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감옥에서 벗어나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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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반야심경에서도 “우리 함께 어서어서 벗어나세” 했는데, 정말 저도 제 마음의 감옥 속에서 벗어나고 싶습니다. 나름대로 관하면서 주인공에 맡겨 놓으려고 애를 쓰는데도 자꾸 제 마음에 속고 맙니다. 제발 속히 벗어날 수 있게 한 말씀 일러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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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스님 말씀
여러분! 우리가 이 세상에 날 때에 누구나가 다, 못생겼든지 잘생겼든지 자기가 형성시켜서 자기가 난 것입니다. 못났든 잘났든 자기가 형성시켜서 났으니까 바깥에서 구원을 받으려고 애쓰지도 말고 바깥에서 구하려고 애쓰지도 말아야 합니다. 바깥의 형상을 보고 남에 참견도 하지 마시고 오로지 나한테 인연이 있어서 닿는 일은 모든 것을 나한테, 그 상대방을 원망하고 상대방한테 말할 게 아니라 바로 내공에다가 믿고 놓고, 거기에서 굴릴 수 있는 그 마음의 여유를 갖는다면 우리는 어떠한 일도 그대로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소소한 일뿐이겠습니까. 생활이 불교고 불교가 생활이고 또는 마음이 부처고 부처가 마음인지라, 우리가 사람으로 태어나서 공부하는 데에 어디에 역점을 둬야 하느냐. 생활이라면 가정생활만이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그렇고 국가적으로도 그렇고 세계적으로도 그렇고 우주적으로도 그렇습니다. 다 생활인 것입니다.
만약에 공중에다가 우주 정거장을 만든다, 우주에 정거장을 만들고 사람이 우주에 가서 살 수 있도록 만든다 하더라도 하늘과 땅, 이 전체가 상응되지 않는다면 이것이 무허가로 몰리게 되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데 아무것도 없다 하지마는 우리가 보이는 데보다도 더 역력하고 더 세밀하고…, 쌀 한 토막 에누리가 없는 이 법은 아주 엄중하고 엄중합니다.
그러니 얼른 생각할 때에 ‘이 공부를 해서 무엇을 하나?’ 하지마는 그렇게 섣불리 생각하지 마십시오. 우린 생활에서도 하나하나 말을 하지 않고 한 생각을 먼저, 그러니까 상대방에서 어떠한 문제가 생겼을 때 한 생각이 벌써 건너고 나면 그 마음이 내 마음과 둘이 아니어서 내 몸뚱이 움죽거려서 거길 갔을 때에는 이미 마음이 한마음으로 통해서 마음과 마음이 다 같아지니 이 육신도 같이 참 좋게 대화가 이루어지는 겁니다. 그러면 가정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모든 것에서 이 법이 일상생활에 쓰여진다는 것을 역력히 아실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지금 시대가 공중으로 수집을 하고 있고 공중으로 어떠한 혹성의 타격도 받을 수 있는 문제가 있고 세균의 타격을 받을 수도 있고 공해의 타격을 받을 수도 있는 그런 시대입니다. 그러나 한 생각에 공해도 없을 것이요, 한 생각에 공해도 있을 것이요, 있다 없다, 한다 안 한다를 한 생각에…, 내 한 생각이라면 그렇게 법이 돼서 그대로 정돈이 될 때에 바로 내 이 살림뿐이 아니라 국가적으로도 그렇고 사회적으로도 그렇고 우주적으로도 우리가 마음대로 응용할 수 있는 작용법이 되는 겁니다. 이 작용법을 바로 여러분이 다 섬세하게 가지고 계시다는 걸 증명하는 것도 바로 인간입니다.
여러분이 이 세상에 나왔으니까 바로 그것이 화두가 되고 그것이 근본이 아니겠습니까. 부처를 만들 수 있는 근본이 아니겠습니까. 그 근본을 어디 가서 찾습니까? 자기가 가지고 있으면서 말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생각하실 때에, 생각을 내는 것도 생명의 불성이 있으니까 생각을 내실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여러분이 바깥에서 자꾸 찾는 그러한 문제가 어디에 있는가. 그걸 비교해서 한번 말씀드리죠. 줄창 내가 얘기하지만 작년 콩씨를 올해 심어서 콩 싹이 났습니다. 콩 싹이 자라서 콩이 열렸습니다. 그랬는데도 불구하고 그 콩나무는 자기 콩나무에서 콩씨가 열린 거는 생각 안 하고 작년에 심은 그 콩씨를 찾는 겁니다. 내가 나기 이전을 찾으라니까 그만 바깥에서, 작년에 밭에 심었던 그 콩씨를 찾느라고 헤매고 돕니다. 얼마나 어리석습니까?
생각을 해 보십시오. 코를 꽁꽁 막고선 냄새를 맡으려고 해 보십시오, 냄새 맡아지나. 혀를 끊고서 말을 하려고 해 보십시오, 말이 되나. 우리는 마음의 눈을 떠야 마음의 진가를 맛볼 수 있는 것입니다. 물론 마음의 진가를 맛보았어도 맛본 그것을 또 안으로 굴려서 체험을 하면서 자꾸자꾸 지혜를 넓혀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깨달았으면 깨달았다는 말 할 필요가 없이 안으로 굴리고 굴려서 또 지혜를 넓히고….
지혜를 넓혀서 또 온 바다를 만드는 거와 같이 내 마음이 온 누리 어느 곳곳에 닿지 않는 데가 없이 됐을 때에, 여러분과 나와 둘이 아니게끔 됐을 때에 일체 만물, 무정물이나 모든 생물, 물에 있는 고기와 대화를 할 수가 있는가 하면 저런 풀잎하고도 대화를 할 수가 있는 겁니다. 산에 올라갔을 때는 그 풀잎들이 다 말을 해 주고 ‘이것은 당신의 약이 되는 거’라고 하면서 가르쳐 주기도 합디다.
여러분은 꼭 먹을 걸 짊어져야만이 산에도 올라간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난 그거와는 다릅니다. 내가 먹기 위해서, 도야지처럼 이 세상에 났다면 그것은 천만의 말씀입니다. 자기가 자기를 형성시켰을 때는 자기가 자기를 굶겨 죽이는 법은 없습니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는 속담이 있듯이 말입니다. 맨몸뚱이로 산에 올라갔어도 맨몸뚱이로 그렇게 올라갔다면 ‘허허, 이거는 먹을 궁리를 안 하고 올라왔으니 먹여 줘야지.’ 허허허, 그래서 그 풀잎과 풀잎이 다 같이 동일하게 되니까 먹을 것을 스스로서 갖다가 주더라 이겁니다. 왜 갖다 주느냐. 내가 움죽거리는 대로 먹을 게 있어! 그러면 사람이 먹기 위해서 삽니까, 살기 위해서 먹습니까?
또 어떤 사람은 생식을 한다고 쌀을 물에다 불려 가지고 한 주발씩 먹는 것도 봤습니다. 차라리 밥을 해 먹지 뭣 때문에 물에다 담갔다 한 주발씩 먹습니까? 그렇게 하려면 차라리 보통 여러분과 같이 그냥 먹는 게 낫겠죠. 그렇기 때문에 진실한 마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진실한 마음은 하늘에서 알고 땅에서 알고 법계에서 안다는 얘깁니다. 거짓이 한 치라도 있다면 그건 용납되지 않습니다. 거짓이 한 치라도 있다면 바로 자기가 자기를 속이는 것이죠. 그 속임을 받는 것도 자깁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늘에서 열쇠를 내주지 않습니다. 바로 주인공이라는 이름 아닌 주인공이 하늘, 우주 전체를 싸고돌고 있는 것이죠.
여러분, 과거를 못 보 시걸랑은 현실을 보십시오. 눈이 어두워서 말이죠, 빚을 얻어서 어떠한 장사를 하려고 했는데 이익이 남아서 들어올 것만 알았지 빚져서 이자와 더불어 같이 나가는 거는 생각지 못하고, 그러다가 그것째 그만 잃어버려서 탕진을 하는 수도 많습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진실한 자기 마음을 속이지 말고 자기 마음을 정도에 넘치지 않도록, 분수를 알맞게 지키면서 한 걸음 한 걸음 무겁게 두들겨 가면서 걷는다면 아마 천둥 벼락을 내려도 꼼짝도 안 하고 여러분은 그대로 진행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내가 이런 공부를 하면 보통 생활에서 어려움이나 좀 없애고 그냥 살겠지.’ 그러지만 이 생활 속에서도 얼마나 어려움이 많습니까? 내가 주장자를 세우지 못하고 그걸 발견을 못 하고 이래 가지고서는 세균, 영계, 윤회, 생사, 유령, 업보에 끄달리면서 살아나가니까 그 고달픔은 말도 못 합니다. 거기에서 나 하나만 몰락 벗어난다면 그 외의 것은 다 벗어나는 것입니다. 본래 나는 공해서, 벗어난 것인데도 불구하고 마음으로 지어서 속는 것이고 그게 업보가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잘 침착하게 생각하셔서 누가 모든 걸 망하게 했고 누가 흥하게 했고 누가 웃게 했고 누가 울게 했고 누가 그렇게 했는지를 잘 살펴야 합니다. 그렇지 못하고는 공덕은 쌓을 수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이 진심으로 있든 없든 성의껏 시주를 하고 정성을 들이면서, 과거의 빚을 갚으면서 미래의 덕을 쌓으면서 우리는 현실의 공부를 하자 이겁니다.
현실의 공부를 할 때 영원한 오늘, 영원한 오늘을 안다면 영원한 오늘도 벗어날 것입니다. 나 하나로 인해서 이 세상의 모든 것이, 진리가 돌아간다고 생각했을 때 나 하나도 바로 벗어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경지까지가 어려운가 하면은 어렵지도 않고, 어렵지 않은가 하면 어렵기도 합니다마는 이것이 가다 보면 다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려고 생각하는데 왜 안 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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