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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묻는 이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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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스님 법문 중에서 발췌하여 답을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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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희들이 가야 할 길은?

본문

질문

이 어두운 사바세계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아 지녀서 삶의 의지처로 삼고 살아가는 저희들이 어떠한 길로 나아가야 진정 올바르게 부처님 법을 행하면서 살아갈 수 있을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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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스님 말씀

관리자님의 댓글

관리자 작성일

나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물론 꼭 말을 해야만 아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공부를 해 나갈 때 학식이나 지식이나 권세나 어떠한 이름으로써 이론으로써 공부하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이것은 오로지 역대에서부터, 즉 말하자면 ‘인간이 어디서부터 이렇게 왔고, 어디를 향해 지금 그대로 여여하게 걷고 있나?’ 이런 것을 우리는 지혜롭게 탐구하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지수화풍 이 자체 내에서 우리가 지수화풍을 먹고 산다는 그 사실을 외면하거나 고맙게 생각하지 않아서는 아니 됩니다. 일체 생명이 다 지수화풍에서 생겼고, 그 생명으로 인해 진화가 돼서 이렇게 무정물이나 또, 일체 생물이라고 하면 좋겠습니다. 모두가 거기서 나와서 거기서 사라지고 거기서 사라졌다가 다시 뜨고 하는 이 진리, 허공에 뜬 꽃잎 한 잎이 바람이 너무 세면 이지러지고, 또 어떠한 개체가 바람을 막아 주면 이지러지지 않고 이러다가 떨어지곤 하죠.

이 모두가 뜬구름 같은 이 환상천을 넘어서지 않으면 안 되겠기에 여러분과 더불어 이렇게 항상 한자리를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마음속에 항상 풀포기 하나 버리지 않고 같이 하고 있다는 것, 곤충 하나 버리지 않고 또는 축생 하나 버리지 않고 무정물이나 식물 하나 버리지 않고, 우리 인간의 그 내면세계의 한마음 속에 같이 항상 일 분 일 초도 쉬지 않고 함께 운행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같이 운행을 하고 있으나, 너 나는 분명히 있습니다. 너 나가 있긴 있는데 있는 그 자체가 바로 공(空)해서, 그 가운데 무엇이 특출하게 꼭 한 가지가 있으니 그것을 여러분이 발견을 하기 위해서 같이같이 서로서로 이렇게 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첫째도 죽어야 하고’ 했습니다. 일체를 놔라! 맡겨 놔라! 어디다 놓느냐? 내가 있으니까 상대가 있는 것처럼 바로 내가 있으니깐 일체가 있고 천지와도 직결돼 있으니 여러분의 마음속에는 자가발전소가 있는 거와 같은 겁니다, 밝은 자가발전소! 그래서 여러분의 자가발전소는 이쪽에서 전력을 끌어오면 발전소에서는 줄어들거나 늘어나거나 하지도 않고 이쪽에서 끌어오는 대로 자동적으로 전력이 옵니다. 오지만 그 전력은 보이지 않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항상 여러분한테 일체의 생활이 참선이며 좌선이라고 합니다. 몸을 꿇어앉혀서 좌선이 아니라 마음이 편안하고 다 놓게 되면 그것이 좌선이며, 그것이 바로 참선입니다. 톡톡한 주관적인 내 중심이 없이 그대로 공(空)에 빠지라는 건 아닙니다. 중심이 있기 때문에 참선이라고 하고 편안한 마음도 편안치 않은 마음도 생기는 겁니다. 그런 마음이 생기지 않는다면 부처를 이루지 못하고, 마음을 깨치지 못하고, 지혜를 구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첫째도 맡겨 놔라, 일체를. ‘일체’ 하면 여러분, 아시겠죠? 고독과 가난과 외로움, 또는 우환과 병고 같은 모든 일체 말입니다. 일체 생활을 닥치는 대로 거기 맡겨 놓고 가시라. 이것이 바로 방하착이며 이것이 죽는 길입니다. 그러면서 처음에 죽어야 한다 하는 것은 바로 무조건 이유를 붙이지 말고, 아는 것도 모르는 것도 다 놓고, 내 마음에 이루어져서 참 좋다 할 때는 감사하게 놓고, 이루어지지 않았다 할 때는 그것도 고정됨이 없으니 ‘그것도 거기서 하고 거기서밖에는 길을 인도할 수가 없으니까.’ 하고 놓고, 이렇게 해 나가시라고 한 것입니다.

그래서 거기에다가 모든 것을 일거수일투족을 다 놨을 때에 비로소 과거의 나와, 즉 말하자면 주인공의 성품을 부(父)라고 한다면, 현재에 사는 나의 마음을 자(子)라고 한답니다. 자와 부가 한데 합쳐졌을 때에 바로 내 정통의 마음은 탄생하는 겁니다. 그거를 견성이라고 하죠. 그런데 부처님께서는 ‘견성을 했어도 했단 말 하지 말라’고 하셨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어린애를 방금 낳은 거와 같으니까 말입니다. 그래서 어린애를 낳은 것을 돈오(頓悟)라고 한다면, 어른이 될 때까지 길러지는 것은 점수(漸修)라고 합니다. 그래서 다 길러져서 어른이 된다면 그거는 성불이라고 하겠죠, 어른이 됐을 때.

그런데 어른이 돼 가지고도 무의 세계와 유의 세계를 합류화시켜서 용무를, 작용함이 없이 작용할 줄 알아야만이 또 그것은 구경경지에 이르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 번 죽어야 하는데, 즉 다 죽어야 한다 이런 겁니다. 거기까지 당도할 때는 어떤 이름이 붙여지느냐 하면 돈수(頓修)가 붙여집니다. 돈오·점수, 그것이 합류화돼서 화했을 때는 바로 돈수가 되는 것입니다. 이름으로써 이것이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 모든 거를 우리가 제쳐 놓고 생활하는 데서 얻어라. 생활하는 데서 당신이 나왔기 때문에 상대가 있고 모든 것이 벌어졌으니 그 벌어진 생활을 하되, 모든 것이 그렇게 바람결처럼 나툰다 이런 거죠.

우리가 부처님의 그 길을 따른다면 올바르게 자력 신앙으로서, 모든 것을 놓고 참자기의 중심에 의해 이리로도 흔들리지 않고 저리로도 흔들리지 않으면서 갈 길을 똑똑하게 갈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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