똑 같은 뜻을 달리 표현하시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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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스님께서 풀어 놓으신 『뜻으로 푼 금강경』을 보면 똑같은 표현인데 ‘선남자 선여인이 발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 할 때는 응여시주이며 여시항복기심이니라.’ 이렇게 한 부분에 스님께서는 ‘내면의 자생중생들을 둘 아니게 다스려야 되고 내면의 한마음 없는 한마음을 항복 받아야 하느니라.’ 이게 전부 다 ‘한마음의 자생화신보살’로 앞에는 표현하시고 ‘한마음의 자생응신보살’로 말씀하시고 또 그 다음에 ‘내면의 자생중생들’이라고 표현을 하시고 ‘내면의 한마음 없는 한마음’이라고 표현하십니다. 그러나 저희로서는 절대로 다른 의심 없이 믿고 있습니다만 이게 글자 풀이를 해서 결국 보이는 세계 속에서 다른 사람들을 설득시켜야 될 때에 이러한 부분이 이해가 될까 좀 우려됩니다.
댓글목록
큰스님 말씀
부처님의 말씀도 그냥 글로만 써 놓으신 게 아닙니다. 말하자면 이동을 하게 했거든요. 그 말뜻이 이동을 하게 만들었다는 말이 이해가 가십니까?
그것이 글자로만 이렇게 말씀을 하신 게 아니라 말씀을 하시되 그 말의 뜻은 이동이 되게끔 했단 얘기죠. 남의 속에도 들어갈 수 있게끔 했다 이거죠. 글이 아니라 글이 아닌 말씀이다, 말씀 아닌 말씀이다 이런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말을 어느 사람 속에도 다 들이고 낼 수 있다고 하는 겁니다. 그러니깐 얼른 쉽게 말해서 예전에는 이런 말을 이렇게 했는데 지금 알기 쉽게 하려니깐 이런 말을 이렇게 했다, 이렇게 되는 거죠. 지금의 사람들이 부처님이 말씀해 놓으신 그 뜻을 다 알 수가 있습니까? 그래도 ‘공생이다’ 이러면 ‘아, 몸체 하나가 전부 내 생명이로구나.’ 이렇게 생각하고 ‘더불어 같이 사는구나.’ 이렇게 생각을 하게 되죠.
부처님께서 설해 놓으신 걸 옮겨 놓은 책을 열심히 보다가 어느 병자가 병이 나았어요. 또 어떤 사람은 등이 굽어서 고생했는데 하루는 생시도 아니고 꿈도 아니고 그런 상태에서 누가 그냥 작대기로 와서 치더니 등이 나았다는 얘기도 있습니다. 그렇게 이 부처님의 말씀이, 뜻이, 하나의 말씀이 수천수만 개로 돌아가되 돌아간 게 하나도 함이 없이 돌아갔다 이거죠. 그러니깐 들고 남이 없이 들고 난다 이 소리죠. 이동을 하는 거예요, 찰나찰나.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이동이 되는 거예요. 우리 눈이 이동이 돼서 보듯이. 이거 보면 이거 보고 저거 보면 저거 보듯이 그렇게 말입니다.
그래서 이 마음공부 하는 사람들은 이거를 알기 위해서 그 수만 가지 모래알같이 많은 색색가지의 진리를, 순간순간 화해서 바뀌는데 그걸 어떻게 대치를 하느냐 이런 거거든요. 그런데 그것을 마음공부 한 사람들은 대치를 딱딱 하고 돌아갑니다.
그러니깐 ‘이 몸뚱이가, 내가, 이것을 내가 이렇게 했다.’ 이것도 내가 함이 없는 거라는 걸 아셔야 합니다. 내가 공해서 없는데 이걸 어떻게 했겠습니까. 그러니까 함이 없이 하시라. 내가 산다는 생각을 하지 마시라. 내가 산다고 하지 말고 나 아닌 내가 그냥 사는 걸로 하라고 늘 말씀드리는 겁니다. 그게 사실이니까요.
이 껍데기는 마음에 따라서 따라다니는 거지, 에너지가 동하는 자체가 아니라는 걸 항상 생각하신다면 겉으로 보이는 걸로 뜻을 따지고 이치를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내면의 참뜻이 무엇인지 알게 되리라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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