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부활과 부처의 불생불멸의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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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저는 불교에 대해서 많이 알고 있진 않지만 앞으로 많이 알고 싶고 또 바른 법을 깨닫고 싶은 사람 중에 한 사람입니다. 우연히 인터넷 사이트를 읽다가 스님을 알게 되었는데요, 조심스럽게 몇 자 질문 올립니다. 조상님 천도하러 절에 갔다가 염주와 <금강경>을 그 절 스님께 받고 나서 저 혼자 <금강경>을 읽다가 문득 눈물이 났습니다. 그 순간 스쳐지나간 생각 중에서 부처님께서는 바로 이 세상 우주 만물 전체가 부처님이 아니실까, 바로 내 마음 안에서 스스로 눈물로써 말씀하고 계신 분이 아니실까 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다른 사람의 눈을 통해서 저를 보고 있을 때도 계시고, 앉으나 서나 누우나 동굴 속에 숨어있어도, 또 우주선을 타고 달나라에 가도 다 아시는 그런 분이 아니실까 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제 마음속에 있는 원래의 양심이 부처님이신지,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중에도 제 눈을 통해서 주인공은 이 글을 보고 있는지, 보고 있다면 그 주인공이 부처님이신지, 아니면 그냥 제 자신인지 궁금합니다. 그리고 한 가지 질문을 더 드리고 싶은데요. 어느 스님께서 말씀하신 법문 중에 부처님께서는 불생불멸을 깨달으셨다고 하셨는데요. 문득 예수님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장사한 후 4일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셔서 기적을 행하셨다는 성경 기록이 있는데요.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불생불멸과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다시 살아나신 모습은 어떻게 생각해 보면 공통점이 있는 것 같아서요. 스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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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스님 말씀
여러분이 법당에 와서 부처님을 보고 절하실 때 어떠한 생각으로 절을 하시는가요? 저 형상은 내 몸 형상과 둘이 아니라고 항상 말씀드리죠. 마음도 그 생명도 둘이 아니요, 또 움죽거리지 않는 걸로 보이지만 작은 물건 하나도 역력히 이 세상에 이름을 가지고 나왔습니다. 각기 이름을 가지고 이 세상에 출현한 겁니다. 부처님도 이 세상에 부처님이라고 이름을 가지고 출현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이 바로 그 생각으로서의 마음이 없다면 부처님을 모실 수가 없습니다. 부처님은 너무 가깝게 계시기 때문에 법당에 들어와도 바로 둘이 아니요, 변소에 가도 둘이 아니요, 자기가 있기 때문에 그 자리에 계신 겁니다. 우리는 부처님을 그렇게 가깝게 두고, 윗 속눈썹 아랫 속눈썹이 깜짝거릴 때 한 찰나에 깜짝거리듯이 부처와 중생은 둘이 아니게 그렇게 같이 회전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셔야 될 겁니다.
삼천 년 전의 부처님이 계시다고 생각 마시고 삼천 년 전만 아니라 몇 천년 전, 몇 만 년 전에도 부처님은 계셨고, 지금도 부처님은 계시고, 미래에도 부처님은 영원히 끝간데 없이 계실 겁니다. 여러분이 이렇게 살아 있는 한, 생명이 살아 있는 한, 또 생명이 이렇게 푸르르게 생동 있게 움죽거리는 한 아마도 그 뜻은 떠나지 않을 겁니다. 말세니 말세가 아니니 운운하지마는 그것을 떠나서 우린 영원히 이렇게 물 흐르듯이, 발 없는 발로 손 없는 손으로, 어디 안 닿는 데가 없고 아니 딛는 데가 없이 내 몸 아닌 게 없이 이렇게 하고 계신 겁니다.
그러니 부처님의 몸이 없어졌다 하더라도 그건 옷 벗은 거와 같아서, 여러분이 살고 있는 한, 생명이 살고 있는 한 부처님은 돌아가신 게 아닙니다. 수없이 나투고 수없이 그렇게 해서 내 아님이 하나도 없는데 어찌 가셨다는 말을 하겠습니까? 그래서 열반이라고 했던 겁니다.
그렇지만 살아서 열반을 해야지 죽어서 열반은 못합니다. 살아서 우리가 마음을 발견해야지 죽어서 무슨 발견할 게 있습니까? 더하고 덜함도 없는데. 기독교 교리로 말할 것 같으면, 살아서 부활해야지 죽어서 무슨 부활을 합니까? 살아서 모르는 자가 죽는다고 알까요? 부처님께서는 살아서 부활을 하셨고 살아서 열반을 하셨기 때문에, 바로 그것은 영에 머무른 게 아니라 나툼을 말씀하셨습니다. 살아있는 걸 말씀하셨다 이 소립니다.
그래서 여러분도 그 도리만 알면, 참 자기란 어떠한 걸 내세울 게 없는 것이 자기이기 때문에, 나툼이 되기 때문에, 하루에도 몇 번 씩 딴 생각을 하고 딴 생각하고 돌아가는 이 나툼에 의해서, 행도 여러 가지 하기 때문에 이게 윤회가 아니라 나툼이라는 걸 아셔야 합니다.
그리고 또,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실 때 한 발을 내미신 것도 기독교교리로 말하면 부활이라고 얘기할 수도 있죠. 나는 본래 살아 있질 않았기 때문에 죽을 것이 없으니 살았다 죽었다 말하지 말라 하는 소리인 것이죠. 그러니까 그걸 말로 한 게 아니라 그냥 실질적으로 보여주신 게 아닙니까? 발이라는 건 길이란 말입니다.
그리고 그냥 끊어진 게 아닙니다. 끊어진 게 아니기 때문에 발을 내민 겁니다. 왜? 길은 끊어진 게 없다는 거죠. 이건 무한의 길을 말하는 겁니다. 발이라는 건 걷고 다니기 때문에 무한의 길을, 영원한 길을 말하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으로써 발로 나툼이 있었단 얘기예요. 그러면 그것을 납득하지 못하고 경험해 보지 못한 사람들은 그대로 ‘아, 저건 죽지 않았다는 증거다.’ 이렇게만 알고 있지 그 무한의 길을 걷고 있다는 건 상상도 못할 거예요.
그러니 이 도리를 아시려면 꼭 자기부터 발견을 해야만이 성립이 되는 겁니다. 자기부터 알아야만이 예수님이 부활하신 그 도리도 알고…, 그냥 말로만 아는 게 아닙니다. 부처님께서는 탄생해서 살아 생전에 천차만별로 부활이 됐으니까요. 부처님께서는 죽어서 부활을 한 게 아닙니다. 살아 생전에 부활을 해서 천백 억 화신으로 나투었으니까요. 그러니까 그 나투는 자체를 알아야, 예수님이 그렇게 부활하셨다는 그 자체를 알아야 생전에 부활했느니 뭐니, 내 거니 네 거니 하고 싸우질 않죠.
그러니까 무조건 나부터 발견하는 작업을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기독교에서도 교회에 가면 예수님의 형상과 내 형상이 둘이 아니요, 예수님의 마음과 내 마음이 둘이 아니요, 그 생명과 내 생명이 둘이 아니요, 삼합이 한데 합해서 한마음이다. 한마음 주처를 바로 내가 가지고 있다. 그러니깐 내가 믿고 모든 거를 주처에다가 놓는 것이 바로 예수이자 나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거기다가 모든 걸 바로 맡겨 놓고 거기서만이 나를 이끌어 줄 수 있다고 아예 결사적으로 작업을 들어가야 합니다. 이거는 어느 종교를 막론하고 말입니다, 필연적으로 해야 하는 도리라고 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계시는 한, 여러분이 계시기 때문에 바로 부처님도 계시고 예수님도 계신 겁니다. 그러니 기독교의 부활절도 초초마다 부활절이요, 초파일도 일 초 일 초 바로 부처님이 탄생하신 날입니다. 이 도리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공해서 찰나찰나 돌아가는데, 찰나찰나 돌아가면서 생각이 나고 그러니 생각을 일으킬 때마다 바로 부활이고, 그게 바로 부처님 오신 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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