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의 참다운 제자가 되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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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마음공부를 해 나간다고 하면서도 타력으로 빠지거나 사주와 팔자를 물으러 다니는 분들이 있습니다. 물론 저 자신도 그런 의식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부처님의 정법이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스님, 부처님을 어떻게 믿고 어떻게 살아가야 부처님의 참다운 제자가 될 수 있을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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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스님 말씀
우리가 무조건 부처님 앞에만 왔다 갔다 한다고 해서 부처님의 진짜 제자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머리를 깎고도 더부룩하게 기르고 다니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머리를 안 깎고도 아주 단정히 깎고 다니는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가 이 문제를 생각해 본다면, 생명이 있고 마음내고 몸이 움죽거리는 이 삼위일체가 회전되고 있다는 것이죠. 다른 말로 또 얘기하자면 대승 불교니 소승 불교니 선 불교니 이렇게 말을 하죠. 그러나 동시에 같이 돌아가고 있습니다.
지금 여기서 마음공부를 한다고 했는데, 그것도 이름입니다만 주인공(主人空)이라고 하는 그 뜻을 항상 얘기해서 잘 납득하시리라고 믿습니다. 이름을 내세울 수 없는 게 주인공입니다. 한 물건도 없다고 육조 스님은 말씀하셨죠. 뒤집어서 놓고 보면 봄동산에 한 물건이 꽉 차 있다는 뜻입니다. 사람은 어떤 것이든 내세울 게 없는 겁니다. 여러분이 신발을 휙 벗어 놓고는 아무 걸림이 없이 여기 들어오듯, 집 안에서 걸레를 빨아서 휙 던져 놓듯 우리 인생은 그렇게 지금 찰나찰나 나투면서 진화되면서 발전하면서 돌아가고 있죠.
그런데 우리가 의식적으로 가지고 있는 병고는 어떤 것인가. 여러분이 모두 절에 다녀도 똑같은 소견을 가지고 있지는 않습니다. 넓은 사람도 있고 좁은 사람도 있고 그렇죠. 사람들이 절에 다니면서 기도를 한다든지 기도를 부친다든지, 또는 백 배를 하든지 천 배를 하든지 또 일 배를 하든지 그건 여러분의 정성입니다. 어떻게 하든지 마음에 따라서 몸이 움죽거려지는 거니까요. 내가 얘기하고 싶은 것은, 과거에 어떤 죄업이 있느니 업보가 많으니 이런 데에 걸리지 말란 말입니다. 천차만별로 다가오는 문제들이라든가 또는 그걸로 인해서 내가 무슨 죄를 많이 지어서 팔자가 이렇다느니 운명이 이렇다느니 이러시는데, 이런 데 걸리지 않아야 되겠다는 얘깁니다.
물론 나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여러분한테 그런 의식을 씌워 주기도 싫을 뿐만 아니라 씌워 주기 이전에 벗겨 줘야 되겠다는 생각입니다. 내가 벗어진다면 여러분도 벗어질 거고 내가 씌어졌다면 여러분도 씌어질 겁니다. 길잡이라는 것이 그렇게 호락호락한 게 아닙니다. 내가 배가 부르면 일체 만물만생 일체제불이 다 배가 부르듯이, 내 한생각으로 비가 내리게 해서 일체 만물만생을 전부 촉촉하게 배를 불리듯이 말입니다. 이 마음이라는 게 참 묘한 겁니다. 그러니 새달에, 훗달에 어떠니저떠니, 내년에 좋으니 나쁘니, 이런 것에 속지 말라 이 소립니다. 말로 따져서 하자면 무여(無如)라는 것도 있고 일여(一如)라는 것도 있고 여여(如如)라는 것도 있고 즉여(卽如)라는 것도 있겠죠. 이것을 바로 사구공법(四句空法)이라고 말할 수 있죠. 이것을 타파하지 않으면 우린 자유권을 얻지 못해요.
우리가 지금 제자리걸음을 하면서 움죽거리고 있는데, 끝간 데 없는 이 평등 진리 속에서 우리는 항상 그런 데 끄달려서 속고 삽니다. 속아서 그 속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끝간 데 없이 모습을 바꿔 가지고 또 나올 겁니다. 내가 항상 이런 말을 되풀이합니다만 팔만대장경이 글자로만 쓰여 있는 게 아닙니다. 병풍 둘러치듯 세상이 이렇게 돌아가는 게 팔만대장경의 근본이자 바로 실행으로 들어가는 즉행이며 즉여란 말입니다. 우리가 말 한마디라도 즉설이 돼야 법으로 행해지게 되죠. 한데 떨어지면 안 되거든요. 말 한마디 해서 한데 떨어지면 위로는 부처님께 누가 되고 또 아래로는 따르는 사람에게 햇빛을 줄 수가 없어요. 햇빛! 묵은 빚을 갚지 못하고 햇빛을 줄 수 없으니 자라는 애들은 어떻게 자라겠느냐 이 소리지요.
여러분은 생각을 깊이 하셔야 합니다. 부처님은 자기 주인공 속에, 즉 말하자면 우주 섭류의 소용돌이, 법계의 소용돌이, 그 소용돌이 속에 나와 더불어 같이 돌아가고 있거든요. 한마음 속에 말입니다. 주인공이라는 것이 그것이거든요. 그러니 부처님을 믿고 다니더라도 둘 아니게 볼 수 있어야 하는 겁니다. 법당에 오면 부처님 몸과 내 몸이 둘이 아니요, 부처님 마음과 내 마음이 둘이 아니요, 부처님 생명과 내 생명이 둘이 아니니 어찌 일체 만물의 생명과 나의 생명이 다르며, 법이 다르며, 움죽거리는 게 다르겠습니까? 그래서 불과 법이 둘이 아닐지언댄 승보도 그러하니라 했습니다. 이 몸은 그냥 따라다니는 껍데기입니다. 그런 껍데기 차와 같은 거죠. 운전수가 가자는 대로 가는 차.
그러나 그 껍데기도 소용없는 게 아니죠. 그건 화두예요! 내가 이 세상에 나왔으니 화두죠! 내가 없었더라면 우주도 있는지를 몰랐고 이 세상도 있는지를 몰랐고 상대도 있는지를 몰랐다 이거죠. 그런데 내가 있었기 때문에, 이 지수화풍의 근원이 있었기 때문에 생명체들이 나왔죠. 그렇듯이 지수화풍이 있기 때문에 일체, 물질적인 이 모든 것이 지수화풍이 모여서 움죽거리고 있거든요. 우리는 이 지수화풍이, 껍데기가 움죽거리는 것보다도 유(有)의 법과 무(無)의 법이 같이 움죽거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이겁니다. 마음 따로 있고 육체 따로 움죽거리고 이러는 게 아니죠. 마음내는 것 따로 있고 움죽거리는 육체 따로 있고, 마음내는 놈 따로 있고 마음내기 이전 놈이 따로 있고 그런 것도 아니고요. 그놈이 다 하는 거죠.
그러니 여러분이 의식적으로 ‘내가 여기다가 갖다 놓지 않으면 죄를 사해 주지 않겠지. 여기 칠성님 전에 놓지 않으면 우리 남편이나 자식들의 명이 길지 않겠지. 약사보살한테 놓지 않으면 병이 안 낫겠지.’ 이런 생각일랑 아예 하지 말라는 겁니다. 사람의 생각이라는 건 고정됨도 없을 뿐더러 고정관념도 없다 이거죠. 생각해 보세요. 만나는 것도 말하는 것도, 보는 것도 듣는 것도, 먹는 것도 가고 오는 것도 고정됨이 있는가. 모두가 공했어요. 공한 것은 없어서 공했다는 게 아니거든요. 한 찰나 찰나 나투며 돌아가기 때문이죠. 어린애 적의 나를 나라고 할까요, 늙었을 적의 나를 나라고 할까요? 나라는 게 없어요. 그래서 한 물건도 없다고 말씀하신 게 꽉 찼기 때문에, 한 물건이 꽉 찼기 때문에 그렇게 말씀하신 거죠.
원효 대사는 한 물건이 없다고 하기 이전에, 빗자루로 깨끗이 쓸어 놓으니까 낙엽을 일부러 갖다가 뿌려 놓으면서, 잘못 쓸었다 이거예요. 그거 한번 생각해 보셨어요? 마음을 가난하게 가진다면 항상 바둥거리고 지혜로운 생각이 안 납니다. 왜 놓지를 못해요? 아까 내가 얘기했듯이 신발 벗어 놓고 들어오듯 그렇게 착을 두지 말고 놓아라 이겁니다. 본래 놓고 가는 거니까. 본래 제자리걸음으로 끝간 데 없이 놓고 가요. 그런데도 불구하고 마음으로 항상 이게 옳으니 그게 옳으니 하고 따지거든요. 그렇게 따지는 것은, 이건 배고 이건 돛대고 이건 사공이고 이건 물이고 이렇게 따지는 것은 교리에 관한 건이겠지요. 그런데 지금 저는 목마르면 직접 그냥 마시는 걸 말하는 겁니다. 아무리 여러분이 불제자로서 수십 년을 다녔다 하더라도 실천이 아니라면 소용없는 겁니다. 목마른데 물을 보고도 못 먹는다면 ‘아! 여기 이렇게 좋은 물이 있다더라.’ 하고 보고 듣고 해도 자유스럽게 떠먹지 못하고 떠 주지 못한다면 아무 소용 없는 거예요! 어떻게 그런 사람들이 묵은 빚을 갚으며 햇빛을 줄 수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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