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서 마음 도리 알아야 한다는데 > 길을 묻는 이에게

길을 묻는 이에게


길을 묻는 이에게는
큰스님 법문 중에서 발췌하여 답을 올립니다.

건전한 게시판 문화를 위하여 성격에 맞지 않는 게시물, 광고 등 유해성 글들은 관리자가 임의로 이동, 삭제할 수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 질문을 올리기 전에, 게시된 글들을 참고하시면 많은 도움이 됩니다.

살아서 마음 도리 알아야 한다는데

본문

질문

스님께서는 살아서 이 도리를 알아야 한다고 하시는데 이 마음 도리를 모르고 몸을 벗으면 어떻게 되는지요.

댓글목록

큰스님 말씀

본원관리자님의 댓글

본원관리자 작성일

항상 여러분한테 생활이 공부라고 했습니다. 생활이 교재라고 했습니다. ‘불(佛)’이라는 것은 생명의 근본을 말하고 ‘교(敎)’라는 것은 생활, 삶이라고 그랬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항상 공부하는 이유가 어딨느냐. 사람이 살면서 내 주인공의 줄을…, 이건 근본이기 때문에 움죽거리진 않습니다. 움죽거리지 않는 근본의 줄을 잡고 그 언덕을 넘어서야 된다는 얘기죠. 즉 말하자면, 천야만야한 산을 타는데 줄이 없으면 올라갈 수가 없죠.

본래 우리들은 제각기 줄이 있습니다. 그 줄은 누구나가 다 가지고 있습니다. 어려웁게 살든 못났든 잘났든 가난하든 이걸 떠나서 다, 하다못해 물에서 노는 고기들도 생명이 있기 때문에 불성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어느 거 하나 빼놓지 않고 불성은 있으니 불교라고 했죠. 사람들이 살고 죽고 하는 게 그냥 불교예요.
 
그런데 말입니다, 우리가 이런 공부를 할 때에 내가 공했다는 걸 알아야죠. 내 전체 몸속에 있는 생명들도 다 공해서 한 개체로 산다고 그랬죠. 그런데 그 살고 있는 한 개체가 ‘나’가 없다면 상대가 전부 없어요, 나만 없다면. 그래서 ‘나의 나무는 나의 뿌리를 믿어야 된다’는 것이 바로 그 줄타기할 때 줄을 잡고 올라가는 것과 같아요.

그런데 그 줄을 잡게 하지 않고, 잡는 것도 모르고 그냥 부처님만 찾든지, 모든 것을 잘하라는 둥 믿으라는 둥 이렇게만 자꾸 나간다면 자기는 그 언덕 위의 맛을 못 보고 항상 심부름꾼 노릇만 해야 되겠죠. 자기 부처를 자기가 찾지 못하고 그냥 심부름꾼 노릇만 하는 거죠. 그러니까 내가 그렇게 살면서 공한 줄 알고, 내가 공해서 없다는 것도 알아야 하죠.

왜냐? 생명들과 더불어 같이 살기 때문에 어떤 거를 했을 때에 내가 했다고 할 수 없으니 공했다는 얘기죠. 모두가 그래서 부처란 얘기죠. 어떤 거를 했을 때 내가 했다고 할 수 없으리만큼 많은 생명들이 더불어 같이 살기 때문이죠. 이해가 되시겠죠?
 
그런데 그렇게 공부를 하고 가면 내 몸뚱이가 살아 있어도 체가 없는데, 내 것이 없는데, 세울 게 없는데, 또 본래 있으므로 찾을 게 없는데, 체가 없는 나가 물에 빠질 리가 있겠습니까? 이런 뜻을 알고 간다면요, 죽을 리가 없죠. 불에 들어가도 뜨거워서 타 죽을 일 없죠. 지옥고에 빠진다 하더라도 둘이 아닌 까닭에 오히려 건지죠.

이러한 거를 살아생전에 다 알아야 돌아가셔도 제 길을 자유대로 찾을 수가 있죠. 태어나려면 태어나고, 아니면 그냥 보살로서 행해 나갈 수도 있고, 상세계의 부처님 도량에, 한도량에 한마음으로써 진행할 수도 있고, 지금 시쳇말로 말입니다. 그리고 오히려 남이 보지 못하는 거를 보고 듣고 행하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을 다 건질 수 있는 능력이 자동적으로 주어지죠. 그것은 전체 한울, 한도량에서 인가를 받는다, 또는 그런 원력이 그대로 주어진다, 지위가 그냥 주어진다 이런 뜻입니다.
 
그런데 이 도리를 모르고 돌아가신다면 외려 지옥고에 들어갈 수가 없죠, 무서워서. 환상을 보면 전부 그냥 무서우니까요. 자기가 체가 없는 줄도 모르고 관습, 욕심, 착, 이런 거를 두기 때문에 여기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지옥고도 들를 수가 없는 거죠. 그 지옥고에서 고통받는 중생들이 자기를 해칠까 봐 무서워서 그러는 거거든요.

첫 단계에 지옥고를 건너지 못하면 두 번째 단계에는 빠져 죽을까 봐 강을 못 건넌다 이겁니다. 세 번째 가서는, 지금 이 허공에 에너지가 있다는 사실을 볼 때에 그 불은 뜨겁지 않은 불이란 말입니다. 그런데도 자기가 체가 없는 거를 생각지 못하고 지금 현재에 사는 의식을 가지고 있단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의식이 발동하면 뜨거운 불기둥을 넘어가질 못하거든요. 우리가 ‘저 언덕’이라고 그랬죠? ‘피안의 언덕’ 이래도 되구요. 그런데 저 언덕이 따로 있는 게 아니에요. 여러분이 ‘아, 이건 참 모르겠다. 이건 우리가 못 하지. 여기서는 정말 물질세계에서 정신세계로 넘어갈 수가 없다.’ 하면서 이렇게 모른다고 하는 그 자체가 도예요. 모르는 게 도라니까요. 

그래서 저 언덕이 나를 떠나서 있는 게 아니라, 나에게 저 언덕도 있고 이 언덕도 있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오직 일거수일투족 그 줄을 잡고 간다. 옆에서 아무리 별소릴 다 해도 그냥 둘이 아니게 그대로, 진리대로 붙들고 간다. 거기서 에너지를 배출하는 거니까, 어떠한 것으로 화해서 바꿔져 돌아가든지 일거수일투족 다 거기서 나오는 거니까, 다 이 줄이 말해 주는구나.’ 하곤 그냥 좇아가야죠. 그런데 그거를 좇아가지 못한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우리가 지금 이렇게 살아서 알아야지 죽은 뒤에 알 수는 없는 겁니다. 살아서는 부딪치니까 부딪치는 아픔을 알고, 슬기로운 지혜를 알고, 모든 걸 그렇게 알아서 하지만 죽으면 더하고 덜함도 없어요, 체가 없기 때문에. 경험을 살리고 물리가 터지도록 할 수 있는 체가 없단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살아서 내 마음이 ‘아, 이젠 가도 넉넉하겠구나. 이젠 내 몸이 옷을 벗어도 괜찮겠구나.’ 할 때는 ‘옷을 벗으면 뭐를 할까?’ 하는 생각이 없어도 자기가 하는 대로 그냥 자동적으로 차원이 주어지고 지위가 주어져요. 그래서 벗고 가려면 벗고 가고, 조금 더 있으려면 더 있고, 그렇게 돼야 그래도 사람의 삶이 그저 허탕하지만은 않지 않겠습니까? 허망하고 허탕하고 이런 기가 없을 거 아닙니까? 

그러니 우리가 지금 살아서 그 뜻을 모른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뭐, 뒤에서 철퇴가 들어오니 알겠습니까, 방망이가 들어오니 알겠습니까? 또 인연으로 인해서 원수가 나를 치러 들어와도 모르구요. 길을 가고 오다가 무명 영가들이 들이덤벼도 알 수 있나. 인간 하나가 사는 데에 그렇게…, 우연히도 없고 철두철미하게 자기가 생각하고 행동하고 말하는 대로 그 업이 자기한테 찰나찰나 오죠. 그런데 그것을 모두 그 안에서 타파할 수 있기 때문에 거기에다 하라고 그러는 겁니다.

목록

대한불교조계종 한마음선원(13908) 경기 안양시 만안구 경수대로 1282Tel. 031-470-3100Fax. 031-470-3116
Copyright (c) 2021 HANMAUM SEONWON. All Rights Reserved.
"이 제작물은 아모레퍼시픽의 아리따글꼴을 사용하여 디자인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