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일에 무관심해지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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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일상생활에서나 제가 하고 있는 모든 일을 근본을 믿고 주인공에 관하면서 생활을 하니 저 개인으로는 모든 것이 편안해지고 걱정거리가 많이 없어졌습니다. 그러다 보니 사소한 일이나 제가 하고 있는 사업과 주변 일들에 대해 무관심해지는 것 같은 생각이 들곤 합니다. 이런 상태가 바람직한 것인지, 아니면 주변의 일들에 대해 의도적으로 마음을 내야 하는 것인지 혼란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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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스님 말씀
편안하니깐 그러시겠죠? 우리가 그렇게 편안하게 살아 보지 못했기 때문에. 마음공부를 하면서 더러운 물도 바꿔 쓸 수 있다. 하는 건 이건 한 찰나입니다. 이 마음이란 것은 한 찰나에 그 모두를 깨끗하게 할 수 있는 그런 여건이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거기다 놓으라고 하는 겁니다. 거기다 놓으면 앞서의 입력은 없어지고 새로이 입력이 들어가면서 그게 없어지는 겁니다. 바꿔지는 겁니다. 바꿔지기 때문에 할 일이 없어지니까, 편안하니까 이게 이렇게, 이렇게 살아도 되나? 이런 정도가 되죠. 바쁘지 않기 때문에 그런 생각도 들지, 바쁘면 그런 생각도 할 수가 없죠.
그러니까 여러분이나 나나 모두가 이 세상에 태어날 때 벌써 원소를, 자기가 생명력을 가지고 나온단 말입니다. 생명력을 가지고 거기 들어가서 모습을 받는단 얘기죠. 그래서 이 모습을 받는 데에 부모의 은공으로 받았다 해서 『부모은중경』에도 그렇게 나와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자기 원소가 그렇게 고생을 하고 수억겁을 거치면서 그렇게 진화하고 형성되는 그 고생은 모르죠. 즉 말하자면 태어나는 거는 자기 소관이란 말입니다, 모두가. 부모의 소관이 아니라 자기의 소관이란 말입니다. 차원이 높고 낮고 그런 것도 자기의 소관이죠, 다.
그러니까 자기가 모습 있는 인연을 따라서 소중한 모습을 받은 그 모습으로 나오게 한 바로 그 보이지 않는 자기를 진짜로 믿어야 된다. 그건 바로 즉, 만법을 행할 수 있는, 색색 가지로 만법을 행할 수 있게 하는 에너지다 이런 말입니다. 에너지니까 그 에너지를 부처님께서는 별성을 봤다고 했고 또 불가에서는 불성이라고도 합니다. 그리고 에너지 주장자라고도 합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생각을 잘해서, 잘하면 한 등 올라가고, 올라감이 없이 올라가고, 우리가 문을 찾을 때 지혜롭게 찾아야 문 없는 문을 마음대로 다닐 수 있다. 문을 찾아다니는 건 육신을 가진 사람이나 문을 찾아다니지, 육신을 갖고 있지 않은 사람은 문이 없어도 그냥 문입니다. 이렇게 될 때 여러분이 그 원소 자체의 불성은 문이 없어도 왕래할 수 있는 겁니다.
아난이 형님, 내가 형님을 뵙고 싶습니다. 하니까 가섭 존자의 말이 너 그렇게 들어오고 싶으면 열쇠구멍으로 들어오너라. 이랬거든요. 그걸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들어올 수 있으면 열쇠구멍으로 들어왔다가 가라 이겁니다. 열쇠구멍이 문도 될 수 있는 거라면 이 봇장이고 벽이고 그런 게 무슨 소용 있습니까? 우리가 그렇지 않으면 50%를 즉, 정신계로 활용할 수가 없는 까닭입니다.
지금 원소는 정신계를, 왼쪽 두뇌의 정신계를 말하고 또 바른쪽은 물질계를 말하는 겁니다. 이거를 혼합시켜서 이게 같이 이렇게 돌아가는데 여러분은 같이 돌아가는 거를 이해를 못합니다. 그거를 이해를 하신다면 정말이지…. 예전에 청담 스님이 대자대비라고 대자 둘을 이렇게 써 놓으신 게 있어요. 근데 누구든지 대자 둘을 써 놨으니까 대자비죠. 대자대비죠. 그런데 우리가 볼 때는요, 앞도 없고 뒤도 없고 그냥 걸어갈 뿐이야. 그냥 길을 하나, 이렇게 주장자를 그려 놨거든요. 누운 주장자, 선 주장자가 있거든. 누운 주장자를 그려 놨으니 그대로 갈 뿐이라는 얘기죠. 그러니 대자대비도 그렇게 앞도 없고 뒤도 없다. 대자대비니까 그렇다는 얘깁니다.
그리고 와선이니까, 누운 주장자니깐 길이란 말입니다. 그러니 그냥, 그냥 걷고 있다는 얘기죠. 우리가 머리에 하나의 지혜가 트이면 열 가지 백 가지가 트인다고 그랬습니다. 어떤 것이든 들이대면 그게 법이 되고, 어떤 것이든 들이대면 그대로 결정이 나고, 어떤 것이든 들이대면 그냥 활용이 되는 겁니다. 꼭 육체가 강을 건너가는데 한 걸음에 강을 떼어 놓겠습니까? 그런데 우리가 강을 떼어 놓을 때 한 걸음을 떼어 놔야 우리가 그 부처님 자리에 한 도량에 든다고 했습니다. 한 걸음으로, 한 강을 한 걸음으로 떼어 놔야 한 도량에 든다 이런 뜻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지금 살아나가는 데 조금도 정신계의 문제나 물질계의 문제나 같이 반반 섞여서 돌아가기 때문에 그걸 이해를 못하고 그냥 간다. 그런데 모두 물질이 나라고 생각하고, 내가 했다고 생각하고, 내가 망했다고 생각하고, 내가 잘했다고 생각을 하니까 뭐든지 그게 핀트가 안 맞는 거죠.
그러니 자기 모습은 심부름꾼에 지나지 않으니 자기가 결정을 짓지 말고 모든 걸 주인한테, 주처한테 맡겨 놔라. 그러니까 일할 때는 행선이고, 앉았으면 좌선이 되고, 또 길거리를 다닐 때는 입선이 되고 누웠을 때는 와선이 되느니라. 그것이 조금도 그른 사이가 없이 요만큼도 틈이 안 나게끔 돼 있는 자체다. 그게 그냥 참선이다, 여러 가지로 따질 게 없이. 참선이니까 우리 생활이 그냥 도니라. 우리 생활이 그냥 도니라, 이런 거예요. 우리 생활이 도지, 우리 생활 떠나면 뭐가 있느냐? 너가 떠나면 뭐가 있느냐? 하나도 없다. 모두 각자 여러분이 계시기 때문에 종교도 있다느니 진리도 있다느니, 부처도 있다느니 세상도 있다느니, 에고도 있다느니, 또 편안함도 있다느니 이런 게 모두가 필요한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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