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상을 정해 놓고 기도해도 되는지 > 길을 묻는 이에게

길을 묻는 이에게


길을 묻는 이에게는
큰스님 법문 중에서 발췌하여 답을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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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상을 정해 놓고 기도해도 되는지

본문

질문

없는 마음을 찾으라고 하시는데 없는 마음을 아무리 찾으려 해도 감이 오지를 않습니다. 차라리 관세음보살이나 지장보살이나 어느 대상을 정해 놓고 기도를 한다면 더 집중도 되고 성취감이 생기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 봅니다. 

댓글목록

큰스님 말씀

관리자님의 댓글

관리자 작성일

우리는 누구나 에너지통을 다 가지고 있습니다. 누구나가 다 가지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바깥으로 관세음보살이니 문수보살이니 모두 각자 이렇게 추구하고 구원을 받으려고 애쓰고 있다 이겁니다. 그런데 안에서 그 에너지통, 삼각형으로 된 에너지통을 내가 확신하면서 거기에서 모든 것을 들이고 낼 줄 안다면 이게 스스로서 둥그러진단 말입니다, 전체가. 소공에서 대공으로 가는 거죠.

그러면 우리가 삼보에 귀의한다 이러는 것도 그 삼각형의 그 에너지통에 귀의하는 겁니다.  우리가 지금 주인공이라고 하는 것이 실상 자체와 더불어 내 마음, 이 분별하는 마음과 이 육신과 삼합이 한데 합쳐진 삼각형이거든요, 이게. 그러니까 여러분이 다 그 삼각형의 에너지통입니다, 지금. 그런데도 바깥에서 구하는 게 얼마나 어리석으냐 이겁니다. 안에다가 코드를 꽂고 안에서 구원을 받게끔 하고, 감사함도 거기다가 해야 하는 것은 바로 에너지통이 자기 나오기 이전 참자기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거기다가 구원을 받게 해야 구원이 받아지지, 그렇지 않으면 구원이 받아질 수가 없어요.

만약에 어저께 먹은 컵의 물이 부처님이라면, 어저께 먹은 컵의 물이 있었기 때문에 먹고 그것이 바탕이 됐다 이겁니다. 오늘의 물이 또 있게 됐다 이거예요. 그러면 이거는 뒷생각이 끊어져야 될 거 아니오? 왜? 이 컵의 물은 바로 앞의 물이 돼 버렸으니까 말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그러니깐 이것이 없어진 게 아니라 앞으로 왔다 이겁니다. 이걸 끊는 게 아니라 이렇게 이것이 다시 바꿔져서 여기 또 왔다는 걸 모르는 거죠. 그러니깐 이거는 앞의 물은 방치해 두고 자꾸 자기가 먹고 돌아선 이 뒤의 물만 생각을 하니까 이것은 앞의 물이 생기질 않고 받아질 수가 없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이 계발을 하는 데는 어디까지나 내가 현시점에서 그 모두를 바탕으로 삼아서, 주춧돌로 삼고 길잡이로 삼고 그렇게 하는 반면에 그 길잡이가 한 것은 바로 지금 이 시점에 도달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여기에서 계발을 또 해야 되지 않느냐. 어저께 계산한 거를 오늘에 가서 계산을 한다면 되느냐?  어저께 계산한 건 계산한 것대로 어저께 계산한 거지 오늘 계산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 계산을 하는 거는 오늘의 나로부터 계산을 해야 된다 이겁니다.

그럼으로써 전자에 계산한 거와 미래의 계산이 여기 오늘의 계산으로 합쳐지는 것이 삼각형이다. 그러면 삼각형이 법이라면 둥근 것은 대공의 열반의 나툼이다 이겁니다. 그래서 열반이란 거는 뭘 열반이라고 하나? 나툼을 열반이라고 한다. 없어서 무(無)자로 돌린 게 아니다. 너무 꽉 차 있기 때문에 이것도 됐다 저것도 됐다 이것도 됐다 저것도 됐다 하니깐 이건 평등 공(空)이다 이겁니다. 그러니 꽉 찬 공이다. 그래서 ‘무’ 했던 거다. 그러니까 이 무 하나에서 수만 가지가 거기서 소생되는 겁니다. 나고 죽고 나고, 생사가 여기에서 나오는 거라고요. 공을 모르고는 대답 한마디 할 것도 없고 질문할 것도 없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씨를 심었는데 그 씨가 되기 전까지 전자에 싹이 살았죠?  그런데 씨가 거기서 여물어서 껍데기는 없어지고 씨가 나왔다 이겁니다. 그 씨를 또 되심어서 여기 지금 싹이 나와 있는데 왜 전자의 싹을 찾느냐 이거예요. 싹이 나와 있는데, 그 씨의 싹이 여기 와 있는데 말입니다. 지금 전자의 이 씨가 지금 여기 나와 있어요, 싹이. 뿌리가 박혀 있고. 아, 그런데 이걸 전자의 씨를 찾으니, 여기 벌써 있는데…. 그러니깐 그게 모순이라 이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전자의 씨를 찾지 말라. 전자의 씨는 이미 심어서 싹이 났다. 그러니까 이 씨가 여기 와서 또 싹이 된 겁니다. 뭐든지 내버리는 게 아니라 모든 게 인연에 따라서 한데 합쳐져서 하나로 뭉치면서 이것이 모든 게 나투게 되니까.

예를 들어서 한 사람이 24시간 고정적으로 한 가지 일만 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고 이것도 하고…, 한 사람이. 그럴 때 한 사람이 고정적인 거를 하지 않기 때문에 그게 나툼이라고 합니다. 그럼 우리 인체에서 24시간 살아 보면서 그걸 이해해 보시라 이거예요. 그러면 대공의 이치가 모두 나툼이지 하나도, 물질적인 이 색채는 보지 말고 이 근본적인 참나를 봤을 때 이 일체 만물의 색채는 스스로서 본래 죽을 것도 없고 살 것도 없다 이렇게 나옵니다. 그러니깐 이건 아무것도 쓸모가 없다 이러는 게 아닙니다. 쓸모가 있으면서도 쓸모가 없고 쓸모가 없으면서도 써야 하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한테 뭘 내가 강조하느냐 하면 좌선한다고 해서, 이 육신이 달구지라면 달구지를 쳐서 달구지를 망가뜨리지 마라. 왜냐? 달구지는 나중에 써먹을 건데, 공부가 다 됐다면 써먹을 거란 말입니다. 근데 공부할 때 그 써먹기도 전에 달구지를 쳐 가지고 달구지를 다 망가뜨리고 소를 끌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소고삐를 잡고선 소를 다스리면서 갈 때는 가고 설 때는 서고, 방문을 열면 방문을 닫고, 닫았으면 열고 나갈 줄 알고 이러면서 소고삐를 잡고 소를 쳐야 될 텐데 달구지를 치고 있어요.

즉, 몸을 망가뜨린다 이 소립니다. 그러면 공부를 다 하고 보면 벌써 달구지는 다 망가졌으니 이걸 어쩌나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러니 달구지를 치지 마십시오. 소는 자기 나오기 이전 자기를 말하는 겁니다. 전자의 아버지나 조상들이 아무리 잘했다 하고 아무리 도를 통해서 깨쳤다 할지라도 그것은 내 씨앗일 뿐입니다. 그래서 그 씨앗은 나와 더불어 같이 지금 싹이 돼 있습니다. 그런데 전자의 그 아버지 이름을 부르고 아무리 뭐를 해 달라고 바깥의 산소에 가서 빌어 봤던들 그건 아버지가 해 줄 수 없는 겁니다. 그러니 모든 것을 자기가 해야 된다는 것을 알고 자기 내면으로 귀의하는 공부를 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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