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화론과 창조론에 대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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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일설에선 창조론이 옳다고들 주장하고, 자연과학 계층에서는 진화론을 얘기하기 때문에 서로가 틀리다고 얘기하거든요. 그런데 스님의 법문을 들으면 그것이 다 옳다는 생각이 듭니다. 수천 년이 흐른 지금에도 창조냐 진화냐를 가지고 온통 난리들인데 명확한 답변을 부탁드립니다.
댓글목록
큰스님 말씀
지금 얘기로 하기 때문에 다르게 들리는 거지, 예전 얘기로 한다면 학술적, 그 경으로 볼 때 무슨 그…, 수로가 다르잖아요. 내가 한 발 한 발 걸어 들어갈 때는 반드시 내 부(父)가 있어야 내가 잡고 들어갈 수가 있는 거죠. 즉 말하자면 아주 짧게 눈 깜짝할 사이, 고런 사이에 붙어 있는 나의 부가, 즉 말하자면 불성이 바로 거기에 탁 결부되어 있단 말입니다. 그런데 고 결부된 그거를 못 믿는 겁니다, 사람들이. 고 결부돼서 아주 간접적으로 붙어 있는 걸 못 믿기 때문에 자기를 자기가, 그저 손 하나 놀리는 거, 일거일동 자기 몸에서 움죽거리고 보고 하는 거를, 그걸 못 믿는 겁니다. 각자 보는 겁니다, 자길 빼놓고.
그렇기 때문에 상세히 내가 범적인 무한의 그 우주적인 문제, 소용돌이로 내가 들어가서 배우려면 반드시 거기에 인도하는 길잡이가 있어야 된단 말입니다, 안에서. 반드시 안에 길잡이가 있다니까요! 그러면 그 길잡이를 쫓아 들어가야 하고, 만약에 쫓아 들어갈 때에 배가 고프면 그 애비는 자식에게 밥을 먹인다고요. 밥을 먹이고 과자도 사 먹여 가면서 데리고 들어간다고요. 고게 여간 편안한 놈이 아니에요. 그러니까 이 자식은 애비가 배고프면 주고, 또 다리 아프면 쉬게 해 주고 이러니 아주 편안하게 이렇게 쫓아 들어갈 수가 있는 건데도 그걸 모른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나는 내가 체험한 바를 그냥 이렇게 지금 우리말로 하지만 전자에 배운 사람들은, 그 학(學)이 많은 사람은 학으로다 그렇게 해 놓았으니까 그 뒷면의 뜻을 알면 지금 이렇게 쉽게 할 수가 있다 이거예요.
그러니 진화론이라는 게 따로 없고 창조론이라는 게 따로 없고 나툼이라는 게 따로 없단 말입니다. 세 가지가 다 똑같이 붙어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정자와 난자가 모여서 골인을 해 가지고 또 거기 뱃속에서 자라잖아요. 자라는 과정을 지금 가만히 상세히 보라고요. 그러니까 우리가 생각이 없다면, 기어다니는 버러지가 생각이 없다면 어떻게 나비가 돼서 날겠어요? 아니, 그것을 왜 못 믿어요?
그러니까 진화론이 아니라 진화력입니다. 진화력으로서 창조력으로 나타나게 되고 창조력으로 나타나면 나타나는 대로 나툼이 있잖아요. 그러면 지금 현재에도 태어나서 나투고 가지 않습니까. 그럼 무(無)에도 나투고 생시에 이 몸도 나투고 있단 말입니다. 현재 나투고 있는 걸 보면 벌써 무에서도 나투고 있는 걸 알아야죠. 이것이 참, 못 믿는다는 것이 이게 말도 안 돼요. 우리가 집을 하나 지으려 해도 어떻게 어떻게 해야겠다, 어떻게 어떻게 지어야겠다, 이런 생각이 있기 때문에 거죽으로 설계가 나오는 거 아닙니까. 안 그래요? 그래서 집을 짓는 겁니다. 이게 창조예요. 설계를 할 때는 진화지만 집을 지어 놨을 때는 창조다 이겁니다.
근데 창조만 됐으면, 창조로 끝나는 게 아니고 누구나가 다 살 수 있는 집이 된다 이거예요. 고정적인 한 사람만 고 집에서 산다는 법은 없거든요. 그리고 그 집이 고대로만 있는 게 아니거든요. 자꾸 변화돼서 사그러지고 헐어지고 썩어지고 이렇게 되지 않습니까. 그러니 이게 나툼이다 이겁니다, 전부.
그러니 이것이 우리말로 요렇게 해 놓으니깐 쉽죠. 그런데 그것을 이것 따로 보고 저것 따로 보고 이렇게 논의들을 자꾸 하는데, 길게 자꾸 펼쳐 놓지 말고 자꾸 축소해서 이렇게 봐라 이겁니다. 축소해서 보면 자기가 그대로 움죽거리는 것도, 움죽거리게 하는 것도 다 나툼이다 이겁니다, 벌써 이게 창조가 됐기 때문에. 내가 나기 이전, 벌써 생각을 했기 때문에 내가 났다 이겁니다. 났기 때문에 나툰다 이거예요. 그러면 그대로 부처 아니냐 이겁니다. 어째서 그대로 부처를 잘 못 믿느냔 말입니다, 그렇게 간단한 문제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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