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 상태를 점검하고 싶습니다 > 길을 묻는 이에게

길을 묻는 이에게


길을 묻는 이에게는
큰스님 법문 중에서 발췌하여 답을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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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 상태를 점검하고 싶습니다

본문

질문

수행자가 수행의 끈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자신을 채찍질하고 회광반조를 해 나가야 한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주위의 도반 중에는 어두운 산길을 밤새 걸어 보기도 하고 남들이 주저하는 그런 곳을 시험 삼아 다녀 보기도 한다고 합니다. 스님, 저희와 같이 마음을 닦아 가는 수행자들이 자신의 공부상태를 한 번 점검해 나갈 수 있는 가장 쉬운 방편을 설하여 주신다면 공부의 지침으로 삼아 더욱 정진해 나가겠습니다.  

댓글목록

큰스님 말씀

관리자님의 댓글

관리자 작성일

우리가 이렇게 항상 한도량에서 살고 있듯이, 우리들뿐만 아니라 일체 만물만생이 다 그러해요. 왜냐하면 천차만별의 다른 모습들이 제각기 한 개체로 살지만 그 마음과 생명은 모두가 둘이 아닌 까닭이지요. 그런데 왕창 그 주머니를 벗어나서 나의 육신 주머니를 벗어나야 또 한 개체인 주머니를 벗어날 수 있다 그런 말이지요.

그래서 언제나 자기를 자기가 점검해 보고 가는 거 잊지 말도록 하고, 자기를 돌아다볼 줄 알고 또 점검할 줄 아는 그런 사람이 돼야 돼요. 그래서 만약에, 예를 들어서 실질로서 귀신이 내 앞에 딱 나타났다고 할 때, 그건 찰나지 일 초다 뭐 이 초다 이런 게 없어요. 그래서 관할 사이도 없구요. 그렇게 한 찰나에 귀신이 덤빌 때 어떻게 처리를 해야 되는지, 마음이 움죽거리지 않는지, 또 그렇지 않으면 그대로 묵살시키는 그런 이치가 있는지, 한번 자기 점검을 자기가 해 볼 수 있는 거예요. 내가 그렇다 하더라도, 또는 강도가 칼을 들고 들어 왔을 때 나는 과연 내 몸이 아니, 내 마음이 움죽거리지 않는가, 움죽거리는가. 움죽거리지 않을 수 있는가. 어때요? 자기 자신을 볼 때 움죽거리겠어요, 움죽거리지 않겠어요? 그리고 이거는 똑같은 방편인데 큰 구렁이가 내 앞에 뜬금없이 나타났을 때 마음이 움죽거리지 않겠습니까?

자기가 언제나 연습하고 자기가 자기를 점검하면서, 자기 마음을 말입니다. 점검하면서 행할 수 있는, 행하되 함이 없이 한다는 사실을 알면 꽤 나은 사람이에요. 자기를 순간 생각해 볼 때 그런 일이 닥치면 어떻게 대치를 하겠는가 이걸 묻는 겁니다, 지금. 어떻게 대치를 하겠는가.

그래, 그 도리를 모른다면 마음이 안 움죽거릴 수가 없겠지요. 그러나 내가 항상 말하듯이 찰나찰나 화해서 나툴 뿐이지, 내 몸은 바로 없는 것이에요. 시자로서, 자기 자불의 시자로서 움죽거릴 뿐이지, 내가 그만한 자행을 할 수 있는 그런 처지가 못돼요. 그럼으로써 스스로 자기 자불과 자아가 같이 둘 아니게 지금 현실에 콤비가 돼서 돌아가고 있는데 그것을 몰라서 반쪽은 항상 처지는 겁니다. 걸음을 걸어도 두 발로다 뚜벅뚜벅 걸어야 걷는 거지, 어떻게 한 발로 맞춰서 걸을 수가 있겠습니까. 부처님의 한 발 한 손은 그 두 발이 하나로 돼서 한 발이라고 그러는 거예요.

그래서 예전에는 대답을 못하면 그 뒷말은 하지도 않았어요. 하지만 찰나찰나 화해서 나툰다 이겁니다. 고정됨이 없다. 그리고 내 몸은 내 몸뿐만이 아니라 일체 중생이 잔뜩 들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일체 중생의 집합소죠. 집합소니까 내가 물을 한 모금 먹어도 더불어 같이 먹는 한 개체지, 내가 먹은 게 없다 이거예요. 또 내가 봐도 내가 본 게 없고 내가 들어도 내가 들은 게 없다 이겁니다. 왜냐? 더불어 같이 작용을 해서 보는 거니깐 말입니다. 자기가 따로 있을 수가 있나요? 자기가 따로 있을 수 없기 때문에, 일도 더불어 했기 때문에 내가 했다는 말 못하고, 내가 산다는 말을 못하고, 내가 잘했다는 소리 못하고, 내가 죽는다는 소리 못하고, 내가 산다는 소리 못해요!

그렇기 때문에 어떠한 귀신이 나타난다 하더라도 내 마음이 움죽거리지 않게 되는 원인이 거기에 있어요. 내 몸이 그냥 그대로 버려져 있기 때문이에요. 버린다 안 버린다를 떠나서 버려져 있기 때문이다 이 소리예요. 버려져 있는 자기 몸을 함이 없이 움죽거리고 함이 없이 하고, 함이 없이 보고 함이 없이 듣고, 모든 것을 그렇게 해 나가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죽는다 산다도 팽개친 몸이 돼서 그렇게 공했다는 얘기예요. 공해서 팽개친 몸이라서 마음이 절대로, 어떠한 문제가, 귀신들이 함빡 한 방으로 들어앉았어도 그것은 움죽거리지 않는다 이겁니다, 굴하지 않고. 자비로서 굴하지 않는 거지, 악으로서 굴하지 않는 게 아닙니다. 둘이 아닌 까닭에 굴하지 않는다는 소리도 나오고 모두가 조복을 받게끔 된다는 소리도 나오겠지요. 일단 막말로 내 몸이 본래 그렇게 버려져 있고 시자로서 움죽거려 줄 뿐인데 그 마음이, 마음의 줏대가 주인공의 줏대라면 그러고도 남죠. 내 몸을 그대로 자기 주인공에게 버린 거니까. 주인공의 시자일 뿐이지 내가 산다는 말을 할 수가 없는 도리이기 때문에. 그렇기 때문에 어떠한 문제가 앞에 닥친다 하더라도, 내가 가끔 그러죠? 하늘이 무너지는 일이 생겨도 눈 하나 깜짝거리지 않아야 한다고요.

그래서 가끔 이렇게 자기 점검을 자기가 해 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도 사과 하나를 들고 독사굴에 들어갔다고 하지요. 똑같진 않지만 그냥 얘기하는 겁니다. 그런데 그 뜻을 가르치느라고 사과 하나를 들고 들어갔던 거거든요. 그 부처님께서는 거기 들어갈 때 사과 하나를 들고 들어갔는데, 독사를 대신해서 주려고 들어갔다고 그렇게 말들은 하죠. 그런데 그게 아니에요. 들어가서 앉으니까 이건 그 뜻을 모든 사람들한테 일러 주기 위해서 그렇게 하셨던 거지요. 부처님도 없고 독사도 없고 사과도 없었던 거예요. 모두가 둘이 아닌 까닭이지요. 그저 말을 방편으로 지어 놓는 대로 곧이듣고, 한번 뒤집어 보지도 않고, 재껴 보지도 않고, 덮어 보지도 않고 이렇게 그냥 말로만 전달이 되는 거예요. 그 속 내면에 뜻이 있다는 것을 망각하고 말이에요.

그래서 귀신들이 찰나에 달려들었다면 마음이 움죽거리지 않을 수가 있겠느냐, 움죽거리겠느냐. 이건 사량과 이론으로서 말하는 게 아니에요. 실질적으로 그렇게 된다면이죠. 됐다 하면 어떻게 그거는, 우리가 지금 쉬운 말로 ‘관하면 되지’ 그러는데, 그때 통구리에는 관할 사이도 없고…. 사람이 죽어 갈 때에 목숨 탁 끊어질락 말락 할 때에 뭔 생각이 있겠습니까. 내 몸을 와짝 버린다면 마음이 움죽거리지 않을 테지요. 내가 죽는구나 사는구나 하는 것이 본래부터 없으니까. 지금 살아가면서 그게 본래부터 없다는 것을 알고 간다면, 그렇게 내 몸을 비우니까 그 모습이 나타나도 역시 비어 있기 때문에 둘 아니게 돼 버리지요. 내 몸을 비우지 않고 항상 마음이 내 몸에 대한 착과 이쁜 것에 대한 착과 좋은 것에 대한 착과 모든 것을 갖고 있다면, 열반도 살아서 열반이지 죽어서 열반이 아니에요. 그런 것도 지금 살아서 우리가 그렇게 닦아 나가야지, 죽고 나서 누가 닦아 줍니까, 대신 해 줍니까. 죽고 사는 걸 어떻게 대신 해 줄 수가 있고, 깨닫는 것을 누가 대신 해 줄 수가 있고, 잠자고 밥 먹고 똥 누고 하는 걸 어떻게 대신 해 줄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전자의 선조들께서도 네 몸이나 내 몸이나 둘이 아닌 까닭에 없다고 했죠. 마음공부를 하는 사람들에 한해서는, 우리가 공부하는 데도 이 몸뚱이는 마음에 따라서 움죽거리게 돼 있거든요. 그런데 마음공부 하는 사람들에게 이것은 어떠한 마음이 움죽거릴 수가 없다. 모든 거를 다 그렇게 해 나갈 수 있다고 내 마음으로 자칭은 하지만 진짜 이것은, 무의 세계의 연기법이라는 것은 공 도리예요. 공생 공심 공체 공용 공식으로서 돌아가는 공법의 도리란 말이에요. 즉 말하자면 산 사람이 볼 수 없는 그 미지의 세계를 그대로 여여하게 굴리고 또는 갖추어 가지고 있는 사실을 알게 되고, 그냥 여여하게 들이고 낼 줄 알고 이렇게 되는 사람이라야만 그거를, 모든 거를 대치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누구한테 물어봐서 아는 게 아니라 내 자신이 내 자신을 한번 들여다보면 알 거예요. 내 차원이 얼마만큼이나 됐는가를 말이에요.

그래서 강도가 들어와도 마음이 움죽거리지 않는다 이런다면 다죠, 뭐. 우리가 사는 게 그대로 움죽거려서 심부름할 뿐이지 내 실체가 없다 이겁니다. 그러니까 다 내버린 그 마음으로 실체를, 그냥 실체가 아닌 바로 육신을 다 버린, 거기다 그냥 버려서 주장자 하나로 간다 그러면서도 여여하다는 소리는, 움죽거리면서도 갖은 각색의 움죽거림을 다 함이 없이 한다 이거죠. 하지 못한다 한다가 없어요, 이거는. 내 앞에 용도에 따라서 환경에 따라서 주어지는 내 앞의 일들을 묵묵히 그대로 싫다 좋다 없이 그대로 하고 가야 돼요. 공부를 해도 그렇고, 일을 해도 그렇고 모든 사람들이 다 그렇게 가야만이 그게 진짜 하늘 꼭대기에 올라서서 꽃으로 화하게 해서 수많은 중생의 향기를 뿜어 줄 수 있는 그런 사람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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