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결실을 이루려면… > 길을 묻는 이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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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결실을 이루려면…

본문

질문

한 해의 수확을 의미하는 추석이 다가왔습니다. 풀포기 하나도 한 해 동안 피와 땀을 흘려서 맺은 결실을 대자연에 회향을 하는데 마음공부를 한다고 하는 저 자신은 정말 한 해 동안 한 게 하나도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스님께서는 자주 큰 나무들이 되어서 결실을 맺으라고 하시는데 어떻게 해야 마음의 결실을 이룰 수 있을까요? 어떻게 공부를 해 나가야 저의 내면의 근본과 상봉을 할 수 있을까요? 가을이 깊어갈수록 제 마음이 더 허전해지는 것만 같습니다. 

댓글목록

큰스님 말씀

관리자님의 댓글

관리자 작성일

우리가 생각하면 걸어온 발자취가 없듯이 우리가 지금 생활하고 가는 것이 듣는 것도 혼자가 아니고 또 보는 것도 혼자가 아니고, 말하는 것도 혼자가 아니고, 먹는 것도 혼자가 아니고, 만나는 것도 혼자가 아닙니다. 모두가 같이 더불어 돌아가는 이치죠. 여러분이 지금 이렇게 걸어왔지만, 내가 걸어왔다고 하지만 내가 걸어왔다고 내세울 게 없어요.

내가 항상 말씀드리죠? 몸속에 내 자생중생들이 많은 것이 다 나이기 때문에 내가 혼자 걸어온 게 없노라 하는 겁니다. 혼자 보는 것도 없고 혼자 듣는 것도 없습니다, 지금도. 그러니 내세울 게 어디 하나라도 있겠습니까? 그러면서도 외부의 모든 생활 자체도 혼자 사는 게 또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기에 모두가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의 이 세상만사가 다 공했다고 하는 겁니다. 보이면서도 보이지 않고 보이지 않으면서도 보이는 그 자체가 그대로입니다.

그래서 원칙은 영원한 것을 우리 자체가 모르기 때문에 즉, 50% 반쪽만 알기 때문에 우리는 ‘죽는다 산다’ 여기에도 무척 걸리는 모양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걸릴 게 하나도 없는 자체가 무엇인가 하면 우리 일체 만물만생이, 즉 말하자면 가다가 만나고 가다가 보고 가다가 듣고 할 때마다, 이런 게 있죠. 이건 비유하는 겁니다. 밥을 지어야 할 텐데 소켓이 맞지 않으면, 거기다 끼워도 맞지 않으면 불이 들어오질 못해서 밥을 못 지어 먹습니다. 그러니까 우리 마음이 모든 내 자생중생들을 다스리면서 화(化)하게 만들어야 바로 그게 화한 부처님의 마음과 내 마음이 둘이 아니어서 항상 소켓이 맞는 것입니다. 그래서 통신이 되는 것입니다.

일체제불의 마음은 항상 우리들의 마음과 직결이 돼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마음이, 즉 말하자면 주장자라고 하죠. 그런데 그걸 안테나라고 해도 됩니다. 내 마음의 안테나를 세워 놔야 일체제불의 마음이 내 마음을 통해서 불이 들어올 수가 있고, 즉 말하자면 만약에 소켓이 맞지 않는다면 불이 안 들어옵니다. 그래서 밥을 지어 먹을 수도 없습니다.

그런 까닭에 ‘우리는 꼭 내면의 나부터 알아야 한다.’ 하는 것은 뭐냐. 내 자생중생들을 남이라고 생각해서는 아니 됩니다. 과거로부터 자기가 악업 선업을 지은 자체, 근본의 표시입니다. 내 몸뚱이 속에 과거의 악업 선업이 다 들어 있고 또 지금 살면서 짓는 것은 미래의 선업 악업이, 미래에 올 것이 입력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과거에 지은 것은 지금 나오고 미래의 현실에 올 것은 자꾸 입력이 되는 것입니다. 과거에 입력된 게 연방 나오면서 연방 미래로 또 입력이 됩니다.

그러면 과거에서 오는 업식 그 자체가 어디서 일어나느냐. 내 마음속의 그 악업 선업의 중생들의 의식에서 다 나오는 겁니다. 그게 인연을 지은 거니까. 그래서 나오는 대로 거기다 놓으면 즉, 미래의 그 업을 지을 것도 없어지고 과거의 업 지은 것도 없어지는 까닭에 거기다, 모든 것은 한 구멍에서 나오는 거 한 구멍에다가 놓아라 이런 소립니다.

그 마음의 모든 것이 과거로부터 현실로 나오는 거니까 그 나오는 데다가 직접, 딴 데 바깥에다가 허우적거리지 말고 안에다가, 모든 것은 거기다가 놓고 맡기고 ‘너만이 이끌 수 있다. 너만이 아픈 거를 낫게 할 수 있다. 너만이 화목하게 할 수 있다. 너만이 깨치게 할 수 있다. 너만이 물리가 터지게 할 수 있다.’ 하고 관(觀)하는 것입니다. 육신과 정신과 둘입니까? 둘이 아닌 까닭에 너와 나와는 그렇게 할 수 있다라는 그 믿음! 그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해 주시오’가 아닙니다. ‘할 수 있다’이지.

그래서 이 깨달은 마음은 마음과 마음이 위에서부터 직결이 돼 있고, 아래서부터 가설이 돼 있기 때문에 항상 마음과 마음이 한데 찰나에 합쳤다가 찰나에 떨어지고 찰나에 합쳤다 찰나에 떨어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마음과 마음이 항상 둘이 아님을 뜻하면서 돌아가기 때문에 법좌(法座)를 낼 수가 있고 생산을 해낼 수가 있는 까닭에 바로 진짜 부처님이 되시는 겁니다. 만약에 그렇지 못할 때는 이 과거의 나와 현실의 나가 둘이 아니게 상봉이 돼야만 되지 과거의 나가 즉, 전의 조사(祖師)들은 부(父)라고 그랬습니다. 과거의 나가 바로 나의 조상이니까 ‘부’고, 현실의 나가 ‘자(子)’가 됩니다. 그래서 부와 자가 둘이 아니게 상봉할 때, 깨달을 때에 비로소 그 둘이 아닌 도리의 섭리를 알 수 있느니라 했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상봉함으로써 마음과 마음이 전체 주장자와 주장자가 둘이 아니게끔 찰나찰나 돌아갑니다. 그런데 그렇지 못하다면 말로 이론으로 떨어지니까 법이 될 수가 없고 법설이 될 수가 없고 한데 떨어지는 거죠. 그 음파가 한데 떨어지니까, 통신이 될 수가 없으니까, 성자가 날 수가 없죠. 그걸 성자가 날 수 있게끔 하는 건 생산해 내는 생산처가 돼야 된다는 얘깁니다. 내 마음, 마음 자체가 생산처가 되어서 바로 생산을 해낼 수 있는 그런 법좌가 돼야 된다 이런 말입니다.

내가 이런 말을 또 하고 또 하는 것은, 여러분이 큰 나무가 있으면 딱따구리가 그냥 덮어놓고 쪼죠. 쪼아서 나무가 뚫어지죠. 그렇듯이 여러분은 덮어놓고 무조건 내 큰 나무라고 해도 됩니다. 내 나무에 딱따구리가 쪼듯 그렇게 자문자답하면서 생활하면서 해 나가야 그대로 생활이 참선이며 생활선입니다. 우리가 마음이 편안해지면 바로 좌선입니다. 이 모두가 이렇게 참선을 할 때에 생활이 없는데 부처가 어딨겠습니까? 우리들이 없는데 또 부처가 어딨겠습니까? 우리들이 있으니까 부처가 있고 부처가 있으니까 우리들이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놓고 갈 때 비로소 딱따구리가 쪼아서 나무가 뚫어지듯, 뚫어져서 그 나무의 속이 텅 비게 됩니다. 그러면 자기가 그 속에 들어가서 집을 삼아서 차고 앉는다 이겁니다. 거기 앉아 있으면서 또 생산을 시키고 이렇게 할 수 있는 계기가 되죠. 우리가 깨달으면 생산을 해낼 수가 있고 깨닫지 못하면 생산을 못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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