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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의 자성이 확실히 어디에 있는지...

본문

질문

스님께서는 항상 내 마음 안에 스스로의 성품이 본래 갖추어져 있으니 그 자성을 믿고 모든 것을 맡겨 놓으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제가 공부를 한다고 하면서도 저의 마음 안에 있다는 저의 성품을 온전히 느끼지 못한 채 생각으로만 알고 있기에 진짜 맡기지 못하고 헛바퀴만 돌고 있는 것 같습니다. 천연적으로 있다는 자성을 어떻게 인지할 수 있고, 어떻게 확고부동하게 믿을 수가 있을까요? 정말 내 안에 있다는 것이 확신이 선다면 진짜로 믿고 맡길 수 있을 텐데 말입니다. 그러니 저의 자성이 확실히 어디에 있는지, 그리고 어떻게 해야 제대로 느낄 수 있는지를 상세히 가르쳐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댓글목록

큰스님 말씀

관리자님의 댓글

관리자 작성일

우리는 일면 생각하고 뛰면서, 뛰면서 생각하면서 집어먹고, 집어먹으면서 뛰고 이러는 세대입니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뜻은 다 마찬가지겠지만 시대가 시대이니만큼 물질로서의 과학도 문화도 모든 게 발전이 돼서 우리 머리는 그때와 지금이 다릅니다. 그러니 오늘 요 대낮에 잠시 잠깐 빛이 비추는 걸 여러분이 아시죠. 어저께 밤에 또 주무셨죠. 매사 다 건건이 아시면서도 모른다고 하시겠습니까? 그 아시고 계신 그 자체가 자성(自性)입니다. 그래도 모르신다고 하시겠습니까? 불성이 어딨느냐고, 내놔 보라고 막 이러겠습니까?

이 점에 뒷받침이 될 얘기가 있습니다. 예전에 오조 홍인 선사가 육조 스님이 행자일 때 삼경(三更)에 들라고 해서 금강경을 설하시니 그 끄트머리에 대답한 육조 스님의 말이 있습니다, 네 가지 종류. 여러분이 나보다도 아마 더 잘 아시리라고 믿습니다. 그런데 거기에는 뜻이 있습니다. 말이 아니라 뜻이 있습니다. “자성이 본래 청정함을 어찌 알았으리까?” 하는 말의 뜻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본래! “자성은 본래 생멸(生滅)이 없는 것을 어찌 알았으리까?” 그 ‘본래’가 참 중요합니다. “자성이 스스로 갖추어 가지고 있는 줄 어찌 알았으리까?” “자성은 움죽거림이 없이 만법을 들이고 내는 줄 어찌 알았으리까?” 이겁니다.

아마 내가 틀렸는지도 모르죠. 그러나 뜻은 똑같습니다. 예전에 들은 얘깁니다마는 그걸 듣고서 참, 여러분도 모두 감지하리라고 믿습니다. 그런데 여직껏 들어서 알고 있으면서도, 자기가 알고 있으면서도 그 알고 있는 자성이 누군 줄을 모르신다면 어떡하겠습니까? 본래 스스로 갖추어 가지고 있는데 말입니다. 그리고 들이고 내는데 말입니다. 손색이 없고 여여하단 말입니다.

여러분이 모든 걸 다 알고 있죠. 잘못되고 잘된 걸 다 놔라 이랬습니다. ‘잘못되고 잘되고, 좋고 나쁜 걸 아는 거는 다 놔라.’ 잘못되는 것도 나오고 잘되는 것도 나오고, 잘하는 것도 나오고 못하는 것도 나오고, 높은 것도 나오고 얕은 것도 나오고, 일체 평등하게 거기에서, 그르고 옳은 게 다 거기서 나오니, 나오면은 바로 나오는 대로 재깍 자기가 알고 있단 말입니다, 또.

나오는 것도 알고 들이는 것도 알고 있단 말입니다, 자성이. 그 자성(自性)의 원력이라는 것은 이 세상을 다 싼다 해도 두루 할 수 있는 그런 광대무변한 자리다 이겁니다, 자성 자리가. 일체제불이 같이하고 있고, 일체제불이 있는 자리에는 일체 중생이 다 같이하고 있다 이 소립니다. 이 말을 20년, 30년 이렇게 되풀이하게 만들어야 합니까? 되풀이를 하되 그 되풀이하는 말이 끝이 없군요. 그 뜻을 아시란 말입니다, 뜻!
 
본래 청정하다. 자성은 본래 청정한 걸 알고 있는 거죠. 청정한 걸 알고 있는 그 자체를 뒷받침하기 위해서 여러분한테 고정됨이 없이, 청정한 거는 깨끗한 게 청정한 게 아니라 구정물, 더러운 물, 고름물, 핏물 다 한데 합치는 것이 청정이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또 고정됨이 없이 한 찰나에 나투면서, 즉 윤회라고 해도 되죠. 반복하면서 제자리걸음 하면서 그저 찰나찰나 바꾸어 돌아간다. 이 사람 만났다, 저 사람 만났다 고정됨이 없어요. 만남도 고정됨이 없고, 보는 것도 듣는 것도, 먹는 것도 하는 것도, 가고 오는 것도 이 육체를 가지고 지금 살고 가는 것도, 고정된 게 하나도 없으니 그게 청정이라 한다. 그걸 거름 삼아서 내가 있는 것을 가지고 청정이라고 한다. 알고 있는 그 자체가 자성이다, 밝다, 지혜로워야 된다, 그 밝음을 깨닫는다. 이런 말을 나뿐만 아니라 수차에 거듭거듭 선조께서들 말씀하셨습니다. 사대 성인도 말을 했고요.

지금, 천장에 등이 있습니다. 등이 있는데 등대 자체가, 예전에 선조들께서도 많이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 등대라고. 지금은 등잔이 아니라 전구가 있어서 불이 들어오죠. 이런 것도 바로 저 등대를 내놓을 자리가 있어야 내놓죠, 그렇죠? 그래서 이 몸뚱이는 등대와 비유했고, 마음은 등불에 비유했고, 또 믿음은 심지를 비유했고…. 즉 말하자면 계행(戒行)은 기름으로 비유했고. 여러분 나보다 더 잘 아시죠. 지혜는 밝음을 말했습니다. 그렇게 등대가 없었더라면 등잔을 어찌 매달아 놓느냐? 그러면 이 등대 자체, 몸뚱이가 화두인 것입니다, 화두! 그대로 전구도 저렇게 걸어 놓아지고 그 속에 선도 있고 밝음도 있고 전력도 있고. 기름을 계행이라고 했으니 전력을 말한 거죠, 지금으로 비유한다면.

그런데 얘기를 하면은 말만 듣지 마시고, 다섯 가지고 네 가지고 한데 합쳐서 공존하고 있다 이겁니다. 공존하고 있어요. 따로따로 이름은 있으되 공존하고 있다. 눈과 귀가 따로따로 있고 이름도 따로따로 있으나 눈 간 데 귀가 가고 귀 간 데 눈이 속해 가더라. 또 무슨 시각이니 청각이니 감각이니 촉각이니 하는 말들도 말일 뿐이지 같이 혼합해서 동시에 돌아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척 보면 척 돌아가, 벌써. 안 그렇습니까? 여러분, 남이 우는 걸 보면 ‘아, 슬프구나.’ 이렇게 척 돌아가니까 시각이다 감각이다 할 것도 없이 그냥 돌아가죠. 그 말은 벌써 뒤돌아가 버려요. 생각하고 난 뒤에 말은 돌아가니 그 말이 무슨 필요 있느냐 말입니다. 그래서 또 말을 하자면 시각을 통해 거쳐서, 감각을 통해 거쳐서, 청각을 통해 거쳐서, 촉각을 통해 거쳐서 두각을 통해서 심장으로 깊이 들어서 불성으로 규합이 돼서 타파가 된다, 돌아간다, 회전이 된다, 발끝까지 회전이 된다 이런 말들을 할 수 있죠. 그것도 옳은 말입니다.

허나 우리 지금 공부하는 것은 우는 걸 봤으면 ‘어이구, 저거 왜 울까.’ 하다가 벌써 주위의 환경을 보면 슬퍼서 우는지, 기가 막혀서 우는지, 또 반가워서 우는지가 척 들어온단 말입니다, 벌써. 그렇게 척 들어와 알고 있는데 구태여 그 말이 무슨 필요 있느냐 이겁니다. 그러니 이런 공부를 하는 겁니다, 지금. 말을 하기 이전, 우리가 알고 있는 자체의 자성, 그 자성은 묘각이라고 할까요? 아주 묘해서 여러분이 그대로 지금…, 내가 항상 하는 말이 그거죠. “마음을 좋게 가져라. 생각을 좋게 해라. 꿈을 꿔서 언짢더라도 좋게 생각하고 놓으면은 그대로 회전이 돼서 보이지 않는 50%에서 보이는 50%로 나온다. 그대로 믿고 그렇게 해라.” 하는 것이 말하기 이전입니다.

그래서 내 말은 단 한마디라면 ‘당신이 알고 있지 않습니까?’ 이겁니다. 당신네들이 모두 찰나찰나 화해서 돌아간다는 그 자체를 알고 있지 않습니까? 그걸 알고 있기 때문에 생멸도 없다는 걸 알고 있지 않습니까? 그걸 알기 때문에 만법을 스스로 갖춰 가지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스스로 움죽거리지 않으면서도 내고 들이고 자유자재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 자유자재하고 있는 그 자체를 알고 있느냐는 겁니다. 알고 있지 않습니까? 볕이 나고 지금 낮이라는 것도 알고 있지 않습니까?

진실한 마음으로서 우리가 진실하게 믿고 ‘자성불(自性佛)이란 바로 고정됨이 없기 때문에 주인공이라고 그랬구나.’ 하는 것을 믿으세요, 좀. 믿고 모든 것을 거기다 맡겨 놓고 생각을 좋게 해라. 안 된다 하더라도 안 되는 게 어딨나? ‘안 되게 한 것도 거기서 한 거고 되게 하는 것도 거기서 한 건데 이번에는 되게 하겠지.’ 되게 하는 것도 안 되게 하는 것도 거기서 하는 거니깐 자기가 되고 싶어 하는 건 더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네? 되게 해 달라지 않아도. 그러니 더 잘 알고 있는 놈이, 자기가 지금 되고 싶어 하는 거를 자성이 알고 있기 때문에 보이는 대로 다시 돌아서 회전이 돼서 나온다 이겁니다.

그러니 ‘되게 해 주시오.’ 이럴 필요도 없죠, 알고 있으니까. 말로는 “난 그렇지 않아.” 이러면서도 속으로는 ‘아이, 고것 좀 가졌으면….’ 이러거든요. 허허허. “난 그렇지 않아.” 하면서도 ‘고거 잘생겼는데.’ 요러거든요. 그것이 바로 자성이 알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알고 있는 고놈이 있기 때문에, 내가 갖고 싶어 하는 것을 자성이 알고 있죠. 그러니 ‘믿지 못하지.’ 하지 마시고 믿고 모든 것을 좋게 생각해서, 자주 이성계 얘기 했듯이 죽을 꿈을 꿨다 하는 생각이 들더라도 ‘어허, 죽는 것 사는 것이 따로 없는데 어찌 죽을 게 있노!’,  ‘아, 좋은 일 생기겠구먼.’, ‘승진하겠구먼.’ 용도에 따라서 딱 생각을 해 버리는 겁니다. 그냥 밀어 던지세요.

그러니까 알고 있는 그 자성을 믿고 놓을 수 있고 생각을 잘해서 놓을 수 있다면, 회전이 돼서 50% 안 보이는 데서 50% 보이는 데로 나온다면 우리는 사람답고 흥겨웁게 삶의 보람을 느끼면서 살 수 있을 것이다 하는 얘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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