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오돈수와 돈오점수에 대해서 > 길을 묻는 이에게

길을 묻는 이에게


길을 묻는 이에게는
큰스님 법문 중에서 발췌하여 답을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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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오돈수와 돈오점수에 대해서

본문

질문

아직까지도 서로 옳다고 주장하는 돈오돈수와 돈오점수에 대해서 스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궁금합니다 

댓글목록

큰스님 말씀

관리자님의 댓글

관리자 작성일

어린애를 금방 낳아 놓고서는 어른이 되라고 그러면 안 되죠? 어린애를 금방 낳아 놓고서 사회에 나가서 일을 해라 그런다면 못하죠. 그런 거와 똑같다고 봅니다. 그래서 이걸 도랑 없는 도랑이라 할 수 있죠. 말하자면 들어갔던 구멍으로 어떤 과정을 거쳐서 다시 그 구멍으로 나왔을 때 돈오라고도 볼 수 있겠죠.

그런데 이게 그런 과정을 거치지 않는다면 어떻게 돈오가 될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돈오와 점수는 둘이 아닙니다. 탑을 쌓을 때 쌓는 과정과 한 찰나에 봉우리 올리는 그거나 똑같습니다. 만약에 봉우리가 없다면 탑이 없고 탑이 없다면 봉우리가 없는데 어떻게 그것을 둘 다 따로따로 치겠습니까?

여러분의 마음과 몸이 둘이라고 보십니까? 만약에 돈오가 마음이고 점수가 몸이라면 어떻게 그걸 둘로 보겠습니까? 그래서 나는 싸움을 하기 이전에, 그렇게 남들이 그러더라도 “야, 돈오와 점수가 어찌 둘이겠느냐? 어떻게 얼음과 물과 둘이겠느냐? 그러지 말라. 똥물이나 구정물이나 핏물이나 모두 한데 모여서 바닷물이 된다 하더라도 그것은 젖는 것이니라. 똥물에도 젖고 구정물에도 젖고 다 젖는, 말을 하자면 이름해서 그것도 젖는 것이니라.” 이렇게 말을 해 줘야지 아, 돈오가 옳으니 점수가 옳으니 이러고 싸움을 해야만 옳겠습니까? 그것이 만약에 학술적으로 그런다면 싸움이 그렇게 벌어질 수도 있지만 뜻으로서, 선으로 들어간다면 그건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 언어도 붙지 않는 자립니다, 이게. 아니, 얼음입니까 물입니까? 물이 옳습니까, 얼음이 옳습니까?

그러니까 이 뜻이라는 거는 그렇게 무궁무진하다 이겁니다. 글쎄, 우리가 어린애를 금방 낳아 놓고선 기르는 거나 마찬가지로 견성이라는 거는 어린애를 금방 낳아 놓은 거와 같고 또 우리가 학업을 마치고 또는 교양이라든가 상식이라든가 모든 것을 배우려면 그런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사회에 딱 나설 수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딱 나설 때는 돈오지마는 그것을 배울 때는 점수입니다. 그러니 어떻게 점수와 돈오가 둘이겠습니까.  말하자면 그렇다 이거죠.

이런 예도 있었죠. 잘들 아시겠지만 경허 스님도 아주 대강백으로서 유명하게 이름을 날렸던 분입니다. 경전이라는 경전은 무불통지하고요. 그랬는데 괴질이 도는 어느 마을에 들어섰다가 하룻밤 자고 가자니까, 죽으니깐 빨리 달아나라고 그러는 거예요. 이 집 가도 그러고 저 집 가도 그러고. 그러니까 인심이 고약한 줄만 알았는데 나중에 보니까 괴질이 돌아서 사람이 전부 쓰러졌다는 얘깁니다. 그랬는데도 자기가 살자고 그냥 그 고을 안을 벗어나서 어느 나무 밑에가 앉아서 생각을 하니 기가 막히더라는 얘기죠. 세상에, 자기도 죽을까 봐 뛰어나와 보니 그 사람네들 하나도 어떻게 못했다는 얘기예요. 그렇게 아는 게 많아도 꼼짝을 못했단 얘깁니다. 그러니 여직껏 배우고 여직껏 강의한 게 무슨 소용 있느냐 이래서, 그냥 다시 돌아와서 강당을 다 해체를 시켰단 얘기죠. 그리고 책도 다 태우고 다시 공부하기 시작했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그런 거와 마찬가지로 이 선에서는 견성이 내면세계를 발견했을 때를 말합니다. 그러나 견성을 해 가지고도 거기다 다시 뭉쳐 놓지 않는다면 다시 미해진다 이런 문제가 있습니다. 왜 미해지느냐? 흩어지니까. 그걸 갖다가 자기가 견성했다고 온통 자기라고 내세웠을 때 벌써 착이 붙고 욕심이 붙고 아만이 생기고 이런다면 삼독을 벗어날 수가 없는 거죠, 견성을 했어도. 그래서 다시 뭉쳐 놔야 둘이 아닌 도리를 그때 홀연히 알게 되죠.

그래서 이 견성을 하고 성불을 해야 고 다음에 열반경지에 들어서서 자유인이 된다 이런 겁니다. 그러니 둘이 아니게 나툴 줄 알게 됐을 때 비로소 그것은 그 원 하나 탁 놓는 거나 마찬가지라 이겁니다. 봉우리 하나 탁 올려놓는, 그 돈오다 이거예요. 그러나 그렇게 돈오라고 이름을 해서 돈오지 그걸 어떻게 돈오라고 이름을 붙이겠습니까, 그 경지에.
그러니 이 죽은 세상 즉, 보이지 않는 세상을 접하는 때라 견성을 하고 나면 그 공부를 하기 위해서 그때 대의정이 생기고 그때에 시공이 초월된 것도 거기서 배우게 되고 찰나찰나도 거기서 배우게 됩니다, 둘이 아닌 도리 배울 때.

그러니깐 나 하나의 마음이 수천수만의 입자로 인해서 분자가 돼 가지고 화신으로 화해서 이 털구멍을 통해 들고 나면서 그냥 전부 그 응신이 돼 주는 그런 보살이 된다 이거죠. 그랬을 때에 모두가 보살 아닌 게 없고 또 나 아님이 없고 이 도리가 나오고 그러는 거지, 아니 이 도리를 거치지 않고는 안 됩니다.

그래서 죽은 세상의 죽은 사람도, 보이지 않는 영혼도 보이는 영혼도, 또는 생각이 없는 영혼도 생각이 있는 영혼도 모두가 그냥 다 건질 수 있는 그런 아주 광대한, 뭐라고 말을 해야 옳을지 말을 붙일 수가 없어요. 어느 게 찰나찰나 아니 되는 게 없기 때문에, 그리고 내 한마음이 이 우주를 전체 덮고 전체 굴리고 전체 딛고 그렇기 때문에 어떤 걸 어떻게 갈라서 뭐 말할 건덕지가 하나도 없기 때문에 말할 아무것도 없다 이겁니다. 이름 붙일 수가 없다 이거예요. 그러니까 지금 그 무슨 돈오가 옳으니 점수가 옳으니 이런다는 건 그건 있을 수가 없다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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