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것도 믿을 수가 없어 > 길을 묻는 이에게

길을 묻는 이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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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스님 법문 중에서 발췌하여 답을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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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것도 믿을 수가 없어

본문

질문

저는 어떤 종교든지 종교를 택했을 때는 옳은 길로 들어가야 된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일반인들보다 성스러운 일을 행하고 계시는 종교인들이 어떤 때 보면 자꾸 문제를 일으켜서 뉴스거리가 되고 이러는데, 그럴 때면 어떤 것도 믿을 수가 없다는 배신감이 들면서 과연 이 사회를 누가 이끌어 줄 것이며 누구를 믿고 따라가야 하는가 하는 한심한 생각이 많이 듭니다.  

댓글목록

큰스님 말씀

관리자님의 댓글

관리자 작성일

난 참 답답합니다. 왜냐. 그런 걸 왜 보십니까? 바깥으로 바깥 경계를 보지 마십시오. ‘나’가 걸어갈 때 나만이 떳떳하게 걸어가십시오. 그렇다면 그 내가 떳떳하게 걸어갈 수 있는 그 자세가, 온 누리를 싸고 그것을 막을 수가 있는 그 능력이, 우주간 법계의 요소가 다 서로 이렇게 돌아갑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한마음을 잘 갖는다면 그것도 역시 잘 봐 줄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애들을 길러 보시죠? 저희들끼리 막 싸우고 이러면서 자라야 이게 성장이 빠른 거죠. 근데 어디 가서 이렇게 그냥 웅치고 있으면서 활발하지도 못하고 나가서 놀지도 않고 친구들하고 싸움도 안 하고 가만히 요렇게 앉아만 있으면 발전이 없어요. 넓게 생각을 한다면 아주 그것도 좋은 일입니다, 좋은 현상이고. 그러니까 우리가 좁게 쓰지 말고 넓게,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생각을 할 수 있는 그런 포괄적인 생각을 해야지, 요런 좁은 생각을 해 가지고 색으로만 “저것 저것” 이럭하면 아예 이건 정말 우리가 불자로서 공부할 수 있는 태도에 적합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그런 걸 오늘부터는 딱 떼어 버리세요. 딱 떼어 버리시고 오직 내가 부처님 뜻에서 벗어나지 않게끔 이렇게 이렇게 해야겠다 하고, 이것이 아니다 기다 할 거 없이 ‘나의 주인공이시여. 당신이 억겁 천 년 전에서부터 나를 이끌어 왔어. 지금도 끌고 가고 있어.’ 하고요. 지금 이렇게 이렇게 걷고 있는 거, 지금 말하고 있는 거, 이걸 누가 이렇게 말을 하게 했는가. 누가 귀로 듣게 했는가. 누가 눈으로 보게 했는가. 내 발을 누가 옮겨 놓게 하는가. 이거를 지켜보신다면 그 주인공 속에서 다 나오는 것입니다. 주인공 속에서 그게 다 나오는데 주인공이라는 것도 껍데기에 불과하고 심주(心柱)라는 것도 이게 껍데기에 불과하다 이겁니다. 여기서 공부하는 분들이 이렇게 말합니다. “아이고, 처음에는 심주라는 걸 불렀는데 인제 심주라는 것도 더딥니다. 이거 홀딱 벗었습니다, 인제.” “그럼 뭐라고 그러느냐?” 그러니깐 “그냥 처음에는 ‘주인!’ 이러다가 나중엔 주인도 없어졌습니다.” 그러기에 잘했다고 했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우리가 어떠한 화두를 갖는다 하더라도 내가 나로 인해서 모든 걸 홀랑 벗을 수 있는 그런 직감적인 나로 들어가야 됩니다. 화두를 들고 바깥으로 가서는 안 되고 안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이게 안으로부터 생긴 거니까 안으로부터 나오고 들어가고 나오고 들어가고 하는 거지, 바깥에서 들이고 내고 하는 게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로부터 지키고 나로부터 가는, 그 길을 지켜보는 누군가가 있고 걸어가는 누군가가 있을 겁니다. 그러니 지켜보는 사람이 있다,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 이럴 때 그것이 합일이 돼야 우리가 이름 지어서 견성이니 뭐니 하는 겁니다.

그러니 우리가 자기 몸을 이끌고 갈 때, 병이 났든 가정에 어떠한 문제가 생겼든 또 식구들이 어떻게 됐든, 이걸 이끌어 가지고 어느 목적지까지 갈 때에 ‘내가 이거 아이구, 다리가 절룩거려서 아프니까 못 가.’ 이럴 때는, 그거를 부축해서 데리고 갈 수 있는 그런 여건을 단단히 세우십시오. 그러면 옆에서 여건들이 있는 거를 전부 아주 다양하게 웃으면서 이끌고 갈 수 있는 그 줄이 있습니다. 그 줄은 자기의 주인공, 그것도 이름인데, 그 주인공이란 게 평상심이죠. 그것을 본래면목이라고도 하고 실상이라고도 하는데 그것을 주인으로 삼고, 내가 가는 거를 지켜보고 내가 하는 걸 지켜보고 가정살이에서 모든 걸 지켜보면서 이것이 바로 한 군데서, 주인공 내 속에서 나온다는 거를 알게 되면 믿는 것도 그 속을 믿습니다. 또 감사한 것도 그 속에 감사합니다.

이렇게 나갈 때, 10년을 두고 공부 못한 것도 단 몇 년, 단 1년을 가도 우린 그걸 알 수가 있는 겁니다. 그러니 시공이 초월됐다, 시공이 없는데, 시간과 공간이 따로 있는 게 아니고 이렇게 한데 합쳐서 에너지처럼 돌아가는 건데 구태여 이걸 나눌 게 뭐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10년을 하루로 만들 수도 있고 하루를 천 년으로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그 억겁을 한데 합쳐서 요렇게 비벼서 떨어지는 요 먼지 하나가 우리 인생 한 횟수라고 한다면 얼마나 많은 얘깁니까? 그런 거를 한꺼번에 녹일 수 있는 그 문제가, 짊어질 수도 있고 녹일 수도 있다는 이 문제가 한마음에 달려 있는 겁니다.

그러니 이것저것 끄달리고 이런다면 이게 좀 많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평상심의 보시’ 도 있고 ‘인연’ 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전체 이 경을 한데 모은 이 말 한마디인데도 불구하고, 그냥 수백 마디에 엇갈려서 떠나질 못하고 ‘나는 이걸 읽었더니 이렇더라. 나는 이 소릴 들으니깐 이렇더라.’ 하는 여기에만 얽매이면 도저히 목적지까지 자기 갈 길을 갈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나같은 사람, 여러분도 아무것도 모른다 하더라도 좋습니다. 우리가 ‘말씀’이라고 하는 게 있고 ‘말’이라고 하는 게 있습니다. 한데 떨어지지 않는 말이 말씀이요, 한데 떨어뜨리는 말이 말입니다. 그랬을 때 오직 내 마음에 의해서, 마음이라면 보통 그냥 그 마음이라고 하는데, 말씀 그 자체로 보면 평상심이라고 부를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 평상심 속에서 일거일동이 다 나옵니다. 들이고 내고 들이고 내고 하는 보시심도 그렇고, 무주상 보시심도 그렇고…. 유주상이나 무주상이나 어디 둘이겠습니까? 때에 따라서는 유주상도 하고 때에 따라서는 무주상도 하고, 때에 따라서는 어떤 것을 무명을 칠 수도 있고, 어떤 때 따라서는 그 무명을 살려 줄 수도 있고…. 이 모두가 다양하게 할 수 있는 이 평상심이 바로 부처인 것입니다.

여러분이 따로따로 이걸 그냥, 이거 읽고 또 거기 끄달리고, 이것도 보고 끄달리고 저거 끄달리고 이런다면 내가 갈 길이 지금 먼데, 어떻게 그렇게 이거 끄달리고 저거 끄달리고 허우적거리면서 갈 길을 갈 수 있겠습니까? 참 힘듭니다, 모두. 여러분 마음 자체의 본래 내 생각나기 이전, 본래면목, 그 주인공을 믿으라는데도 아, 그걸 못 믿으면 어떻게 합니까? 왜 딴 데 그림을 믿고 이름을 믿고 형상을 믿고 그러면서도 실질적으로 자기가 움죽거릴 수 있는 자기 실상을 왜 못 믿습니까?

여러분은 자기 자신을 믿어야, 그리고 감사한 줄 알아야 부모도 감사한 줄 압니다. 자기가 자기를 몰라서는 절대 부모도 감사한 줄 모르고, 다섯 가지 대신 해 줄 수 없는 문제, 이것도 고마운 줄 모릅니다. 죽음을 대신 해 줄 수도 없죠? 아픔을 대신 해 줄 수도 없죠? 이 세상에 나오는 것도 대신 해 줄 수 없죠? 똥 누는 것도, 자는 것도 모두 이게 대신 해 줄 수 없는 겁니다.

또, 우리가 지금 여기 앉아 있으면서도 이게 앉은 자릴 고마운 줄 모르고 앉아 있습니다, 지금. 생명을 유지하면서도 이 공기의 고마움을 모릅니다. 산소의 고마움을 모르고 말입니다. 당장 지금 불이 나가서 고통을 받을 때만 “아이구, 불이 나가서 어떡하느냐.” 그러지 그 고마움을 느낄 줄은 모릅니다. 물도 고마운 줄 모르죠, 태양도 고마운 줄 모르죠, 바람도 고마운 줄 모르고, 이 다섯 가지 문제가 다 그냥 고마운 줄도 모르고 이렇게 지냅니다. 근데 이걸 종잡아서 따지게 되면 이 주인공 하나에 전부 그 바람님이든지 흙부처님이든지 물부처님, 다 이게 종합해서 있는 것입니다. 한 몸에 있단 말입니다, 이게.

어부가 배를 가지고 나갔는데 바람이 막 지동 치듯 불었습니다. 배가 뒤집히게 됐습니다. 그래서 거기에서 그 모두 일체 유생 무생이 다 한데 합쳐진, 하늘과 땅이 다 합쳐진 주인공이 자기이기 때문에 자기한테다 그런 말을 했습니다. ‘야! 당신이 이렇게 바람을 일으킨다면 어찌 이 배가 그냥 온전하겠소?’ 하고 한생각을 순간 내는 바람에 그 바람 부처는 바로 자기가 되고 자기는 바람 부처가 된 거죠. 둘이 아니니까. 그 순간에 바람은 자고 잔잔히 그 배는 가게 됨으로써 그 생명을 다 살렸다는 뜻이 있습니다. 그뿐인가요? 우리 생활의 모든 게 다 그렇죠. 그러면 이것이 바로 부처님의 용(用)이 아니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인간이 없다면 부처도 없을 것이고, 망상이 없다면 부처를 이루지 못하고, 중생이 없다면 부처가 없다는 그 점을 아예 생각지도 못하는 거죠.

내 마음 자체가 바로 생각나기 이전 본래면목을 안다면 바로 그것이 있다고 입증해야 됩니다. 자기가 있기 때문에 증거입니다, 그게. 자기가 움죽거리고 있고 말하고 있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부처 될 자격이 있기 때문에, 꿈에도 댁의 마음이 자기 모습을 자기가 끌고 다녔고, 생시에도 자기 모습 자기가 끌고 다니잖아요? 그런데 왜 그것을 그렇게 놔 버리지 못합니까? 믿어야 됩니다. 자기가 어떻게 자길 그렇게 못 믿습니까?

그래, 이왕 도적질을 하시려면요, 도둑놈이 되려면 진짜 그냥, 아예 전체를 도둑질하세요. 안 하려면 아주 그냥 하지도 말고요. 욕심을 내려면 전체에 욕심을 내지 조그만 거 가지고 욕심내지 마시고요. 욕심을 내려걸랑 아주 부처님이 이 세상 삼라대천세계, 우주 전체를 집어 먹었듯이 그렇게 하십시오. 부처님이 집어 먹은 걸 우리가 뺏는다 하더라도 줄지도 않고 붙인다 해도 늘지도 않으니까요. 그러니까 우리는 열심히 그 자리를 지켜보면서, 모든 걸 지켜보면서 그것이 나 하나의 안에서 나온다는 것을 다 알아야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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