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우치지 못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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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스님, 만일 주인공 공부를 하면 주인공을 보기 전까지의 수행은 어떤 공덕이 있는지요? 그리고 수행의 점차와 과정이 마치 사다리처럼 누적이 돼야 어느 날 주인공을 볼 수 있는지요? 스님, 만일 이 생에서 주인공을 못보면 그 안에 관했던 과정은 중생에게 무슨 영향을 미치나요? 주인공을 못보더라도 관하는 행위는 어떤 공덕이 있고 안 좋은 것은 무엇인지요?
댓글목록
큰스님 말씀
깨치지 못했다 할지라도 고정됨이 없는 거를 안다면 색이 공이고 공이 색이라는 뜻을 알게 됩니다. 일체가 고정됨이 없다는 걸 알면, 일체가 고정됨이 없는 것은 죽고 사는 생사의 언어가 붙지 않는다는 얘깁니다. 이것이 간단할 텐데도 도대체 이해가 안 가는 모양입니다. 그래서 깨닫지는 못했다 할지라도 모든 게 나고 드는 것은 한군데서 나고 든다는 건 알고 있어야 된다는 겁니다.
깨닫지 못했다 할지라도 이날까지 거기서 나갔고, 모든 사람 성품에서 일들을 하니 바깥의 일들을 바로 보는 것이 자기예요. 자기가 보고 느끼고 움죽거리고 행하는 거란 말입니다. 누가 하라고 시켰다 할지라도 그건 자기가 있기 때문에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그 사람이 하라고 한 게 아니라 내가 있기 때문에 그 사람이 날 시키게 된 겁니다. 나로 인해서 내가 그 사람의 말을 듣는 거고 내가 살기 위해서 그 사람 말을 듣는 거지 그 사람만 위해서 말을 듣는게 아닙니다. 바로 자기입니다! 자기한테서 나고 들고 하는 것이 고정됨이 하나도 없으니까 말입니다.
그래서 그런 표현도 했습니다. 물감 삼십 가지를 놓고 화가가 그림을 그리는데, 물감을 이거 쓰고 저거 쓰고 그러니깐 어떤 게 진짜 물감이냐고 할 수도 없고 또 자기가 어떤 거를 쓸 때 내가 쓴다고 할 수도 없으니 양면이 다 똑같지 않을까요? 그랬으니 공했지요. 공했으면서도 소소영영하지 않은가요? 갖다 쓸 거 다 갖다 쓰고 말입니다. 또 쓰자는 대로 그냥 주어져서 자연적으로 그냥 써지고요. 공했으면서도 소소영영하게 분홍 쓰려면 분홍 쓰고 흰 거 쓸려면 흰 거 쓰고, 자기 마음대로, 그것도 한번 휘 돌아보고 ‘어! 저런 건 푸르르게 해야겠구나.’ 이런다면 또 푸르른 걸 쓰는 거죠. 그래 자연스럽게 그렇게 쓰면서도 그게 고정되지 않기 때문에 공했다고 했고, 공했기 때문에 외려 찰나찰나 자유스럽다는 얘깁니다.
본래 깨친다는 언어도 붙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본래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그렇게 하고 가기 때문이에요. 그렇게 알고 있으면서도 그걸 사용을 못하고 제대로 용(用)을 못하기 때문입니다. 용을 하면서도 이거 쓸 때 요거 쓰고 요거 쓸 때 이거 쓰고 자유스럽게…. 화가가 그림 그리듯 그렇게, 상황을 봐서 환경에 따라서 요거 잘 요렇게 그렸으면 이것이 특상을 받을 텐데 나무가 파란지 나무줄기가 흙빛인지 그것도 안 보는 겁니다. 자기 멋대로 갖다 그리죠. 그래서 더불어 공해서 같이 돌고 도는 겁니다.
그렇게 뭐든지 소소영영하게 공했기 때문에 뭐든지 소소영영하게 쓸 수 있으면서 삼십 가지 물감을 그냥 거기 놔둬도 내가 쓸 때는 다 쓸 수 있지 않습니까? 그걸 힘들게 짊어지고 다니지 않아도 말입니다. 그런데 ‘요게 내 거다, 요게 내 거다.’ 하구선 한두 가지만 가지고 다닌다면 필요할 때 삼십 가지를 다 쓸 수가 없어요. 그래서 ‘착을 놔라. 착을 놔도 그 삼십 가지는 네가 다 가지고 있는 거다. 시시때때로 찰나찰나 환경에 따라서 주어진 거고, 환경에 따라서 용을 하는 거고, 환경에 따라서 네가 한생각을 내는 거뿐이다. 그러니 한 가지 색에 착을 두지 말고 욕심 부리지 말라.’ 하는 겁니다. 욕심 부린다고 해서 한꺼번에 그 삼십 가지를 다 쓰는 게 아니거든요. 내가 모든 걸 오관을 통해서 잘 보고선 한 가지 갖다 쓰고, 그거 다 쓰고 나면 또 필요한 색깔 한 가지를 갖다 쓰고 그러는 것이에요.
우리 살림살이도 다 그렇습니다. 집안을 꾸미려 해도 그렇고 세상에 집을 지으려 해도 그렇고, 여러 가지 가지가 들어야 하고 다 지어 놓고도 삼 년을 손을 봐야 돼요. 그래야 원칙상으로 그게, 즉 말하자면 자기 마음에 거추장스럽지 않고 다양하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하물며 우리 인간이 살아나가는 데 어떻게 한꺼번에 하늘에서 뚝 떨어져서 깨닫는 줄 아느냐는 말입니다. 과정이 있습니다. 봄이 올 때는 겨울이라는 과정이 있고 가을이 올 때는 여름이라는 과정이 있습니다. 그러니 모든 걸 급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여러분이 사회에 나가서 일을 하는 것도, 안정이 된 주인이 처리하는 거하고 안정되지 못하고 주인이 없는 데서 그냥 날라리로 처리를 하려고 하는 거하곤 전적으로 다릅니다. 여러분이 그냥 ‘주장자가 항상 그대로, 운전수는 자기 자동차 속에 있으니까 핸들을 잡고 있는 거니까 그걸 믿고 거기서 움죽거리게 해라. 그리고 너는 끌리는 대로 따라서 움죽거려라.’ 이러는 건데 그것을 소홀히 생각을 한단 말입니다. 그리고 먹고 살고 병이 낫고 이러는 데만 치우쳐서 그러니깐 그게 안 되지요.
본래 헌 해도 없고 새해도 없는 거지만, 그래도 또 새해가 밝았으니 올해부터는 ‘이거는 나의 절대적인 보배다. 나의 절대적인 보디가드다. 나의 절대적인 주인이다.’ 이렇게 믿고선 ‘죽고 살고 너한테 달렸다!’ 이러고 딱 그냥 밀고 들어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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