분들이 바로 나인 것이고 바로 내가 저분들인 것을 어찌 내가 말할 게 없다고, 그 말할 것 없는 것마저도 놔야지 말할 게 없다고 해서 거기에 또 착을 둔다면 이것 또한 면목이 없지 않느냐.” 하고 생각을 했습니다.

여러분 볼 면목이 없다면 역대에 내려오신 부처님 볼 면목이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계시는 한 부처님은 죽지 않습니다. 예전에도 이렇게 앉아서 설하셨고 지금도 이렇게 앉아서 설하시고 계십니다. 그것은 모습을 보고 말하는 게 아닙니다. 모습은 항상 변질돼 돌아갑니다. 우리가 부처님의 그 뜻을 알려면 바로 아까 얘기해 드린 그 성품의 작용을 바로 한군데에 놔야 된다는 얘깁니다. 공한 데서 나오는 것 공한 데다 놔야 그 보림이 완벽해서 그 보림마저도 토했을 때 바로 또 다시 찰나찰나 돌아가는 작용을 그대로 또 다시 체험하고 놓으면서 보림을 하는 겁니다. 그럴 때 비로소 우리는 찰나찰나 나투면서 무의 법 유의 법이 그대로, 악과 선이 다 한데 합쳐져서 항하사 모래알같이 많아 세울 게 없으나, 이렇게 말하고 이렇게 하는 것이 바로 그대로 역력하다는 겁니다.

그러니 내가 나를 기준해서 착을 두고 내가 이렇게 깨쳤으니까, 이렇게 나를 봤으니 이렇게 해야겠다 이런 건 하나도 없습니다. 마음과 마음이 전달되는 것이지 말이 전달돼서는 아니 됩니다. 그러니 우리 일생동안 살아가면서 이 몸을 받아 가지고 나와서 나의 성품의 작용인 줄 모르고 또 성품의 작용인 줄 모르기 때문에 그 성품이 작용하는 것에 착을 두지 말고 모든 걸 몰락 놔서 다시 보림을 다시 해야 된다는 얘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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