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생 후생이 정말 존재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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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우리가 윤회를 한다면과거의 전생과 현생과 미래의 후생이있다는 것인데전생과 후생이라는 것이 정말로 존재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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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스님 말씀
이런 말이 있죠.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고요. 그런데 말입니다, 우리가 그런 식물을 봐도 우리 인생의 진리를 알 수 있지 않습니까. 또는 과학자들이나 의학자들이 지금 하고 있는 일들을 가만히 생각해 봐도 전생이 있고, 전생이 없다면 지금 현생이 없겠죠. 그런데 말입니다, 전생과 현생이 없다는 것은 전생이 바로 지금 현생과 더불어 한데 합쳐졌기 때문입니다. 즉 말하자면 과거심이 현재심과 동시에 합쳐졌다는 겁니다. 둘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거를 아시면 전생이 반드시 있죠.
작년에 콩씨가 있었기 때문에 올해 심어서 콩나무가 난 거죠. 그걸로 비유를 해 두고요. 그런데 콩나무가 났기 때문에 콩씨가 또 열리죠? 그 콩씨로 인해서 콩나무가 나고요. 연방 되풀이하게 되지요. 그런데 우리가 살아가면서 그 콩나무가 자기라고 하기 때문에 콩씨는 여차가 된 거죠. 콩씨가 있는데도, 본래 콩씨가 자기한테 있는 것도 모르고 콩나무가 자기라는 겁니다. ‘콩나무가 자기라고 하지 말고 콩나무가 있기 때문에 콩씨가 있고 콩씨가 있기 때문에 콩나무가 있는 거니깐 둘이 아니다, 그러니 공했다, 공한 데서 나오는 거 공한 데다가 일임해서 놔라, 믿어라, 물러서지 말라’ 이러는데도 그걸 믿지 못합니다.
콩나무가 나라고 할 때는 바람에 맞고, 모든 것이 아주 좋지 않습니다. 왜 좋지 않으냐. 너무 끄달리기 때문입니다. 끄달리기 때문에 쫄쫄이가 되죠. 사는 데 그건 부자가 못 되고 아주 가난합니다. 마음이 가난하면 생활도 가난하고 육신도 가난하고 모든 게 가난한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가난에 빠져서 허덕이면서 자기에게 본래 창살이 없건만 마음으로 창살을 만들어 놓고 그 감옥에서 헤매고 돌죠.
그럴 때에 자기 마음으로 지어 놓은 업보가 바로 넝마의 차원이냐 금의 차원이냐 무쇠의 차원이냐 그 말입니다. 마음으로 지어 놓은 그 업보의, 인연 지어 놓은 것이 깡통 인연을 지어 놨다면 깡통끼리 모여서 부딪칠 거고 넝마 인연을 지어 놓았다면 넝마끼리 모일 거고, 그리고 만약에 금의 인연을 지어 놨다면 금끼리 모일 겁니다. 이 세상을 잘 보십시오. 금끼리 모이고 넝마끼리 모이고 깡통끼리 모이고 무쇠끼리 모이고 이 세상 사람들도 자기 배운 것만치 자기 차원대로 전부 모이지 않습니까? 상인은 상인대로 모이고 말입니다.
그러니까 자기가 경험하고 행하고, 배우고 듣고 보고 이런 차원에 의해서 바로 우리는 오늘날 그대로 모인 것입니다. 우리가 한 식구로서 살면서도 그렇고, 깡통은 깡통끼리 모였기 때문에 소리가 분잡하게 나죠. 소릴 안 내려고 가만히 했는데도 소리가 나는 거예요. 말다툼이 되는 거죠. 그래서요, 금이라는 거는 조그마하면서도 항상 속에다 지니기 때문에 말도 없고 부딪칠 필요도 없고 항상 몸에 지니지 않으면 장 속에 넣어 놓고 이러니 부딪칠 리가 없어요. 그것이 한 차원의 마음이라고 볼 수 있겠죠.
자기가 보이지 않는 데 마음으로 지어 놓은 것은 보이지 않게 받을 것이고 또는 보이게 육신으로 저질렀다면 육신으로 받게 마련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해 놓고 우리가 받는 것이지 누가 갖다 주고 뺏어 가는 것이 없죠.
그러니 우리가 이 세상 돌아가는 거를 잘 파악해서 잘 생각해 보신다면 우리는 견성 성불할 수 있습니다. 모든 게 공해서 돌아가되 자기가 지어 놓은 대로 깡통이 되려면 깡통이 되고 자기 마음먹는 대로 자기가 마음먹고 행하는 데에 달렸으니 전생 후생을 따로 찾을 게 아니라 바로 내가 전생에서도 그러한 차원에 있었기 때문에 오늘날에도 요 차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여기에 태어나서 요렇게 차원대로 모였다는 걸 아셔야 합니다. 내가 지어 놓은 것만치 가지고 탤런트처럼 팔자 운명이 거기 붙어 돌아가고 윤회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유전성’ 하는데 아니 글쎄, 할아버지께서 목병을 앓아서 돌아가셨는데 아래 손주 대에 손주가 목병을 앓는단 말입니다. 어떻게 됐겠습니까? 그게 왜 그러냐? 아까 얘기했죠? 차원이 깡통이라면 깡통끼리 모여서 살기 때문에 그 가정에 모인 인연들이 전부 깡통이란 말입니다. 인연 따라 만나서 보는 사람도 고고 당하는 사람도 고입니다. 그러니까 고가 있다 없다, 윤회가 있다 없다 이걸 떠나서 우리는 마음먹기에 달린 것입니다. 팔자 운명도 없을 것이고 유전성도 없을 게 아닙니까. 그건 왜? 자재할 수 있으니까요.
이 세상을 한번 보세요. 우리가 거기까지 생각지도 않고 있지마는 팔만대장경 법구경이 다 어디 있나. 이 세상 돌아가는 게 바로 삼각원형을 이루고 돌아가는데, 우리는 어떻게 이렇게 돌아가고 있는가. 다양하게 색색 가지로 이렇게 천차만별로 돌아가는 이 자체가 바로 법구경 아닙니까? 그 법구경을 누가 이루고 다니나요? 자기가 바로 마음을 내서 이 생명과 육신이 움죽거리고 돌아가니까 삼각원형을 이루고 돌아가는데 우주의 섭리도 다른 혹성도 은하계도 모든 게 삼각원형을 이루고 돌아가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 자체가 바로 샛별이며, 샛별을 보고 깨달았다고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내 마음의 샛별을 말하는 것입니다. 별성도 옷을 입고 있어요. 별성이 옷을 입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별을 볼 수가 있는 거지 옷을 입고 있지 않다면 우리가 별을 볼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 별성도 옷을 입고 있기 때문에 옷에 의해서 반사가 돼서 마음으로부터 생명으로부터 반사를 이루고 또 그 보이는 모습으로 인해서 물에도 비치는 겁니다.
우리도 마음의 근본인 자기의 영원한 생명이 있기 때문에 마음을 낼 수가 있고, 낼 수 있기 때문에 육신이 움죽거릴 수가 있고 또는 상대방에게 내 마음을 전달할 수도 있고, 지혜로운 마음을 비춰 줄 수도 있고, 스스로서 보이지 않는 데 서로가 서로에 상응할 수 있고, 무수한 천차만별로 돼 있는 보이지 않는 생명들에게 서로 상응할 수 있고, 보이는 마음들하고도 같이 상응할 수도 있고, 모습하고도 같이 모이면서 헤어지고 헤어지면서 모이는 이러한 진리를 우리가 세세히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세상 돌아가는 이 이치가 얼마나 무궁무진한지 하나하나가 만약에 지혜로운 마음이 없고 자기 깨달은 바가 없다면 모든 것이 겉돌아가고 항상 걸리고, 이것도 걸리고 저것도 걸리고 그럴 겁니다.
저런 날아다니는 새들은 내일 일이 어떻게 될지를 알고, 옥수수밭의 옥수수도 내일 어떻게 될지 내년이 어떻게 될지도 알고 있거늘, 우리는 인간으로서 어찌 내일 일을 모르고 모레 일을 모르고 어저께 일을 몰라서 눈이 캄캄하고 귀가 먹고 어떻게 할 줄을 모르고 전생이 뭔지 후생이 뭔지, 어디서 왔는지 어디로 가는지 그거조차도 몰라서야 어찌 부처님 제자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부처님 제자라고 하기 이전에 인간이라고 어떻게 할 수 있겠느냐 말입니다.
그러니 이 세상을 가만히 살펴보십시오. 믿는 것은 오직 자기의 깊숙한 마음, 그 주인공뿐입니다. 깊숙이 주인공을 진실로 믿으면서 ‘세상이 이렇게 천차만별로 돌아가는구나. 이렇게 천차만별로 돌아가니 어떤 거 할 때 나라고 할 수 있겠나. 그러니 바로 주인공, 내 주인공이 제일이지. 모든 그 마음이 공했을 때에 공생의 그 능력이 나에게 공심으로 돌아와서 공행을 하게 될 때에 여러분은 여러분대로 바로 그 액을 공식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어떠한 물질적인 약만 있는 게 아니라 물질이 없는 액 자체의, 그 에너지 자체의 약이 있습니다. 무의 세계에서 공식하는 거, 유의 세계에서 공식하는 것이 둘이 아니라는 얘깁니다. 무의 세계에서도 물질이 보이지 않는 무체액, 그 자체가 바로 공해서 공식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마음을 넓게 쓰시고 항상 주인공에서 나온 거, 공에서 나온 거 공에다가 놔야 되겠다 하는 믿음을, 물러서지 않는 믿음을 가지고 진짜로 진실하게 깊숙하게 믿어 보세요. 싸움할 것도 없고, 괴로울 것도 없고, 굶었다고 배고플 것도 없고 내가 발버둥 치지 않아도 바로 스스로서 가져오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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