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단계의 공부 과정 > 길을 묻는 이에게

길을 묻는 이에게


길을 묻는 이에게는
큰스님 법문 중에서 발췌하여 답을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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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단계의 공부 과정

본문

질문

타 사찰에서 참선을 하다가 우연히 대행 스님의 법문을 접하면서 관하는 도리에 대해서 알게 되었는데요, 대행 스님의 세 단계의 공부 과정에 대해서 좀 더 자세히 알고 싶습니다. 그리고 증명관은 어떻게 하는 것인지요.

댓글목록

큰스님 말씀

본원관리자님의 댓글

본원관리자 작성일

지금 시쳇말로 공부하는 과정을 시로 한마디 읊겠습니다.

내가 죽은
이름 없는 이름이여

나와 남이 두루 같이 죽은
이름 없는 이름이여

나와 남이 같이 두루 나투는
이름 없는 이름이여

해산봉은 화산 터져 두루불이 진동하여
이름 없는 이름이
그대로 여여하더라

이것은 누가 가르쳐 줘서 하는 말도 아니요, 누가 지어서 하는 말도 아닙니다. 우리 스스로 이 세상을 두루 살피고 또 살핌 없이, 자기가 스스로 한 티끌만도 못하고 깨알쪽만도 못한데…, 다 실은 뜻입니다.

지금 읊은 그것은 우리가 제일 첫 번에, 들고 나는 모든 것을 주인공에 놔라. 맡겨 놔라. 이래서 내 마음이 편안해질 때 결국은 그때에 진짜 관해야 됩니다. 편안해졌을 때 ‘주인공! 당신이 있다면 대답해 봐!’, ‘당신은 무엇인가.’ 하는 것을 관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왜 이렇게 하느냐. 사람은 가만히 앉아서 좌선을 하고, 편안해졌다고 해서 가만히 있으면, 편안한 것이 공부라면 이것은 영 발전이 없습니다. 좌선을 해서 편안하다고 해서 그것을 그냥 묵인하고 ‘이만하면 족한 것을….’ 한다면 그걸로써 족하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또 공에 빠지기도 하고요. 그다음에 내 마음을 발견했을 때, 내 대답을 내가 들었을 때, 그때는 앞서의 그 습을 다 놨기 때문에 미비한 점이 없어요. 그래서 일 단계는 다 놔야 된다 이겁니다. 그다음에 편안해지면 나를 발견해야 한다.

그다음에 발견해 가지고 진짜 공부를 하는 겁니다. 그때는 다시 체험하고 실험을 통해서 생활에 조금도 걸림 없이 하나서부터 열까지 다시 보임을 하면서 다시 굴리면서, 안으로만이…, 네 탓이니 내 탓이니 하고 남 볼 겨를이 없습니다. 아니, 볼 겨를이 없는 게 아니라 남의 잘못, 잘된 것을 말할 사이가 없다 이겁니다. 그러면 “그건 바보가 아니냐?” 이러겠지만, 그래서 아까 얘기한 겁니다. “나와 남이 더불어 같이 죽은 이름 없는 이름이여.” 했습니다. ‘두루 같이’입니다.

가정이나 사회에서나 모든 게 두루, “두루 같이 죽은 이름이여.” 했습니다. 더불어 둘이 아님을 알면서 체험하면서, 남한테 잘못했다 잘했다 말할 수 있는 겨를이 없이 안으로 굴려서 안에다 놓고 말을 하면서, 안에다 놓으면서 말을 했어도 말을 한 사이 없이 해야 합니다. 그럼 스스로 그렇게 됩니다. 나를 발견하게 되면 스스로 그렇게 됩니다. 발견했어도 만약에 그 습이 앞을 가린다면 자꾸 내가 잘났다고 하게 됩니다. ‘내가 제일이다.’, ‘나는 깨달았다.’  이렇게 나옵니다. 그런다면 그 ‘깨달았다’는 거기에서 그만 더 진전을 못 하고, 더 계발을 못 하고, 두루 물리가 터지지 못한 채 그냥 멈춰 버리고 말고 미해집니다.

해산을 해서 어린애를 낳았는데 갓 태어난 아이가 자라지 않고 어떻게 어른 노릇을 하겠습니까? 그와 마찬가지로 육조 스님이 십육 년 동안을 그렇게, 깨달아서 바리때를 이어받아 가지고도 그만큼 노력을 했다는 걸 아셔야 합니다. 달마 대사 역시 면벽을 했고요. 깨달았어도 그렇게 했다는 얘깁니다. 그것은 같이 두루 나투는 방법을, 둘이 아니게 할 수 있는 그것을 아주 정열적으로 확고히 알려고 했던 거죠.

생활이 불법이자 진리이자 과학이기도 합니다. 안에서 생각했으면 반드시 바깥으로 나오니깐요. 여러분은 생활 속에서 그렇게 살아 보시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깨달아 가지고도 내가 ‘나’라는 게 없는 공부가 바로 진짜입니다. 자기가 자기 스승을 따라가면서 자기가 배우는 거죠. 자기는 시자로서, 공부하는 사람으로서, 공부 가르치는 자기로서, 자기는 공부를 가르치고 또 배워야 합니다. 자기는 놔야 하고 자기는 바로 항복을 받아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공부하는 데는 역시 각오가 튼튼해야만 합니다. 앞서 그 “같이 나투고 두루불이, 이름 없는 이름이여.” 했습니다. 그런 것은 여러분이 스스로 공부를 하게 되면 스스로 깨닫게 됩니다. 돈오나 점수나 물 흐르는 데 붙지 않듯이 다 아시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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