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각본대로 정해져 있는 것 같아요 > 길을 묻는 이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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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각본대로 정해져 있는 것 같아요

본문

질문

세월이 흐를수록 모두 자기 팔자대로 살아가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안되는 일에 부닥치면 내 팔자가 그런가보다 하고 또 낙담을 하게 되지요. 정말 제 생각이 맞을까요? 우리의 인생은 각본대로 정해져 있는 것일까요 

댓글목록

큰스님 말씀

관리자님의 댓글

관리자 작성일

이것은 지금 윗눈썹에서 밑의 눈썹을 내려다보지 못하는 격이나 마찬가집니다. 각본대로 마음이 정해져 있는 게 아니라, 항상 고정됨이 없다고 그러죠? 각본대로 주어져 있는 것이 마음이 아니고 각본에서 벗어난 마음이 되기 때문에 이 마음도 쓰고 저 마음도 쓸 수 있는, 체가 없는 것이 이 마음이다 이겁니다. 만 가지 마음을 낼 수도 있는 것이 마음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이 음식을 갖다 놨을 때도 앞으로 보고 뒤로 보고, 이게 물로 생기고 뭘로 생기고, 다 알아도 그걸 집어먹고 줄 줄 모른다면 그건 아무 소용이 없는 겁니다, 다 알아도. 그와 똑같은 겁니다. 도라는 것은 한생각에 의해서, 밀접한 문제가 있는 거는 한생각에 의해서 자기를 어떻게 끌고 가느냐의 문제에 있는 거고 참, 이거를 얘기를 해도 버선목이라 뒤집어 보일 수도 없고 참 큰 문젭니다. 어떤 사람은 각본대로 주어져 있다고 생각하기 이전에 스스로서 각본대로 주어져 있다는 걸 생각하거든요. ‘이거는 절대로 못한다. 이렇게 이렇게 돼 있는 거니까 이건 이렇게밖엔 될 수 없다.’라는 게 스스로서 주어져요, 자기한테. 이건 색을 보고 취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자기 마음, 체 없는 그 마음에 한 찰나의 부동자세한 그 에너지의 뜻은 광력이나 전력이나 자력이 충만하기 때문에 그것이 스스로 나와서 내가 생각하는 대로 큰 그릇을 들이대면 큰 그릇에 담기고 작은 그릇을 들이대면 작은 그릇에 담긴다 이 소립니다, 얼른 쉽게 말해서. 에너지는 항상 줄지도 않고 늘지도 않고 항상 수시로 나오기 때문에, 내가 큰 그릇을 대면 큰 그릇에 담기고 작은 그릇을 대면, 용도에 따라서 대면은 작은 그릇에 담긴다. 이 담기는 이 자체가 무엇이라고 비유를 할까? 내 한생각에 달려 있다 이겁니다. 여러분의 한생각에 달려 있는데 여러분이 이 지금 색을 보고 취하고 물질세계로서의 이 용도에 따라서 수없이 보고, 내고 들이고 내고 들이고 살면서 이게 습이 됐단 말입니다. 미지의 세계에, 보이지 않는 세계에 회전은 한 번도 해 보지 못했거든요. 생각조차도 해 보지 못했거든요.
 
그러니까 이 보이는 데 지금 우리가 법도가 이렇고 몇 항 몇 조에 이거는 이렇게 되어 있고, 이렇게 되니까 이거는 아주 각본대로 주어져 있는 겁니다. 이건 각본대로 아니면은 안 되는 거죠. 그러나 팔자 운명이 따로 있는 게 아닙니다. 자기가 생각하는 대로 팔자 운명은 주어집니다. 그런데 이 팔자 운명 속에서 어떡하면 벗어날 수 있을까. 바로 생각입니다.
 
이걸 어떻게 표현해야 이것이 이렇게 가깝다는 걸 알 수 있을까요? 수박은 수박씨가 자기를 자기 안에다 넣어 놓고도 바깥에서 수박씨를 찾는 겁니다. 이럴 수가 없어요. 어떤 청년이 와서 “내가 길가를 가니까 모든 사람들이 나를 주시하고 있습니다.” 아, 이러거든요. “야, 이놈아. 둘이 아니라는 걸 너한테 네가 가르치기 위해서 지금 침을 놓는 건데 어떻게 해서 그래 남이 너를 주시한다고 생각을 하느냐? 이 벽을 치면 봇장이 울려야지, 이놈아. 왜 너는 너한테 만날 속아!” 이러고 했습니다.

그렇듯이 이 마음 자체가 너무도 광대하면서도 묘하고 묘하면서도 신비하고 신비하면서도 위대한 겁니다. 사람의 마음자리 하나가 그렇게 천만 가지로 중요하다는 얘기입니다. 그러니 자기 끌고 가는 마음을 내가 지금 어떻게 표현을 해야 좋을까 하는 생각에서 이런 얘기도 하고 저런 얘기도 했는데, 지금 내 팔자가 금방 가서 차에 치여 죽을 팔자라고 해도 “팔자를 가서 보니까 스님, 앞으로 닷새만 있으면은 꼭 이게 병이 들리지 않으면 죽겠답니다.” 이러거든요. “허무한 소리 하지도 마라. 네가 생각하기에 달렸어. 이놈아, 그런 것 아예, 눈물 피 이런 걸 많이 흘렸기 때문에 아예 그런 것 흘리지 말고 살아. 편리하게 살아라. 종교는 편리한 거다. 인간이 고등동물로 태어나 90% 100% 이게 부처 될 가능성이 있다고 그런 거는 인간이 그렇게 물리가 터지고 지혜가 터지면은 그대로 도다. 그러니 편리하게 살아라.” 이럽니다.
 
그럼 팔자 운명이나 이런 거 보는 사람 다 굶어 죽게 생겼죠? 그런 거 저런 거 우리가 따진다면은 스스로서 이 마음이 말입니다, 이거는 옳다 그르다 하는 마음이 생기는 거를 가만히 보십시오. 어떻게 그렇게 옳다 그르다 하는 게 스스로 생기나. 스스로 자기가 생각하는 대로 주어진다는 걸 우리는 모르고 있는 겁니다. 구태여 그렇게 나쁜 데로 끌고 가려고 해서가 아니라 규정을 지어 놓기 때문입니다.
 
고정관념에 고정되게 그냥 자기의 방침대로, 자기가 보고 듣고 사는 대로 그냥, 본 대로 그냥 습대로 그냥 내놓는 거죠. 그런데 그 물리가, 글쎄 백지장 하나 사이도 안 되는 고 물리가 왜들 안 터집니까, 왜? 이것을 뭐라고 표현을 해야 옳을는지 모르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길을 가다가 쉬게 됐는데 신이 한 짝이 떨어졌더랍니다. 그래 신을 툭툭 털면서 그거를 맞추려고 그러니까 어떤 노인이 지나가다 하는 소리가 “너는 그 신을 맞추려고 하지 말고 신을 버려 봐라. 신으려고 하지 말고 버려 봐라. 네 가죽신도 있는데 왜 버리지 못하느냐.” 그러니까 자기도 모르게 무슨 생각이 나느냐 하면 신을 놓치면은 내 발바닥이 아픈데 어떻게 가겠느냐 이겁니다. 그런데 그분이 이따 하는 소리가 그 생각을 하자마자 자기가 얘기도 안 했는데 “그래, 발바닥이 아파? 발바닥이 아프고 그래서 그 신을 벗지 못하겠다고? 이놈아, 벗어 봐! 신이 저절로 생길 테니까.” 이러거든요. 그런데 그게 이치에 닿지도 않잖아요, 도대체, 그 사람으론.

그런데 얼마 거리가 멀지 않은 데에서 어느 노인네가 신을 잔뜩 만들어 놓고선, 미투리를 만들어 놓고 파는 게 아니라 길 가고 오는 사람한테 주는 거예요. 그래서 밥도 얻어먹고 신도 얻고 노비도 얻고 아, 이러고 가게 되니까 그때서야 그 물리가 조금 터져 가지고선 ‘야, 나도 이 길로 산으로 올라가서 공부나 했으면….’ 하는 생각이 들어서 그 길로 산으로 올라가서 공부를 했다는 얘기도 있습니다.

이런 얘기를 예전에 어느 스님한테 들은 얘긴데요, 우리 생활에서도 그렇습니다. 여러분한테는 이해가 안 가실지 모르겠습니다만, 내가 금방 지금 병이 들어서 죽게 됐다. 의학적으로 봐도 그렇고 이건 죽게 됐다. 이걸로서 표현을 할 수밖에 없어서 이러는 겁니다. 그랬는데 자기가 생각하기를 말입니다, 자기가 끌고 다니려면 자기가 고쳐서 끌고 다니든지 자기가 그냥 부숴버리든지 맘대로 해라 하고선 맡겨 두니까 그것이 다 해결이 났고, 오줌으로 뭘로 다 그 나쁜 게 다 나가고 다 해결이 났답니다. 그것이 어디 나변에 있느냐 하지만 그런 일도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하나하나, 하나에서부터 열까지 이렇게 볼 때 100% 하면 70%는 그래도 웃을 수 있고 기쁠 수 있는 마음을 가질 수 있지 않은가 이렇게 봅니다. 그럼 왜 30%는 없는가? 30%는 마음이 닿지 않아서 못할 뿐 아니라 너무 기울어서 못하고 이런 수가 많습니다. 그럼 색을 보고 취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우리가 이 생활이 과학인 줄 모르고 의학인 줄 모르고, 모든 게 이 생활이 진리인 줄 모르고 행하는 분들에 의해서는 기복으로만 나가기 때문에 이거는 팡이죠. 자기가 그렇게 위대하고 정말 신비하고 그렇게 당당하다는 걸, 도도하다는 걸 모르거든요, 모두가.
 
우리가 어떠한 문제를 세워 놓고 잘되겠다고 앨 쓰기 이전에 우리가 진실하게 해 나갈 수 있는 그 여건이 주어져 있다면 우리는 뭐든지 아니 할 수 없는 겁니다. 아니 할 수 없고, 아니 될 수 없고. 우리는 행복을 누가 갖다 주는 것도 아니고 누가 뺏어가는 것도 아닙니다. 단, 우리가 만들어서 행복을 가져오고 또 고에서 빠져나오고 또 병고에서 빠져나오고 가난에서 빠지고, 우리는 계발하는 겁니다. 계발도 정신계발이 아니라 심성계발로서의 정신으로 오관을 통해서 다섯 가지의 구슬이 스스로 돌아갈 때 우리는 그것이 계발이 되지 않나 이렇게 봅니다. 그러니 그 팔자 운명 이런 것도 각본에 주어져 있는 것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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