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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주상 보시에 대해서

본문

질문

육바라밀 중 첫번째가 바로 보시인데 그 동안 저는 경제적 여유가 없다는 핑계로 참 인색하게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부터라도 좀 보시를 하면서 살려고 합니다. 스님께서는 무주상 보시를 강조하시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스님, 우리가 정말 했다는 상(相)이 없이 보시하는 마음을 가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무주상(無住相) 보시에 대해 한 말씀 부탁드리겠습니다 

댓글목록

큰스님 말씀

관리자님의 댓글

관리자 작성일

팔만대장경이 책에만 있는 게 아닙니다. 책을 통해서 본다는 건 벌써 그건 이차적인 겁니다. 일차적으로 보세요. 우리가 사는 생활 속에서 모든 것이 돌아가고 있는 걸 좀 더 자세히 지켜보세요. 부처님께서도 육바라밀의 첫째 구절에 보시를 말씀하셨습니다만, 보시라는 건 물질적으로 주는 거는 금방 깨져 버리거나 먹어 버리거나 써 버리면 그뿐이지만, 무주상 보시라는 건 내가 한 생각을, 그 전체 대공의 이치에 돌아가는 내 귀합된 한생각을 해 준다면, 바로 그게 무주상으로서 돌아가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공부를 배우는 사람한테는 그것을 가르치기 위해서 “몰락 놔 버려라.” 하지만, 길에서 당장 죽어가는 사람을 만났는데 다짜고짜 “너, 공부해라.” 이럴 수가 있습니까? 그러니 그 얽히고설킨 유전성이나 인과응보나 그러한 것이 많아서, 죄업에 끄달려서 그냥 엎어지는 사람에겐 가다가도 무주상 보시를 해야 된다 이겁니다. 예를 든다면 어떤 이유로다가 법정에서 뻘건 줄을 치고 ‘너는 오 년을 징역을 받아라. 무기 징역을 받아라. 사형이다.’ 이렇게 된 것을, 즉 말하자면 ‘야, 모르고 지은 죄니까.’ 하고 모든 거를 용서할 수 있는 아름다운 향기와 더불어 나의 그 전체적인 생명체에, 이 모두가 시공이 둘이 아닌 전체에 돌아가는 에너지를 그대로 내가 같이 이렇게 할 수 있다면, 내가 바로 그 사람이 되고 그 사람이 내가 된다면 바로 그것은 무주상(無住相) 보시로 돼 갈 수 있는 겁니다. 그래서 죽어 가는 사람도 살릴 수가 있고, 심장이 멎어 가는 사람도 살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병에 의해서 너무 망쳐지고 죽게 된 사람은 어쩔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소가 도살장으로 간다든가, 또 사람이 가다가 어떠한 문제가 생겼다든가, 이럴 때 무주상 보시를 하는 겁니다.  가난해서 동냥을 하고 있는 사람을 본다 하더라도 이제부터는 동냥을 하지 않고 살 수 있게 하는 진실한 한생각이 그 사람을 동냥을 해서 먹고사는 굴레에서 벗어나게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주상 보시라는 것은 아주 말로 헤아릴 수 없는 보시인 것입니다.

말이 나왔으니 하는 말인데 방생이라고 하면 물에서 잘 노는 걸, 제 집에서 잘 노는 걸, 어부더러 잡아오라고 해서, 자꾸 그렇게 잡아오니까 팔리거든요. 그러니까 자꾸 잡아오죠. 그러니 잡아 올 때 죽이지, 잡아다 넣었을 때 죽이지, 또는 가지고 가면서 죽이지, 갖다 넣었을 때 죽는단 얘깁니다. 그러니 그것이 놀부의 짓이지 어디 그것이 보시입니까? 방생이고? 방생이라는 것은 물가에 가다가도 물이 없는 데서 퍼덕퍼덕 생명이 뛸 때 그때에 물에다 갖다가 넣어 주는 것이 방생입니다. 그럼 이것은 보시가 아닙니다. 이건 오히려 죄를 짓는 법입니다. 그걸 잡아오라고 가르쳐 준 자도 죄를 안 받지 않을 것이고 또 갖다 넣은 사람도 죄를 지은 것입니다.

모르니까 다 그렇겠지만, 이 도리를 아는 사람은 그렇게도 안 하겠지만, 그렇기 때문에 모르고 지은 죄는 모르고 받게 마련이다 이 소립니다. 자기가 요만큼 했으면 요만큼 받게 되고, 요만큼 버렸으면 요만큼 버린 것만큼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두를 버려라! 버려라! 놔 버려라! 쉬어라! 공에다 일임시켜라!’ 이런 말들을 하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급하면 굶어 죽는 사람 앞에는 무조건, 즉 말하자면 부황이 난 사람한테는 당장 먹어야 사니까, 이웃돕기를 해서 부황을 면하게 해 주는 그것도 보시요, 이건 유(有)의 보시이면서 또 무주상 보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먹이면서 살려 가면서 끌어다가 이 한마음의 도리를 가르쳐 주는 것이 바로 무주상 보시입니다. 그러니 물질로 줘서만이 보시가 아니라, 물질을 안 주는 것도 보시가 될 수 있고 방생이 될 수도 있고, 물질을 줘서 보시가 되는 것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무주상 보시라는 것은 마음의 양식을 넣어주는 데, 에너지를 넣어주는 데서 바로 무주상 보시가 나오는 겁니다. 본래 가지고 있는 양식이 충만한데 그것을 먹게끔 해 주는 것이 무주상 보시다 이겁니다. 이해가 가십니까?

다시 말하면 유주상 무주상이 어디 따로 있겠습니까마는 같이 마음을 한데 하면서 내 몸과 같이 생각을 하고, 내 아픔같이 생각하고, 내 자리와 똑같이 생각한다면, 어찌 내 생명은 아깝고 남의 생명은 아깝지 않겠습니까? 이 생명은 다 똑같습니다, 아픔도 똑같고 자유도 똑같고 몸도 똑같습니다.

그렇게 때문에 자기 마음으로 굴리고, 굴리면서 지켜보는 사람이 된다면, 모든 걸 공에다 놔 버리고 지켜보는 사람만 된다면 하나하나 그것이 능력이 되고, 능력의 빛이 나가게 되고, 그 빛으로 하여금 오장육부의 모든 생리적인 작용을 자기가 마음대로 자유롭게 할 수 있고, 나를 건질 수 있는 그 사람이라면 딴 사람의 육의 구원도 받게 해 줄 수 있고, 영원의 구원도 받게 해 줄 수 있는 그런 능력을 갖는다 이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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