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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식(共食)에 대하여...

본문

질문

스님께서 자주 공생(共生) 공심(共心) 공용(共用) 공체(共體) 공식(共食)에 대해서 말씀을 해 주시는데 공식하라고 하시는 말씀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몰라서 질문드립니다. 그냥 내 앞에 닥치는 것 마다하지 말고 하나로 모아서 먹으라는 말씀이신지, 아니면 더 높은 차원의 깊은 뜻이 있으신 것인지 가르침 주십시오. 

댓글목록

큰스님 말씀

관리자님의 댓글

관리자 작성일

여러분이 각자 자기 몸 하나를 생각한다 하더라도 공생으로 공식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이치는 다 아시리라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오장육부 세포 하나 하나에도 다 생명들이 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내 몸 하나를 봐도 공생으로 살고 공용으로 일체를 하고, 공식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고, 외부의모두를 봐도 전부 공생으로 공식을 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영을 수만 수십만 개를 한데 합쳐도 영은 영이거든요.



그런데 거기에 달라붙는 게 뭐냐하면 바로 마음입니다. ‘마음은 없는 게 마음이다.’ 한 것은 마음을 마음이라고 이름할 수 없다는 얘기입니다. 어떤 마음을 내고 어떤 마음을 쓸 때에 마음을 썼다고 할 수 있습니까? 그거는 사람이 사는 데에서의 이름입니다. 그리고 마음을 자유스럽게 쓰라고, 인간은 자유스럽게 자기 마음대로 마음을 쓰라고 내놓았는데도 모두 자기 마음을 마음대로 쓰지 못하고 모든 것에 걸려서 살고 있습니다. 그러니깐 모두 다 차원에 따라서 마음을 쓰게 되는 거죠. 적으면 적은 대로 쓸 거고 크면 큰 대로 쓸 거고 더 크면 더 큰 대로 쓸 거고, 마음이 바다라면 바다같이 크게 쓸 거고, 그래서 그릇에 따라 크고 작은 대로 그냥 쓰고 살게 마련이거든요. 그러니 어떤 마음을 쓸 때에 진짜 마음이라고 말할 수 있겠느냐는 겁니다. 그러니깐 모두 적은 거나 큰 거나 나쁜 거나 좋은 거나 몽땅 한데 합쳐서 한마음이라고 하는 겁니다. 좋게 나오든지 언짢게 나오든지 다 한마음 속에서 나오는 거니까 모두가 공생을 하면서 공식을 하고 있다는 얘기입니다.



근데 한마음 속에서 일체를 하고 있는 거는 알지만 실천하기는 극히 어렵습니다. 진짜로 알고 한다고 하더라도 삼일이 못 가서 그것은 다 폐지가 돼 버리고 마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데 보살행이라는, 보살이라는 이름을 가진 분들은 날짜를 두지 않고 끝없는 날을 그냥 여여하게 그대로 사는 거죠. 그대로 ‘이것이 이렇게 잘못됐구나, 이걸 잘했구나, 이걸 못했구나’ 하는 게 없이 마음이 그대로 돼 있어요. 마음이 그렇게 돼 있기 때문에 천차만별로, 그대로 뜻으로 마음을 쓰고 살죠.



그러기 때문에 어떠한 문제나 경계가 달려들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둘로 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 생명도 내 생명같이 생각하고 내 생명같이 존중하고, 내 생명 아닌 생명같이 생각하는 겁니다. 내 마음 아닌 진짜 마음, 이게 바로 한마음입니다.



살아있는 것은 모습이 천차만별로 다 다릅니다. 모습이 달라요. 근데 산다는, 생명이라는 건 하루 만에 죽는 거나 며칠 만에 죽는 거나 여든 살에 죽는 거나 백 살에 죽는 거나 생명이라는 자체는 다 똑같습니다. 모습은 다르나 모든 것이 모습이 있다는 점에서 요런 미생물도 다 똑같아요. 또 마음을 천차만별로 쓴다는 것도 다 똑같습니다. 그런데 보고 듣는 게 자기네들 그 통 속에서, 즉 말하자면 자기네들 끼리끼리 살기 때문에 그 습에 젖어서 사람들이 사는 이치를 생각지도 못하는 거죠. 우리가 부처님이나 보살들이 사는 생각을 못하듯이 말입니다.



그러니 모습은 죄 다르지만 마음 씀씀이야 어디 둘이겠느냐는 겁니다. 이게 바로 공체입니다. 요만한 모습도 움죽거리고 산다는 거죠. 공체(共體). 우리가 전부 공체입니다. 소나 돼지 그 어떤 동물들 배를 갈라놓으면은 참 그거 볼 만합디다. 사람도 역시 마찬가지죠. 육신을 잘라서 갈라놓으면 그 육신 속에 있던 생명들도 다 같이 죽게 되죠. 그러니까 공체요 공용이다 이겁니다. 공체이기 때문에 공용(共用)을 한다는 겁니다.



내가 왜 이런 말을 하느냐 하면, 다섯 가지의 문제가 어느 정도 돌아가야 진짜 보살행으로 넘어간단 얘기를 하는 겁니다. 남이 보살이다 보살이 아니다 이러기 이전에 말입니다. 스스로 행동하는 거를 보면 벌써 알아요. 벌써 자기가 마음을 쓰는 대로 행동이 나오는 거니까요. 그리고 그게 공체이기 때문에 공용이다 이겁니다. 공용을 하는 거기 때문에 공식으로 돌아간다, 찰나찰나 환경이 바뀌고 또 환경이 바뀌고, 찰나찰나 바뀌어서 돌아가면서 바뀌는 일들이 그냥 여여하게 바꾸는 대로 바꿔지면서 살아나가고 있는 거예요. 본래 우리가 여여한 생활을 산같이 물같이 여여하게 하고 있는데 마음들이 그렇게 되질 않아서 그걸 인식도 못할 뿐만 아니라 상당히 그걸 어렵게 생각하는 거죠.



이런 말을 정신차려서 듣지 않으신다면 요다음 생에 자기가 훨훨 털고 나설 수가 없어요. 이건 듣고 보는 데 있는 게 아니다라고 하는 그 자체 가운데에 바로 듣고 알 수 있다는 얘기죠. 모습 아닌 모습, 생명 없는 생명, 마음 아닌 마음, 함이 없는 용, 또 함이 없이 모든 것을 할 수 있고 먹는 거 없이 먹을 수 있고, 모든 것이 다 바닷물을 삼킨 거와 같습니다. 그런데 바닷물을 삼켰으면 바닷물을 토해낼 줄을 알아야 하는 그 도리가 원식이라고 할 수 있는 거죠.



그래서 이걸 말로 공식이라고 해도 되죠. 그러면 바닷물을 다 집어먹었을 때에 그 물 속에 별의별 게 다 들어있지 않습니까. 죽는 것만 들어있는 게 아니라 아픈 것도 들어있고 뭐 말로는 형용할 수 없이 다 들어있는 거죠. 천차만별로 살아나가는 그 마음속에 별의별 가정이 다 있고, 그 별의별 가정 속에 사는 사람들의 마음들이 이쪽에는 이런 게 들어있고 저쪽에는 저런 게 들어있는 그 자체가 몽땅 한 바닷물 속에 다 들어있는 거죠. 한 바닷물 속에 들어있는 거를 다 삼킬 수 있어야만 그게 공식이라고 할 수 있어요. 공식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걸 공식이라고 진짜 하려면 그것도 내놓을 수 있어야 된다는 얘기죠. 그 물을 정화시켜서 내놓을 수 있어야 된다 이런 소리죠.



우리가 그냥 듣고 그냥 보고 그냥 만나고 그냥 헤어지고 이러지만 헤어지든지 만나든지 말을 하든지 듣든지 잠을 자든지 깨든지 그것만 생각하고 있으라는 게 아닙니다. 살아나가면서 시시때때로 악한 사람도 만나고 선한 사람도 만나고, 악한 일도 생기고 선한 일도 생기는 데서 둘 아닌 도리를 배우시라는 얘기입니다. 악한 것을 만났을 때 그것을 둘로 보지 않는 그 마음으로서 둘이 아니게끔 관해 놓으면 그것이 스스로서 둘이 아니게 처리가 되는 겁니다. 그것이 행해서 자기가 알고 공부하는 길이거든요.



또 우리가 악한 사람을 만났을 때 악한 문제가 생기게 되면은 그거를 내 탓으로 돌리고 관해 놓으라고 합니다. 그 상대방도 자기이기 때문이죠. 그럼으로써 그것이 성취된다거나 그것이 잘 무마가 된다거나 한다면 그게 바로 경험이자 바로 자기가 걸림 없이 여여하게 걸어가는 길이죠. 이게 모두가 하나서부터 열까지 다 그런 겁니다. 그러니 올해는 더욱 공생으로 살고 공용으로 둘 아니게 실천해 나가면서 공식으로 관하는 걸 거기에 항상 붙여서 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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