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회와 무아가 모순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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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얼마 전 기독교 관련 신문에서 “불교의 윤회설과 무아설이 양립될 수 있는가?”라는 제하의 칼럼을 읽었습니다. 그것은 마치 윤회 사상과 제법무아 사상이 서로 양립할 수 없는 불교의 모순인 것처럼 표현을 했는데 정말 그것이 불법의 허점인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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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스님 말씀
평상시에 여러분이 살고 있는 것이 만행(萬行)입니다. 그대로 만행입니다. 만행이 따로 있어서 만행이 아니라, 그대로 만행입니다. 끝없이 이어 가는 그 행이, 고정됨이 없이 행하는 그 생활이 곧 만행입니다. 여러분이 이 세상에 나와서 만행을 하기 때문에 결국은 육도만행(六道萬行)이라고 할 수 있죠. 그러나 만행이 있기 때문에 육도윤회가 있다는 겁니다. 이해가 되십니까? 육도윤회가 있기 때문에 부처님께서 ‘육도윤회에 매이지 말라. 끄달리지 말라.’고 가르침을 주신 거죠. ‘끊어라’ 그러신 게 아니라 ‘매이지 말라. 보는 것도 듣는 것도 고정됨이 없어서 발 하나하나 디뎌 놓는 것도 바로 윤회거늘, 어찌 한 발짝 떼어 놓고 또 한 발짝 떼어 놓는다고 해서 거기에 치우쳐서 끄달리고 매이느냐.’ 이런 뜻이죠. 그러니까 ‘보는 것도 듣는 것도 다 고정됨이 없기 때문에 윤회에 매이지 말라.'' 하신 겁니다.
예를 들어서 아까 차를 한 잔 주는데 뜨거웠어요. 그런데 이거를 빨리 식으라고 젓다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뜨거운 것도 아니고 찬 것도 아니다.” 즉 “네가, 차걸랑 데워 먹고 뜨겁걸랑 식혀 먹어라. 이게 진법(眞法)이다.” 이런 거와 같이 우리가 항상 육도만행을 하면서 육도윤회를 합니다.
그런데 윤회가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생사에 의해서만이 윤회가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찰나찰나 돌아가는 것이 윤회입니다. 화(化)해서 나투면서 찰나찰나 변화되면서 돌아가는 이 만행이 즉 윤회입니다. 윤회인 까닭에 그 윤회에 매이지 말라고 한 겁니다. 재차 얘기하지만 ‘매이지 말라. 끄달리지 말라. 그대로 볼 수 있고 그대로 들을 수 있다면 그대로 여여하니라. 그대로 점프해서 넘어가느니라.'' 이런 뜻입니다. 그러니까 ‘육도윤회가 따로 있는 게 아니고 우리가 지금 생활하면서 고정됨이 없이 공(空)했다고 하는 자체가 바로 그것이니 매이지 말고 끄달리지 마라.’ 하는 겁니다.
‘이 세상이 다 공했느니라. 너를 세울 것도 없고 나를 세울 것도 없고, 나를 꼬집어서 내세워서 나라고 할 게 없느니라. 안과 밖이 다 그러니라. 안에도 내 집안의 모든 생명체의 의식들인 내가, 그러니까 사람 속엔 사람이 들어 있어. 그렇기 때문에 사람이 하나 둘이 아니라 헤아릴 수 없느니라. 그런데 어떠한 것을 꼬집어서 나라고 할 수 있겠느냐? 그러니까 나는 공하고 없다. 내세울 게 없다. 없다가 아니라 너무 많아서 어떤 걸 세울 게 없다. 세울 게 없는데 무엇에 매이고 무엇에 끄달릴 게 있느냐? 그러니까 윤회라는 이름조차도 없느니라. 살면서 모두 그 이름을 지어 놓지 않는다면 질서를 문란케 하고 지키지 못하기 때문에 이름을 지어 놓고 부르느니라.’ 했습니다.
그리고 제법이라 하면 일체를 말하고, 이 무아라고 한다면 나도 없고 너도 없고, 없는 그 가운데에 나, 자아(自我)가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게 없어도 아니 되고 저게 없어도 아니 되고 그냥 꽉 차 있습니다. 있기 때문에 무아라고 한 것이지, 이러한 무아가 없다면 윤회가 어디 있으며, 윤회가 없다면 이러한 무아가 어딨습니까? 눈이 없는데 귀가 어딨고 귀가 없는데 눈이 어딨겠습니까? 생명이 없으면 육신이 보이지 않아서 무효고, 육체가 없어도 보이지 않으니깐 무효고, 또는 생각을 해내지 못해도 목석이니깐 무효야. 다 갖추어서 생김생김이 잘생기고 잘 행할 수 있는 똑바른 사람이라야 그걸 제법의 무아라고 하는 것입니다. 뜻이 그렇단 얘깁니다. 그래서 세상 뜻이 모두가 공해서 찰나찰나 나투면서 화해서 돌아가는 경지이기 때문에 제법무아라고 했습니다.
그러니 없어서 무아가 아니라, 우리 몸뚱이 속에 너무 많아서 어떤 거를 내세워서 나라고 할 수 없고, 내가 먹었다고 할 수 없고, 내가 살림살이를 지금 하고 간다고 할 수도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무아입니다. 우리가 따지고 본다면 모두가 작은 것 큰 것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그 모든 법칙에 의해서는 하나도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제법이 무아인데 어찌 윤회가 있겠습니까?’ 이런다면 우린 움죽거리지도 말고 목석이 돼야죠. 물도 파도도 없고 흘러가는 것도 없어야 되겠죠? 그런데 넉넉히 흘러가고 움죽거리고 자동적으로 아주 질서정연하기 때문에 무아인 것입니다.
그 질문을 하셔야 또 그것이 상세하게 돌아가겠으니까, 질문들 잘 하셨어요. 별달리 따로 생각하지 마세요. 우리가 생활하는 것이 만행이며, 우리가 생각하고 사는 것이 바로 윤회입니다. 그러니 생각하고 사는 것이 윤회라면, 이것 보세요. 아까도 물 얘기 했지만, 뜨거운 거를 억지로 식히려고, 금방 먹기 위해서 막 식히려고 아등바등할 필요가 없어요. 놔두면 저절로 그냥 식기도 하고, 정히 급하면 찬물에다 띄워서 식혀서 먹어라. 재간대로 해라. 재간대로 하는 반면에 데워서 먹고 식혀서 먹어라. 매사에 일이 다 그러합니다. 그러니 아등바등 애쓰지 말고 내 재간껏 식혀 먹고 데워 먹고, 또 그렇게 급하지 않으면 넉넉히 그냥 놔두면 식어요! 때가 되면 그냥 먹게 돼. 급한 거는 빨리 식혀서 먹고, 급하지 않으면 그냥 놔둬도 먹게 된다 이겁니다. 우리가 마음이 조급하고 관습에 의해서 복잡하게 생각하니까 삶에 대해서 어지럽고 괴롭고 그렇지, 하늘이 무너진대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만큼 그렇게 괴로울 일이 없는 겁니다.
이 세상이 두 쪽이 나고 가루가 된다 하더라도 불교가 없어지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내가 복잡할 게 하나도 없습니다. 느긋하게 생각하신다면 바다를 삼킬 수 있고, 삼키기만 해서도 아니 되니까 토하기도 할 수 있다 이 소립니다. 바다를 삼킬 수 있고 바다를 토할 수 있다면, 그것은 능히 부처이며 능히 법의 보살이며 능히 어느 보살이 아니 되는 게 없고 어느 중생이 아니 되는 게 없습니다. 그러니 부처가 하늘에서 그냥 떨어지는 게 아니고 살고 있는 우리 인간들 틈에서 부처가 나는 것이지, 우리들을 떠나서 생활을 떠나서 부처님이 있고 법이 있는 게 아닙니다. 부처님이 삼천 년 전에만 계신 게 아니고, 지금 이렇게 불도에 귀의해서 알려고 애를 쓰는 분들이 계심으로써 부처님은 지금도 여전히 살아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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