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른 길을 걷고 있는 것인지요? > 길을 묻는 이에게

길을 묻는 이에게


길을 묻는 이에게는
큰스님 법문 중에서 발췌하여 답을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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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른 길을 걷고 있는 것인지요?

본문

질문

저는 어려서부터 저의 존재에 대해 궁금증이 강했습니다. 그러다 대학 때 위파사나(바라보기 명상)를 하였는데 그때의 방법은 주로 마음의 흐름을 바라보면서 나의 인식 근원을 찾고자 하는 것이었습니다. 흐르는 마음과 바라보는 주체자(나의 느낌)를 바라보며 그 모두를 인식하는 인식자를 찾는 의도를 갖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 달 전인가 갑자기 인식하는 주체자 또한 다른 생각과 같은 하나의 관념일 뿐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최후의 인식자가 본래의 나이며, 본래의 나는 인식의 대상이 아니고 알 수 없는 것(시간과 공간 이전)이라는 걸 순간적으로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마음의 짐이 내려지는 것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현재는 모든 관념의 허위성이 점점 분명해지고 있습니다. 저의 질문은 이 상태에서 더 이상 나아갈 곳이 없기에 그냥 관념의 허구성을 바라보며 살 뿐입니다. 스님, 제가 바른 길을 걷고 있는 것인지 알려 주십시오. 

댓글목록

큰스님 말씀

관리자님의 댓글

관리자 작성일

부처님께서도 ‘수행은 내 몸을 다루는 게 아니라 마음을 다루는 거다.’ 하는 것을 항상 말씀하셨어요. 그래서 “몸으로 아무리 수행을 해도 몸 떨어지면 수행도 떨어지고 다 떨어진다. 그러니까 마음을 닦아라.” 이렇게 말씀하셨잖아요.

그래서 참선이라고 하는 것은 ‘이 뭣고’ 하는 것도 그 자리에 놓는 것입니다. ‘이 뭣고’라는 말에 착이 붙으면 끊어질까 봐 두렵고 또는 무기공에 떨어질지도 모릅니다. ‘이 뭣고! 이게 뭘까?’ 하는 것에 10년이 걸리고 20년이 걸리는 겁니다. 당당히 네가 있으면 네가 있다는 것을 증명해라! 하는 것하고 ‘이게 뭣고?’ 하는 것하고, 수박을 놓고 ‘이게 뭣고?’ 하고 있는 거하고 그냥 칼로 탁 잘라서 먹어 보는 거하고는 의미가 다릅니다.

그깐 놈의 거, 이래도 한 세상 저래도 한 세상인 것을 칼로 잘라서, 죽으면 어떻고 살면 어떻습니까? 이왕지사 배낭 지고 한번 나왔다가 이 모습은 원점으로 돌아갈 건데, 맛을 봐야 먹고 싶기도 하는 생각이 들지 맛을 보지도 못했는데 어떻게 먹고 싶은 생각이 나겠습니까? 그러니까 무조건입니다, 무조건. 일체 만법이 벌어지는 이 세상이 전부 자기로 인해서 생긴 거니까, 자기만이 자기가 있다는 것을 증명 받아 가지고 세상이 둘이 아니게 돌아가는 이 이치를 꿰뚫어서 알기 위해서는 또 놓고 뭉쳐 놓고 뭉쳐 놓고 그렇게 해 나가야 됩니다.

나를 발견했다고 해서 무의미하게 그냥 나라는 존재를 세우고 그렇게 보임(保任)을 하지 않으면 역시 또 미(迷)해지니까요. 세상의 도리는 너무나 즐겁고 좋은 세상입니다. 남을 원망하고 남을 탓하기 이전에, 자기로부터 생겼다는 그 점을 상세히 아실 것 같으면 이 세상이 즐겁기만 합니다. 가다가 정히 그것이 사사로이 쓰이는 게 아니고 남이 불쌍해서 쓰인다거나 또는 피치 못할 일이 있어서 쓰인다거나 이런다면 가차 없습니다.

무(無)자 화두를 가졌다, 또 ‘이 뭣고?’ 화두를 가졌다. 어떤 화두를 가졌든지 간에 그 화두는 바로 이름인 것입니다. 또 내가 주인공이라고 부르라고 한 것도 이름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 주인공이라고 이름을 낸 것은 내 마음 안으로 모든 것을 놓고 믿으라는 것이죠. 내 자아를 발견하는 데에 필수적으로 필요한 것이니까요, 이 바탕이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몸이 이 세상에 나온 것을 화두라고 생각하고 근본에 바로 들이대라. 이것이 근본의 지표가 될 수 있고 바탕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게 제사 지낼 때 위패 놓는 거와 마찬가지이고 우리가 또 부처님을 조성해 놨을 때에는 바로 저 부처님의 몸이 우리의 몸이요, 저 부처님의 마음이 우리의 마음이니 이렇게 알게 하기 위해서 모셔 놓은 것과 같습니다. 그러면은 그 화두 든 것은, 우리의 이 몸이 벌써 화두로, 이 세상에 나왔을 때 이미 화두로 정해졌는데 바깥에 또 화두를 쥐고 있으니 이거 용납이 되겠습니까?

이거를 비유해서 한번 들어 봅시다. 모든 기계가 물건을 생산하는 데에 쭉쭉 빠집니다. 그런데 기계 한 귀퉁이가 고장이 나 가지고선 만약에 막혔다고 합시다. 그렇다면 뒤따라 나오는 것이 막히게 돼 있습니다. 그러니 이것은 파산이 될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부딪칠 수밖에 없는 것이죠. 인간 생활도 바로 놓고 그냥 돌아간다면 그렇게 밀리지 않을 것을, 밀려서 부닥치고 부닥치면서 사람이 고를 겪고 그러지 않을 것을 자꾸 만들어서 자업자득으로 생활을 해 나간다는 얘깁니다.

그러나 이 공부는 죽고 사는 게 없고 또 생사윤회에 끄달리지 않으며 우리가 자유권을 가질 수 있는 공부입니다. 자기가 뿌려 놓은 씨들도 자기 자석에 의해서, 그 자석의 위력에 의해서 딴 데로 새지 않는 마음, 올바른 마음을 줄 수 있는 그런 능력이 여러분한테는 다 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자꾸 이 육신, 허수아비 같은 육신만 잡으려고 하니까 그것은 안 되는 법입니다. 육신은 개방시키면서 마음으로는 항상 그렇게 자석과 같은 마음으로 서로 잡아당긴다면 그것이 바로 둘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여러분 중에서 부처님 법이 따로 있고 우리의 생활이 따로 있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있다면 오늘부터는 그것을 고치십시오. 일상생활에서 우리는 그렇게 놓고 참선을 하고 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사랑을 하고 오손도손 얘기를 하는 것도 참선이요, 말다툼을 한다 하더라도 참선입니다. 만약에 그 근본을, 그렇게 돼 있는 근본을 아실 것 같으면 우리는 화가 나도 화를 자재할 수 있죠. 놓고 돌아가니까 말입니다. 싸움을 했다고 일 년 이 년, 생명이 다할 때까지 화가 나 있는 분이 있습니까? 고정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웃음도 한계가 있고 우는 것도 한계가 있고 속상한 것도 한계가 있고 잘사는 것도 한계가 있고 못사는 것도 한계가 있습니다. 고정된 거는 하나도 없습니다. 그래서 공했다는 것이 바로 진리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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