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대와 오온이 공했다는 말뜻
본문
질문
책을 보다 보니까 ‘사대(四大)와 오온(五蘊)이 공(空)했는데 무엇을 가질 게 있고 놓을 게 있느냐?’라는 말씀이 있었는데 그것이 무슨 뜻인지요? 이해하기 쉽게 일러 주십시오.
댓글목록
큰스님 말씀
부처님의 이 말씀을 말만 알았지 뜻을 모를 때는 안 것 그 자체도 소용없는 것입니다. 다 소용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잘 참작해서 한번 침착하게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어느 스님이 화두를 줬다 그러면 이차적으로 이 화두를 끊어지지 않게 하고 들어야겠다 하는 생각이 납니다. 삼차적으로는 여기에다가 모든 것을 일임하고서 앉으나 서나 끊이지 않아야지 하는 생각이 들면서, 좌선을 해도 이것을 꼭 가지고 ‘뭣고 뭣고 뭣고’ 하고 돌아갑니다. 자기가 스스로 벌써 공했기 때문에, 내가 공하고 세상이 공했기 때문에 내가 하는 것마저도 공했고 내가 가질 것도 가진 것도 공해 버렸으니까, 모든 것이 가질 게 하나도 없다는 그 점은 뭐냐? 내가 본래 가지고 있기 때문에 가질 게 하나도 없다는 겁니다. 그걸 한번 침착하게 생각을 해 보십시오. 내가 본래 가지고 있기 때문에, 여러분이 모든 거를 나쁘다 좋다 해 왔고, 여러분이 다 움죽거리고 있고 여러분이 다 생각하고 판단하고 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판단 못하고 남한테 이끌려 가는 것도 바로 자기 중심이 없기 때문에 그런 것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남이 준 화두, 바로 이것을 꽉 쥐고 굴리질 못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나 나는 일 초도 머무르지 않고, 그냥 머물렀다가 돌아가고 머물렀다 돌아가고 이것이 한정 없이, 어느 한군데 고정적으로 국한된 게 없이 전부 변천해 돌아가고 부서져 버리고 상해 버리고, 또 만날 때마다 변하고 또 말할 때마다 딴 말 하게 되고 만날 때마다 딴 사람 만나서 딴 사람 생각하게 되고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것이 공했다는 얘깁니다. 갖가지로 소소영영하게 가지고 소소영영하게 하면서도 공했다는 얘깁니다. 그대로 여여하게 우리가 간다는 얘기죠. 놓고 간다는 얘깁니다.
그랬으니 항상 그릇은 비어 있다는 얘긴데, 마음으로 만들어서 지어가지고, 문도 없고 걸릴 것도 없는 것을 마음으로 지어 가지고 ‘큰스님이 이렇게 하시니까 이것이 불법이다.’ 하는 걸 쥐고서는 그거를 놓질 못하고 가기 때문에, 외려 자기 마음이 자기 문을 만들어 놓고 그것을 열지 못하고 닫지 못하는 그런 이치가 허다합니다.
예전에 이런 말들을 했죠. ‘참선이라는 것은 꼭 해야 된다.’ 하는 것을 주장했습니다. 아주 제 일등으로 쳤죠. 그러면 어떤 것이 참선이냐? 참선은 행선도 참선이요 좌선도 참선이요 입선도 참선이요, 모든 행 전부가, 일거수일투족 전부가 참선이란 말입니다. 그런데 모두 ‘아! 결제가 되면 한 철 선방에 가서 나야지. 앉아서 좌선을 해야 그것이 으뜸이지.’요렇게 변경이 돼 버렸단 말입니다, 마음이. 육신 떨어지면 마음도 떨어지고, 마음 떨어지면 코도 떨어지고 입도 떨어지고 다 떨어질 것을 뭐가 그렇게 쓸모가 있다고 그렇게 이 육신을 가지고 매달리고 그렇게 해야만 됩니까?
마음이 주인공에 모든 걸 일임을 시켜서 놓는다면 모든 것이 편안하고, 편안한 반면에 반드시 내가 생각을 하면 바로 자(子)가 되는 것이고 생각을 안 하면 부(父)가 돼서, ‘부와 자가 둘이 아니니라.’ 하는 뜻은 ‘부는 자로 가면 자가 돼 버리고, 자는 부로 오면 부가 돼 버린다’는 얘기입니다. 둘이 아닙니다, 모두가. 그걸 어떻게 생략해서 말을 할 수 있을까. 내가 마음을 가만히 두면 부가 되는 것이고, 즉 말하자면 부처님이다 이 소립니다. 또 마음을 내고 움죽거렸다 하면 그것이 바로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게 법신(法身)이자 화신(化身)입니다.
내가 움죽거릴 때는 부처가 아들로 가고, 또 내가 가만히 있으면 움죽거렸던 게 바로 부로, 자부처로 온단 말입니다. 그러니 이건 체가 없는 거라 왔다 갔다 해도 왔다 갔다 함이 없이, 함이 없이 그냥 가고 옴이 없이 그대로, 그대로 자가 될 땐 자가 되고 부가 될 땐 부가 되고 이런단 말입니다. 그 도리를 아실 것 같으면 우리가 수많은 유생(有生)이나 무생(無生)이나 전체, 즉 말하자면 이런 게 있죠. 저 물이나 산이나 들이나 어느 곳을 막론해놓고 보이지 않는 데 영계, 유령, 유체 또는 세균이나 또 사람들 사는 마음, 천차만별로 마음 차원에 따라서 우리가 주인공에 모든 걸 일임하는 겁니다.
‘구지 스님이 손가락 하나 척 들었다고 하니까 손가락을 보는 사람이 있는데, 손가락이 아니라 우주를 든 겁니다, 전체를. 그런 거와 마찬가지로 손 든 것도 방편이니 손 들 것도 없이 내가 ‘아! 이런 건 이렇게 해야 할 텐데….’ 하는 생각을 갖게 되자 바로 주인공과 함께 하는 거죠. ‘승보(僧寶)도 그러하니라. 불(佛)과 법(法)이 둘이 아닐지언대 승보도 그러하니라. 승보는 그냥 따라가느니라.’ 이러거든요. 이 육신은 그냥 따라가는 거죠. 마음이 생기는 대로 그냥 따라가는 것뿐입니다. 그러면 불과 법과 승보가, 불과 법이 즉, 아비와 자식이 둘이 아니게 돌아갈 때는 승보도 그러하니라. 몸은 그냥 따라가느니라 이런 거죠.
그렇다면 참, 그 도리를 안다면 어떠한 거든지 못할 게 없고, 어떠한 거든지 주인공이 하는데 내 거라고 할 것도 없고 남의 거라고 할 것도 없을 겁니다. 모두는 내 것도 아니면서 전체 내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따로 내 것이 있다는 생각이 없습니다. 그럼으로써 일체 한생각에는 나도 건질 수 있거니와 남도 건져 줄 수 있는 그런 여건의 능력이 샘솟듯 한다. 그래서 감로수가 돼서 그 감로수로서 양식을 삼는다는 얘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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