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공의 뜻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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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께서 자주 말씀하시는 오공 즉, 공심 공생 공용 공체 공식의 뜻에 대해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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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스님 말씀
내가 항상 둘로 보지 마시라, 둘로 생각하지 마시라, 둘로 행동하지 마시라고 합니다. 그렇게 아주 뿌리가 내려서 완벽하게 자기가 잡혔다면 꿈에도, 하다못해 벌레를 봐도 둘로 보지 않는다. 어떠한 무서운 귀신을 본다, 어떠한 뱀을 본다, 어떠한 큰 짐승을 본다 하더라도 둘로 보지 않기 때문에 무서운 게 앞에 닥치지 않는다 이겁니다. 그래서 공생이라는 얘기 많이 하죠. 공생. 내 몸뚱이 하나를 생각한다 하더라도 공생입니다. 모든 세포 하나하나에도, 오장육부에 생명들이다 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내 몸 하나를 봐도 공생이요, 외부의 모두를 봐도 공생으로 산단 말입니다. 그러니 공, 공을 갖다가 수만 수십만 개를 한데 합쳐도 공은 공이거든요.
모든 살아 있는 것도 모습은 천차만별로 다르지만 생명은 똑같습니다. 생명이라는 건 하루 만에 죽는 거나 며칠 만에 죽는 거나 여든 만에 죽는 거나 백 살 만에 죽는 거나 생명이라는 자체는 똑같아요. 또 마음을 천차만별로 쓴다는 것도 다 똑같아요. 그런데 사는 거, 보는 거, 듣는 거 이런 게 자기네들 통 속에서, 즉 말하자면 자기네 끼리끼리 살기 때문에, 그 끼리의 모습, 행동으로 살기 때문에 사람들이 사는 이치를 생각지도 못하는 거죠. 우리가 부처님, 보살들 사는 생각을 못하듯이 말입니다. 그래서 모습은 다를지언정 둘이 아니라는 얘깁니다. 마음은 항상 같이 돌아가고 있어요. 공심으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모습은 죄 다르지만 그 마음 씀씀이야 어디 둘이겠느냐. 이게 바로 공체입니다. 요만한 모습도 있다는 거, 움죽거리고 산다는 거 이거죠. 공체. 우리가 전부 공체죠. 이 짐승도 이렇게, 소나 무엇도 딱 배 갈라서 이렇게 다 해 놓으면은 참 그거 볼 만합니다. 사람도 역시 마찬가지죠. 육신을 잘라서 갈라놓으면 그 육신이 죽는 바람에 그 육신 속에 있던 생명들도 다 같이 죽게 되죠. 그러니까 공체며 공용이다. 공체이기 때문에 공용을 할 수 있다. 그래서 공용이다 이런 거는 예쁜 사람 미운 사람 이런 거를 따지지 말고 가난한 사람은 더 불쌍하게 생각해라 이런 뜻입니다. 왜냐하면 가난하면 전자에 어떻게 산 것을 다 알게 돼 있죠.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서 그걸 받는 것이지 자기가 지금 어떻게 잘못하고 뭐 어떻게 해서 그런 게 아니거든요. 공부 못하고 사는 것도 다 일리가 있어서 공부 못한 거고 또 그렇게 못살게 된 것도 일리가 있어서 못살게 된 거거든요. 그러니까 못살게 되는 것도 잘살게 되는 것도 그게 다 똑같아요. 잘산다고 해서 근심 걱정이 없는 게 아니거든요. 못사는 사람 근심이 요만하다면 잘사는 사람의 근심은 큰 대들보와 같은 것도 있습니다. 그러니깐 이것이 잘살든 못살든, 못사는 사람은 끼니를 거를까 봐 앨 쓰지만은 잘사는 사람은 끼니를 거를까 봐 그러는 게 아니라 자기 하는 일이 문제가 되는 거죠. 이 문제를 여러 가지로 볼 때 이게 참, 우리 같으면 편안하게 살 수 있을 텐데도 나를 버리지 못해서 편안치 못하다 이런 결론이 나옵니다.
지금 내가 왜 이런 말을 하느냐 하면 이 다섯 가지의 문제가 다, 이게 어느 정도 돌아가야 진짜 보살행으로 넘어간단 얘깁니다. 남이 보살이다 보살이 아니다 이러기 이전에 말입니다. 그럼 스스로서 행동하는 거 보면 벌써 알아요. 그 행동은 자기가 마음 쓰는 대로 행동이 나오는 거니깐요. 그러니까 그게 공용이다. 공체이기 때문에 공용이다. 공용을 하는 거기 때문에 공식으로 돌아간다. 찰나찰나 환경이 바뀌고 또 환경이 바뀌고, 찰나찰나 바뀌면서 돌아가는 일들을 그냥 여여하게, 바뀌는 대로 그냥 바꿔지면서 살아나가고 있습니다. 본래 우리가 여여한 생활을 산같이 물같이 그렇게 하고 있는데 그 마음들이 그렇게 되질 않아서 그걸 인식도 못할 뿐만 아니라 상당히 그걸 어렵게 생각하고 그냥 잠재해 버리죠.
공식 하면은 벌써 원식인데 ‘공식’ 하니까 먹는 걸로만 생각하지 마십시오. 한번 이 모습이 있는데 이 모습이 저 모습 안으로 싹 들어갔을 때 생각을 해 보십시오. 이 모습 안으로 모습들이 천차만별로 만 개가 들어갔다 해도 아무것도 없는 거예요. 이 있는 자체가 바로 공식이기 때문이죠. 공한 자체기 때문에 이 공한 자체에 이 공한 자체가 모두 들어가면 그냥 공식이 돼 버리죠. 그래서 부처도 중생도 둘이 아니다. 보살도 중생하고 둘이 아니다. 벌레하고도 둘이 아니다. 이 모두가 둘이 아니라는 그 점이 바로 거기에서 나오는데, 정말 우리가 그 도리를 모른다면 도깨비장난 하는 거와 같은 겁니다. 우리가 영상으로 그냥 체가 생겨 가지고 그냥 구름 위에 떠다니면서 그냥 움죽거리고 사는 것과 같은 거죠.
이거 정신 차려서 알지 못하신다면 요다음 생에 자기가 훨훨 털고 나설 수가 없어요. 이건 ‘듣고 보는 데 있는 게 아니다.’라고 하는 그 자체 가운데에 바로 듣고 알 수 있다는 얘기죠. 이 모습 아닌 모습, 생명 없는 생명, 마음 아닌 마음, 함이 없는 용, 또 모든 것을 함이 없이 할 수 있고, 먹음 없이 먹을 수 있고, 이 모든 것이 다 바닷물을 삼킨 거와 같습니다. 그런데 바닷물을 삼켰으면 바닷물을 토해 낼 줄을 알아야 하는 그 도리가 원식이라고 할 수 있죠.
그래서 이게 지금 말로 공식이다 이렇게 말을 해도 되죠. 그러면 그 바닷물을 다 집어먹었을 때에 그 물 속에는 뭐든지, 별의별 게 다 들어 있을 테죠. 죽는 것만 들어 있는 게 아니라 아픈 것도 들어 있고 뭐, 말로는 형용할 수 없이 다 들어 있는 거죠. 천차만별로 살아나가는 그 마음속에, 별의별 가정 속에 그 애타는 마음들, 이쪽에는 이런 거 저쪽에는 저런 거, 모두가 이렇게 들어 있는 그 자체가 몽땅 그 바닷물 한 속에 들어 있죠. 바닷물 한 속에 들어 있는 거를 다 삼킬 수 있어야만 그게 공식이라고 할 수 있어요. 그런데 그걸 공식이라고 진짜 하려면 그것도 내놓을 수도 있어야 된다는 얘기죠. 그 물을 정화시켜서 내놓을 수도 있어야 된다 이런 소리죠.
이 문제가 참, 우리가 그냥 듣고 그냥 보고 이렇게 그냥 헤어지고 이러지만은 그걸 헤어지든지 듣든지 잠을 자든지 깨든지 그것만 생각하고 있으라는 게 아닙니다. 시시때때로 살아나가면서 악한 사람도 만나고 선한 사람도 만나고 악한 일도 생기고 선한 일도 생기는 데서 다 이거를 둘 아닌 도리를 배우시란 얘기죠. 악한 것을 만났을 때 그것을 둘로 보지 않는 그 마음으로서 둘이 아니게끔 관해 놓으면 그것이 스스로서 둘이 아니게 처리가 된단 얘기죠. 그것이 이렇게 공부하는 길이거든요. 또 우리가 악한 사람을 만났을 때 악한 문제가 생기게 되면은 그거를 내 탓으로 돌리고 그걸 관해 놓아라. 상대방도 자기이기 때문이죠. 그럼으로써 그것이 성취된다거나 그것이 잘 무마가 된다거나 이렇게 된다면 그게 바로 경험이자 바로 자기가 길을 가는 데에 걸림 없이 여여하게 걸어가는 길이죠. 이게 모두가, 하나서부터 열까지 다 그런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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