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켜본다'는 게 무슨 뜻인지요? > 길을 묻는 이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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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스님 법문 중에서 발췌하여 답을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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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켜본다'는 게 무슨 뜻인지요?

본문

질문

큰스님, 안녕하신지요. 늘 그렇지만 오늘은 여러 가지로 마음이 힘들었습니다. 저의 큰 고민은 제 피부가 매우 안 좋다는 것입니다. 너무 답답한 나머지 예전에도 한번 큰스님께 여쭤본 적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제 믿음이 부족한 탓으로 큰스님의 가르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제자리에서만 맴도는 것 같습니다. 이로 인해 답답한 마음과 함께 여러 가지 상념들이 생겼습니다. 내가 누구인지 의문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마음이 무엇인지. 오래전부터 가져왔던 이런 의문들이 떠올랐으나 지금도 그 답에는 조금의 진전도 없는 것 같아 갑갑하고 슬퍼졌습니다. 한편으로는 주변의 힘든 사람들을 보고 `피부 문제는 별 것 아니야, 마음이 중요해’라고 스스로 위안도 삼지만 다른 사람의 불행을 통해 나를 위로하는 자신의 모습이 좋게 느껴지지만은 않습니다. 마음이 일어나는 것과 그것이 나오는 자리를 지켜보라는 가르침을 책을 통해 읽었는데 어디를 보아야 하는지, 지켜본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모르고 있습니다. 큰스님께서 늘 가르침을 베푸신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답답한 마음에 이렇게 또 큰스님의 마음을 청합니다.  

댓글목록

큰스님 말씀

관리자님의 댓글

관리자 작성일

모든 걸 주인공에 일임을 시키고 주인공이 모든 걸 하고 있다는 것을 ‘이 그림자로서 내 생리적인 작용을 시키고 있구나’이렇게 지켜보고만 나가세요. 계획을 세운다 뭘 어쩐다, 이러는 것도 다 주인공이 바로 하고 있는 것을, 나는 지금 현재의식으로서 지켜만 보고 나가세요. 자기가 해 놓고 자기가 지켜보고 나가란 말이에요, 누가 하는가.

수없이 이렇게 일러주고 그러다가 보니깐 많은 사람들이 수확을 거두고, 거둔 사이 없이 거두고 나가지만 하여튼 그렇게 자기 주인공을 믿고 나가지 않으면 그런 생각이 돌아가질 않아요. 당신도 지금 당신 주인공을 믿지 못하기 때문에 그런 생각이 툭툭 튀어나오는 거예요. 당신 주인공이 바로 화두예요. 당신 주인공이 그대로 근본이고 그대로 당신이에요. 그러니까 당신을 믿어야지. 그리고 당신은 또 당신이 하는 걸 지켜봐요. 무슨 생활을 하지 말랬나, 사랑을 하지 말랬나, 계획을 세우질 말랬나, 돈을 쓰질 말랬나. 그렇게 다 하면서도 그것이 어디서 하고 있나? 이걸 지켜보란 말예요. 하나에서부터 열까지 어디에서 나옵니까? 그게 다. 한군데서 나옵니다.

그래서 자기 주인공에 모든 것을 일임하고 자기가 하나하나 생각하는 거, 행동하는 것을 지켜보면서, 자기 한 생에 희생적인 인내와 그 도리를 다 하고 지켜보는 사람이 돼야 됩니다. 그럼으로써 자기 주인공과 즉 말하자면 생각나기 이전을 부(父)로 생각하고 생각을 할 수 있는 자기는 자(子)로 생각해서, 체가 없는 부와 자는 둘이 아니어서 상응하면서 협조하고 서로가 하나가 될 때, 때로는 생각이 아버지가 되고 때로는 생각이 자식이 될 때, 한번 생활하면서들 지켜봤어요? 글쎄 한마음이 말입니다. 때로는 아들의 마음이 되고 때로는 아버지의 마음이 되는 것을 어떻게 생각해요? 생각은 체가 없고 붙들 수도 없고 빛깔도 없기 때문에 항상 아버지가 됐다가, 아들이 됐다가, 동생이 됐다가, 형이 됐다가, 친구가 됐다가 이렇게 화해서 돌아가고 있는 이 나툼을 어떻게 지켜보고 있느냐 이 소립니다. 그런데 어찌 한마음이 아니겠소. 우리가 생각나기 이전을 찾아라 찾아라 하기 이전에, 찾을 것도 없는 그대로를 우리가 살아나가면서 지켜 볼 수 있다면 그대로 알 수 있다는 말입니다.

무슨 부처님이 어디 타의에서 떨어지는 줄 알고 타의에서 구하려고 애를 쓰고, 이름을 보고 찾으려고 애를 쓰고, 말을 듣고 마음이 방황하고 이런 것이 아닙니다. 부처님께선 그걸 가르친 게 아닙니다. 그래서 나는 어쩔 수가 없이, 모두 전자에서부터 관세음보살 지장보살 신중당 칠성각 이렇게 여러 가지를 해 놓고, 사람의 인체는 하나고 마음도 하나인데 수없이 만들어 놓고 거기에 집착하고 그렇게 타의에서 찾는, 그런 집착성을 떼어버리기 위해서 방편으로 주인공이니 심주니 했던 거예요. 안으로 자기가 지켜보게 하기 위해서.

타의에서 구하는 것은 잘못 들어가는 길이에요. 부처님은 그렇게 가르치지 않았어요. 예수님도 역시 그렇게 가르치질 않았어요. “나의 신을 믿으라. 타의의 신을 믿으면 절대로 용납하지 않느니라.”라고 한 예수님의 말. 그래서 자신(自神)을 찾으라고 한 겁니다. 자신(自神)이 하는 것이니 ‘자(子)는 지켜보라, 부(父)가 하는 것을 지켜보라. 자와 부가 둘이 아니게끔 서로 상응하면서 이렇게도 되고 저렇게도 되면서 이렇게도 나투고 저렇게도 나투면서 지금 걸어가는 그 길을 지켜보라’이런 말이죠. 그 무겁게 짐진 모든 걸 놔 버려라. 네 마음으로 짐을 지워놓고 무겁게 왜 짊어지고 다니느냐? 부처님께서는 그러지 않았나요? “모든 것을 놔버리고 쉬어라. 그대로 돌아가면서 여여하니라.”이런 말 뜻을 우리가 새겨서 거름으로 알고 주춧돌로 알고 기둥으로 알고 그것을 참고하면서, 자기 자신이 한걸음 한걸음 걸어가면서 생활하는 것을 지켜본다면 바로 이 생활이 종교요, 종교가 생활이라는 그 뜻을 알 수 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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