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를 믿는 참된 신앙인의 자세 > 길을 묻는 이에게

길을 묻는 이에게


길을 묻는 이에게는
큰스님 법문 중에서 발췌하여 답을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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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를 믿는 참된 신앙인의 자세

본문

질문

종교간의 갈등이 심합니다. 불교다 기독교다를 떠나서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이 가족 구성원으로 들어오는 것을 꺼리는 등, 종교가 사람을 참되게 이끌어 주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종교에 의해서 아픔과 상처가 생기는 것 같습니다. 종교의 참다운 역할과 종교를 믿는 참된 신앙인의 자세에 대해서 가르침 주십시오.  

댓글목록

큰스님 말씀

관리자님의 댓글

관리자 작성일

우주의 근본이 한 사람 마음에 있다고 생각했을 때 전체의 공에서 내 마음 자체가 그대로 고정된 게 없기 때문에 이렇다는 것을 알고, 그것도 그거고 그것도 그거다 하는 겁니다. 즉 말하자면 ‘불교라는 것도 이름이고 기독교라는 것도 이름뿐인 것이다’라는 거 말입니다. 그것은 이름뿐이지, 진짜 인간이 공심으로서 공생하고 공식하고 있고 공체로 공용을 하고 있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어느 종교를 믿든지 그건 상관이 없으나 만약에 그 도리를 몰라서 지혜를 펼치지 못한다면 건건이 걸리게 되죠. 마음이 ‘나는 기독교를 믿는다’ 하는 데서 멈춰지기 때문에 그렇고, 자기가 믿는 종교가 절대적이라는 게 있습니다. 불교인들은 불교로서의 절대적이라는 게 있고 기독교는 기독교대로 절대적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음에 건건이 걸립니다. 그러니까 일이 벌어지는 겁니다.

그래서 이 도리를 모르는 사람에 한해서는 기독교인이면 불교를 받아들이지 않고, 불교인이라면 기독교를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진리가 둘이라서 그런 게 아니라 마음들이 천차만별로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 도리를 깨닫지 못하고, 또는 체험해서 둘이 아니라는 걸 자기가 스스로서 감지하고 들어가야 되는데 둘이라고 볼 때는 반드시 일은 일어나죠. 상대가 있고 내가 있을 때 싸움이 일어나는 거지 상대와 나와 둘이 아닐 때는 싸움이 일어날 수가 없습니다. 마주쳐야 소리가 나죠. 그와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이런 얘기를 했습니다. 어느 스님이 아주 도가 높으신데, 마적 두목이 칼을 들고서 “당신 속에 뭐가 그렇게 묘한 게 들었는지, 보물이 들었다는데 당신의 가슴 속에 내가 칼을 넣는다면 안 들어갈 수 있겠느냐?” 그러면서 그걸 째 보겠다고 했는데, 가서 째 보려고 하니까 그 스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추운 겨울 날씨에 고목이 꽃을 피울 수 있겠느냐?” 했습니다. “스스로 봄이 오면 꽃이 필 것을…. 고목을 잘라 봤던들 그 속에서 꽃이 나오겠느냐?” 했습니다. 그랬을 때 그 마적 두목도 그 스님한테 마음을 숙이면서 겸손하게 몸도 숙였답니다.

마음이 숙여지면 몸도 저절로 숙여지죠. 그 마음이 근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음이 얼어붙으면 겨울과 같습니다. 아주 잔뜩 얼어붙은 얼음과 같아서 마음이 녹질 못하죠. 그러나 우리가 마음이 봄이라면 산천초목은 조화를 이루고, 향기롭게 푸르고 말입니다. 물은 유수와 같이 흐르고, 어디에도 걸림이 없이 그렇게 흐를 뿐입니다. 그와 같이 마음도 봄이라면 그렇게 푸르고 조화를 이루면서 도도하게 강물은 흐를 것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정맥이나 동맥이나, 우리 마음이 편안해야 오르락내리락할 때 몸에도 이롭고, 벌써 어떠한 감정이 나서 그것을 편치 못하게 생각을 하고 내가 그것을 잊지 못하고 꼬부리고 있을 때는 그것이 차차차차 조금씩 쌓이다 보면 병이 되죠.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마음이 항상 봄이라야 됩니다. 봄이라야 생동력 있게, 즉 말하자면 저 산천초목이 푸르듯, 소나무가 겨울 여름이 없이 항상 사철 푸르듯이 마음이 항상 청새와 같이 푸르다는 얘기입니다. 그러면서도 마음이 지혜로우니 강물이 도도하게 흐르듯이 그렇게 당당하게 삶을 보람되게 느끼면서 살게 되는 겁니다.

마음공부라는 것은 한 쪽을 버리는 게 아닙니다. 나쁜 것은 버려야만이 불법이라고 하는 거, 또 좋은 것만 해야만 불법이라는 거, 어느 종교를 막론하고 이런 것이 종교가 아닙니다. 진리를 파악하고 우리가 그 진리에 의해서 순응하면서 항상 자유스럽게 내가 찰나찰나 나투면서 생동력 있게 그것을 용(用)을 하면서, 계발하면서 좀 더 삶의 보람을, 우주의 섭리를 한꺼번에 쥐고서 나갈 수 있는 그런 능력을 여러분이 다 각기 가지고서 나가는 것이 부처님이 가르치신 법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저께도 말하고 그저께도 말하고 만날 앉으면 되풀이하는 말입니다만, 되풀이를 삼 년을 하고 나도 영 그 말이 무슨 말인지 모르다가 삼 년이 되던 해에야 그 말이 무슨 말인지 알았다는 얘기입니다. 그러니 되풀이 안 하겠습니까? 되풀이를 안 할래야 안 할 수가 없는 거는, 어차피 우리는 되풀이하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쳇바퀴 돌듯이 그렇게 되풀이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가는 것도 아니고 오는 것도 아니면서 우린 역력히 가고 오고 있습니다.

그러니 일체 만물이 다 물질적인 자체가 허망한 게 아니라, 자기 마음이 그렇게 계발되면서도 아주 화합적이고 화합하면서 자비스럽게 나갈 수 있는 생동력, 그것이 바로 모든 것을 다 공용으로서, 공심의 능력으로서 앞으로 전진해 나갈 수 있는 문제가, 어저께가 오늘이고 어저께 한 것을 오늘 갖다가 함으로써, 둘이 아님으로써 내일의 개발이 오늘의 개발입니다. 오늘의 내가 한 생각 내지 않았다면…, 나쁘게 냈든지 좋게 냈든지 내일에 있는 것입니다.

내일이라는 것은 꼭 하룻밤 자야만 내일이 아니라 지금 일을 저질러 놨든지 또는 일을 잘해 놨든지 수습을 해 놨든지, 바로 오늘 해 놨기 때문에, 지금 해 놨기 때문에 이따가 다가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해 놓은 것이 이따가 다가오는 거, 어저께 해 놓은 것이, 아까 해 놓은 것이 지금 다가오는 것, 이것이 모두가 삼심이 바로 일심으로 돌아간다는 얘기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지금 평상시에 살고 있는 생활이니만큼 그 생활을 떠나서는 불법도 없고 기독교도 알라신도 모두 종교라는 것은 이름이지, 생활을 떠나서 진리가 있는 건 아닙니다. 그리고 나 떠나서 부처는 없는 것입니다, 각자.

그러니 모두가 능력이 없어서 그런 점도 많지만, 그전에도 그런 얘길 했죠. 서대문 위에 능금나무가 많이 있었습니다. 그 쪽을 지나서 얼마 안 가면 산모퉁이에 그전에 일본 사람이 짓고 살던 집이 있었습니다. 그랬는데 그 집에 사람이 들어가면 방에서 죽는 게 아니라 꼭 바깥에 나와서 피를 토하고 죽는다고 하거든요. 그래서 흉가라는 겁니다. 그런데 그 도리를 아는 사람은 그 집에서 잘 지냈는데 그 도리를 모르는 사람은 팩팩 그렇게 죽었다는 얘깁니다. 나중에 그 도리를 그래도 웬만큼이라도 알아서 한데 뭉칠 줄 알고, 한데 뭉쳤다가 다시 펼 줄 알고, 폈다가 다시 웅그릴 줄 아는 사람이 들여놨다 내놨다, 내논 것도 없고 들여놓은 것도 없이 들이고 내는 것이 유유히 자유스럽게 하는 사람이 그 집을 사 가지고 들어갔습니다. 아주 가난한 사람이었는데 그 집을 사 가지고 들어가서 살게 된 것이죠. 하지만 지금은 애들을 유학도 보내고 그 집을 팔아 가지고 딴 데서 살지만요. 그 사람네가 그 집을 흉가에서 살 수 있는 집으로 면해 놨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어느 종교를 막론하고 우리의 마음 한생각에 달려 있는 건데 우리가 능력이 없으니까 부딪치고 당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그런 것을 어떻게, 부처님이 이 자리에 계시다 할지라도 여러분의 능력이 아니고 여러분의 깨달음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못났든 잘났든 여러분에 의해서 나고 드는 것이 공에서 나왔다 공으로 든다는 걸 아셔야 된다 이 소립니다.

그러니까 모든 것은 바깥에서 찾는 게 아니라 안으로 찾으며 모든 것을 안으로 굴리면서 내고 들이는 것이 내 안으로부터 나가기 때문에 또 오관을 통해서 내고 들이는 것이, 바로 오관은 문이란 말입니다, 보고 듣고 하는 것이 전부. 그래서 잘 정돈하고 생각해서 처리하는 것이 책정한다고 그러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 한생각에 일체 신이 들어 있으니까 이 종교를 믿는다 해도 아니요 저 종교를 믿는다고 해도 아닙니다. 단지 내가 생각하기에 달린 거다 이 소립니다.

내가 그 도리를 안다면, 내가 예수님이 될 수 있고 마리아가 될 수 있고, 내가 부처님이 될 수 있고 법신이 될 수 있고 보신 화신이 다 될 수 있는데 구태여 그것을 나누어서 말할 건 없죠. 허나 그 도리를 아는 사람이라면 좋겠는데 그 도리를 모르는 사람이면 서로가 저쪽에서 조금 세면 이쪽이 집니다. 우환이 생기죠. 저쪽에서 세면 이쪽이 우환이 생겨요. 그렇기 때문에 진실한 마음으로서 만약에 부처님의 참 뜻을 잘 파악할 줄 안다면 기독교를 믿는 사람이 주인이 되든, 기독교 믿는 사람이 세를 들었든 그것을 다 커버해 나갈 수 있어요. 그걸 다 나로 돌려서, 하나로 돌려서 갈 수 있는데, 아무리 불교를 믿는다고 미워해도 이쪽으로 와서 화살이 맞을 수 없어요. 그건 자기의 생각들이지. 오히려 그렇게 생각을 한다면 이쪽에서도 자비심이 없고 법으로 나간다면 화살은 여기 왔다 다시 그쪽으로 되갑니다.

그러니까 ‘자비의 보살행이라’ 이러는 것은 내가 그 도리를 완전히 안다면 그 화살이 나한테로 온 것이 그리로 다시 가서 맞게 하지도 않고, 항상 굴리면서 완화시키고 부드럽게 만드는, 큰 강물에 똥물이 들어가든 흙물이 들어가든 빗물이 들어가든 항상 한 강물이 되듯이, 그렇게 마음의 지혜를 넓히고 상대를 이익하게 할 수 있는 그런 도량이 크다면 아무하고 같이 살아도 상관이 없는데, 도량이 넓지 못하다면 무슨 일들이 많이 생기게 되는 것을 봅니다. 가만히 보면요. 그러니 어쩌겠습니까?

그래서 금 있는 데 무쇠가 갈 리 없고 또 무쇠 있는 데 금이 갈 리 없고, 세상 진리가 그러하지 않은가 이렇게 봅니다. 사람의 마음이 바로 생각하는 대로 지혜가 넓고 적고 이런 데서 오는 차원에 따라서 여러분이 그렇게 살림살이를 하고 있지 않은가 생각합니다. 모든 게 다 그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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