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서나 이해의 기준 있습니까?
본문
질문
사람이 싫다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또 사람이 나쁘다는 것은 과연 어느 만큼 용납이 될 수 있을 까요? 인간이 인간을 용서하는 기준이 있다면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어떤 사람의 비상식적인 행동이 저를 많이 힘들게 합니다. 그 사람의 마음이 뻔히 보이기에 더욱 괴롭습니다. 차라리 마주치지 않았으면 좋으련만 부딪치고 나면 나름대로 안정되었던 마음이 다시 미움으로 찹니다. 아직도 멀었다 생각하면서 무시해도 마음이 쓰이기는 별반 다를 것이 없습니다. 이것도 내 업보다 라고 하면서 내내 다스려 보려 하지만, 이내 가슴이 답답해 집니다. 용서나 이해 이런 것에도 기준이 있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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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스님 말씀
우리가 생활 속에서 모든 일을 할 때, 자기 몸뚱이가 하는 게 아니라 자기 주인공이 하는 겁니다. 그러기 때문에 어떠한 거든지 자기 내면의 주인공이 하지 않는게 하나도 없어요. 그거와 같이 지금 차가 놓여 있는데 모든 차들은 운전수가 하지, 이 차가 운전수를 몰고 다니는 법은 없어요. 그와 똑같습니다. 이 몸뚱이를 끌고 다니는 주인공이, 자기 몸뚱이를 끌고 다닌다면 운전수가 차 끌고 다니는 거와 같기 때문에, 그 차가 고장이 나면 운전수가 고쳐서 끌고 다닙니다. 딴 사람이 해주지 않습니다. 꼭 운전수가 차 고치는 데를 가든지 손수 고치든지 그렇게 해서 끌고 다닙니다.
그와 같이 내 몸뚱이를 내가 끌고 다니는 거와 같은데, 그 주인공이란 수억겁 광년으로부터 진화되면서 끌고 온 장본인입니다. 운전수가 지금 현재만 운전수가 아니라, 과거도 운전수였고 지금 현재도 운전수고 미래도 운전수요 영원히 변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 운전수를 믿고 일을 하면서도 어떠한 생각이 나면은 거기다가 맡겨, 일하면서 불화증이 일어나도 ‘그것도 당신 밖에 해결할 수 없어’ 하고 거기 놓고, ‘해 주세요’ 가 아닙니다. ‘할 수 있다’지. 앉아서도 여유가 있으면-앉아서도 생각나면-거기다 놓고, 물통을 가지고 가면서도 거기다 놓고, 일상 생활에 어느 시간을 정해 놓지 않고 시시때때로 나오는대로, 용도에 따라서 닥치는대로 거기다 놓고 거기서만이 이끌어주고, 거기서만이 해결해 주고, 거기서만이 낫게 해주고, 거기서만이 화목하게 한다고 생각을 하셔야 합니다. 사실이 그러니까요. 그 생각이라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그리고 또 이런 거 보셨죠. 큰 얼음덩어리가 있는데 끓는 물 한 바가지를 갖다 부어 보십시요. 잠깐 그 거죽만 녹는듯 했다가 다시 끓는 물 한 바가지 부은 것이 되얼어서 같이 두더기가 돼 버려. 안 그럴까요? 그러니까 모든 것을 몰록그냥 놔버리면, 봄이 오면 끓는 물 한 바가지 떠가지고 다니지 않아도 그 딴딴한 얼음은 스스로 녹을 거라 이겁니다. 그래서 금방 속상하고 힘들어도 주인공에 넣어 한번 돌려 놔라 이거예요. 그러면 찔러 죽이리만큼 속이 상한다 할지라도 그것이 스르르르 봄이 와서 얼음장같은 그 딴딴한 마음이 다 녹아 버리는 겁니다. 이걸 말로만 듣고 가서 ‘그냥 그러더라’ 이렇게 이해만 하고 돌아가지 말고 실천에 옮겨보시라 이겁니다.
내가 실천을 한번 한번 해 본다면, 벌써 스스로서 알게 되고 절대로 부처님은 거짓말을 안한다는 걸 실감하실 거다 이겁니다. 그렇게 해 감으로써 내 안의 주인공에 대한 믿음이 조금씩 조금씩 생겨나서 일상 생활속에서 다가오는 모든 문제를 주인공에 믿고 맡겨 놓을 수 있을 때, 이제는 어떤 어려운 일이 발생하더라도 모든 것이 주인공 안에서 나를 공부시켜서 반석에 올려 놓기 위해서 이끌어 주는 것임을 알게 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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