확철대오하는 방법이 무엇입니까?
본문
질문
나’는 보았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확철대오 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나마저 없는데, 있다 없다도 없는데 말입니다. 확철대오마저도 없는데,정말로 차원 아닌 차원, 무한량의 차원의 맛을 느끼고 싶습니다. 이참에 확철대오를 해야겠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육신을 바꾸든지 안되면 우주의 존재로 남을 가치조차 없습니다. 한번 선의 칼을 뽑았으면 뭐라도 못하겠습니까? 언제까지 몸 받아 가면서 일희일비하면서 끄달리며 살수는 없습니다. 사람 몸을 받고 정법을 만났을 때 직통으로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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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스님 말씀
주인공은 죽은 세상 산 세상을 넘나들면서 연방 돌아가는 겁니다. 그러니까 나도 그에 따라서 자연 돌아가는 거죠. 거기에 비좁은 마음으로서의 ‘나’는 없습니다. 그것이 자연의 모습입니다, 그것이 자연의 모습인데도 사람들은 그걸 모르고서 항상 ‘나다’ ‘내가 아니다’하고들 있죠. 그건 진리와 함께 회전하는 마음이 아니고 한군데에 고정된 마음이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나다’ ‘내가 아니다’를 몽땅 그 자리에 맡겨 놓으면 죽은 세상 산 세상을 같이 회전하면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렇게 아는 것이 지혜입니다. 그렇게 나를 고정되게 세우지 않고 자유로이 돌면서 넘나드는 그것이 중도입니다.
그리고 중도는 곧 중심이란 뜻인데 그 꿋꿋한 중심이라는 것도 내세울 게 없는 것이 중심입니다. 큰 중심은 그렇게 모든 것을 다 포함하게 마련이죠. 그런 중도, 중심이 선 뒤에야 참 지혜가 우러나오는 것이고, 현상 세계에 알맞는 판단이 딱딱 설 수 있는 겁니다. 그런데 중생은 그런 중도, 중심, 중용이 되지 못하기 때문에 그런 판단이 서질 못하는 거죠. 판단이 서질 않아서 일을 그르치는 경우가 좀 많습니까? 그러니 이 중심이라는 것이 자비 중용이지 다른 게 아닙니다. 내가 안다고 해서 아는 데로만 치우치고 그래선 안되죠. 또 모른다고 해서 고정되게 항상 모르기만 하던가요?
그러니 이 모든 것을 주인공 자리에다가 모두 놓으라고 하는 겁니다. 그렇게 맡겨 놓으면 내 근본 자리로부터 유위, 무위를 스스로 다 회전시키기 때문에 저절로 중도, 중용이 되고 또 저절로 진리에 부합하도록 생산이 됩니다. 생산을 해도 한 가지만 생산하는 게 아니라 천 가지 만 가지를 자유스럽게 생산해 나가게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또 생산을 해내는 그것만이 전부가 아니다 이거죠. 생산한 것들을 거두어들일 줄도 알아야 됩니다. 그런데 그 모든 것, 생산하고 거두어 들이는 그것들이 모두 한군데서 다 나고 드는 겁니다. 그러니까, 들였다 냈다 하는 것이 가능한 까닭은 다 쉬고 맡겨 놓았기 때문에 중도가 되고, 중도가 되었기 때문에 지혜가 생기고, 지혜가 있으므로 중용이 나오는 거죠.
그래서 우리는 이걸 알아야 합니다. 깨우치겠다고 종종 걸음을 걸으면서 서두르지 말고 한결같은 마음으로 꾸준히 믿고 놓으며 여여한 마음가짐으로 보살행을 할 때 그것이 곧 참선이며 올바른 수행인 것입니다. 그리고 진리란 찾는 것도 아니고 버리는 것도 아니라는 걸 말입니다. 그냥 쉬고, 맡길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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