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인에게도 내가 있는 것입니까? > 길을 묻는 이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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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인에게도 내가 있는 것입니까?

본문

질문

부처님께서는 우리가 흔히 나라고 하는 그 나가 없다고 하셨고 이세상의 모든 것이 무상하다, 영원하지가 못하고 항상 바뀌는 것이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그 ‘나’에 대한 집착을 버려라. 네 욕심을 버려라.”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욕심을 버린다는 것은 나를 죽이는 거라고 봅니다. 나를 죽임으로써 진리의 세계를 보거나 깨닫게 되는 것인데, 그래서 자유인이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자유인이 될 때에도 ‘나’라는 것이 있습니까?  

댓글목록

큰스님 말씀

관리자님의 댓글

관리자 작성일

그것은 이렇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첫째 모든 것은 내가 있기 때문에 나로 인해서 온다. 그러니까 나한테로 일단은 다 놔라. 그러면 나한테 놓으면 나로 인해서 나를 거쳐서 바깥으로 나기도 하고 들기도 하는데 그것이 몽땅 한 군데서 나고 든다는 것을 자기가 증득한다면, 그것을 안다면 스스로 자기는 감응이 되고 스스로 자기와 자기가 둘이 아니게 된다 이겁니다. 스스로. 즉 말하자면 둘이 아니게 자기가 발견이 된다면 그때서부터 진짜 공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나의 그 자심을 얻었을 때 첫째 타심통이 옵니다. 타심통이 올 때는 그걸 자심으로 돌려라. 자심으로 돌리되 바깥으로 돌리는 게 아니라 안으로 자심을 다시 돌린다. 그러면 거기에서는 숙명통이 온다. 타심통이 올 때는 숙명통까지도오거든요. 그러면 숙명통이 오게 되면 그 숙명통조차도 자심으로 돌린다. 또 천안통이 오면 천안통대로 자심으로 돌린다. 또 천이통이 온다 하더라도 그것도 나의 자심으로 돌린다. 그럼 신족통이 온다 하더라도 그건 자심으로 돌린다.

다섯 가지를 왜 다 자심으로 돌려야만 되느냐. 이것이 타심통으로 왔을 때에 이거는 이렇고 저건 저렇고 다 알게 되죠. 요 속은 요렇고 저 속은 저렇고. 그런데 만약에 그걸로써 끝난다면 그건 점쟁이밖에는 안됩니다. 그렇죠?

또 숙명통이 올 때 그것을 바깥으로 발설을 해서 지나온 걸 다 아는 그런 말을 하고 이렇게 되면 점쟁이하고 미치광이가 된단 얘기죠. 자유권을 얻지 못하는 그런…. 거기에서 끝나는 겁니다. 그래서 타심통도 자심이요, 숙명통도 자심이요, 천이통도 자심이요, 신족통도 자심이요, 천안통도 자심이요, 이렇게 자심으로 돌리다 보면 그때 무심이 되는 겁니다. 무심이 됐을 때에 무심이 됨으로써 무심에서 이 골수를 통해서 그대로 또 작용을 할 때에 이 무심 자체도 인제 없어지는 겁니다. 무심 자체라는 그 언어도 없어지는 거죠. 왜? 골수를 통해서 이거는 자유자재하게 굴리는데 거기서 또 이 자심이라는 걸로, 이 하나로 들고 난다 하는 걸 그거를 무심으로 돌리기 위해서, 공심으로 돌리기 위해서, 그 모든 것을 굴리는 것을 숙달을 하는 겁니다, 그때서부터. 이 다섯 가지를 자심으로 돌렸을 때에 그걸 숙달을 또 해요.

이거는 하나로부터 모든 전체가 돌아가는구나. 그러면 하나로부터 무엇이 돌아가느냐 하면 이 가고 옴이 없는 것도 하나로 인해서 내 마음으로 돌려서 가고 옴도 없을 것이요, 두루 보는 것도 가고 옴도 없을 것이요, 보는 것도 없을 것이요, 남의 모든 마음을 안다 하더라도 아는 게 없으며, 또 숙명을 안다 하더라도 아는 게 없으며, 이렇게, 이렇게 돌려 가지고 그것이 다 됐을 때에 오신통에서도 벗어나는 겁니다. 그것도 놓는 반면에 말입니다.

오신통에서 벗어나면 그때에 이제 활용하는 법을 배우게 됩니다. 예를 들어서 무위법의 활용을 하는 데에 이건 각본대로 오는 거를 자기가 오는 대로 그 숙달을, 즉 말하자면 저승에 가서 죽은 사람을 만나 봐야 될 때는 저승에 가서 죽은 사람을 만나 보기도 하고, 이승에서 만나 볼 때는 이승에서 만나 보는데 사람을 만나면서 그 사람에게 있는 전자의 숙명을 보면서 그것을 다 숙달을 하는 거죠, 체험을 하고. 그 누진통을 배우기 위해서 그것이 숙달인 것입니다. 그렇지만 저 사람의 마음을 아는 것도 놓고 저 사람이 어떻게 지내온 것도 놔야 되고 저 사람을 내가 두루 보는 것도 놔야 하고 듣는 것도 놔야 하고 가고 오는 것도 놔야 하고 그렇게 해서 그 오신통에서 ‘아, 이것이 이렇게 내 마음에 의해서 모든 게 돌아가는 거로구나.’ 하고 그때서야 오신통에서도 탁 벗어나고 무심으로 벗어나는 겁니다.

무심으로 벗어났을 때에 그때 오신통을 하는 거를 하나하나 인제 정작 배우는 겁니다. 오신통을 벗어난 뒤에 오신통을 하는 거죠. 오신통 하는 거를 숙달하는 거구요. 그것을 1차의 면벽, 2차의 면벽, 계단 없는 면벽이라고 볼 수 있지요. 그리고 3차의 면벽이 되면 오신통도 벗어나서 정작 활용할 수 있는 거죠. 듣는 것도 보는 것도 하나하나 동시에 굴릴 수도 있고. 중심점이 있기는 있는데 중심점이 없는 것이 왜냐하면 이 자의와 타의를 다 놓았기 때문입니다. 자의와 타의를 다 놓았기 때문에, 벌레 하나 풀 한 포기도 다 놓았기 때문에 이것이 풀 한 포기도 버릴 게 없는 겁니다.

무아가 돼서 내가 했다 뭐 이런 게 없습니다. 기준도 없고 목적도 없으면서 딱 부닥쳤을 때에 그대로 그냥 저절로…, 마치 돌과 돌이 한번 탁 칠 때에 불이 반짝 일어나듯 하는 그런 결과입니다. 그래서 산은 푸르르고 이러는 것은 전체를, 물이 흐른다 하는 건 돌아가는 걸 말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것이 그대로, 그대로 그냥 닥치는 대로 용도대로 돌아가니 그래서 하루살이지요. 판단이 개재되지가 않고 뭘 해야겠다 이런 것이 없이 저절로 그렇게 되어진다 이거지요. 자동적이고 자동컴퓨터고 자동적으로 그렇게 돌아가는 겁니다. 그래서 무위법이라고 그러는 겁니다. 그 무위법으로 인해서 보이는 생명들, 보이지 않는 생명들, 보이지 않는 체, 보이는 체, 이런 것을 다 포함할 수가 있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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