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당장 숨이 끊어진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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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스님, 지금 당장 숨이 끊어진다면 어떻게 되나요? 그냥 무로 돌아가나요, 아니면 또다시 윤회를 하게 되나요? 그리고 가족의 인연은 어떻게 이루어지나요? 사이가 안 좋은 가족과 다음 생에 만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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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스님 말씀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여러분 몸속에, 예를 들어서 위 공장 한 곳에서만 파워가 일어나도 여러분의 몸은 쓰러집니다. 집이 쓰러지는 거예요. 그래서 여러분의 몸뚱이는 집과 같아서 관리인, 심부름꾼, 집합소, 생명들이 살 수 있는 바로 집합소밖에는 안 되기 때문에 그걸 이름 해서 여래의 집이라고 했습니다. 몸뚱이만 여래의 집이 아니라 전체 한데 합해서 돌아가는 걸 여래의 집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고걸 쪼그만 내 몸뚱이 하나로 축소해서 한번 보세요. 헤아릴 수도 없는 생명체들이 내 몸속에서 서로 더불어 같이 살고 있지 않은가. 더불어 같이 살고 있기 때문에 혼자 한 게 없고 혼자 먹는 게 없으니 아만통을 갖지 말고 ‘나’라는 걸 세우지 말라. 혼자 한 것도 없고 혼자 먹는 것도 없으니 모두 내세울 게 하나도 없느니라. 그리고 번뇌가 있다고 하더라도 더불어 같이 돌아가기 때문에 번뇌가 붙을 자리가 없다 이거예요. 병 붙을 자리도 없고 번뇌 붙을 자리도 없고, 한 것도 없고 안 한 것도 없다. 여러분이 여기 오기는 분명코 왔는데 발자취를 걸머질 게 하나도 없더라는 얘기죠. 그래서 여러분이 살기는 살아도 함이 없이 살았단 얘기죠. 이 세상을 살되 함이 없이 살고 있는 거다 이런 겁니다.
우리가 지금 죽는다고 하더라도 죽는 게 아니라 삶의 의식들이 끊어지는 겁니다. 끊어지고 그 원 근본과 자기의 입력된 영혼은 그냥 있는 겁니다. 그래서 그냥 있기 때문에 더하고 덜함이 없죠.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나게 되는 거죠.
그래서 차원이 그렇다면 우리가 죽으면 어떻게 되느냐 하면, 왜 이런 게 있죠. 깨라든가 콩이 심어져서 열매를 맺으면 그 콩 줄기나 잎은 다 죽어 버리고 씨만 나오죠. 씨 하나만 나온 것을 조금 쉬었다가는 그 이듬해 봄에 그 씨를 심으면 다시 그 싹이 나옵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도 죽으면 잠시 눈에 보이지 않았다가 그 차원의 종자가 다시 이 세상에 태어나게 되는 거죠. 지옥 천당이 따로 묶여져 있는 게 아니라 경찰서로 해서 법정에 들어가서 돌아서, 즉 차원대로 콩씨는 콩씨대로 심어져 나가고…, 아주 똑바로 얘기하자면 자기가 개같이 살았으면 개로 모습을 가지고 나올 거고 독사같이 살았으면 독사로 태어나기도 하고, 차원이 말입니다. 살았을 때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서 다시 모습을 쓰고 나올 때 그렇게 나온단 말입니다. 한번 바뀌어서 말입니다. 화해서 나오는 거죠. 그게 이해가 안 가시겠죠?
옛날에 이런 얘기가 있었죠. 사람이 죽으면 재를 곱게 해서 놓기도 하고 쌀을 곱게 해서 놓기도 하고 밀가루를 곱게 해서 놓기도 합니다. 그렇게 놓고 뭐가 됐나 하고 그 발자취를 보죠. 뱀이 지나간 자리가 있기도 하고 사람의 발자취가 있기도 하고 새의 발자취가 있기도 하고 두꺼비 발자취가 있기도 하고, 이렇게 여러 가지로 돼 있죠. 옛날에 저 어려서도 그렇게 하는 것들을 많이 봤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나’라는 거를 내세우고 모르는 사람을 깔보고 그러는데 내가 전자에, 과거에 몰랐을 때의 내 모습으로 보면 다 둥글게 쓸 수 있을 텐데 그냥 요 시대의 요것만 보기 때문에, 넓게 생각을 못하기 때문에 그대로 아주 저건 낮고 나는 높아지죠. 모두가 평등한데도 불구하고, 모두를 내 탓으로 돌리고 이렇게 해야 할 텐데도 불구하고요. 가정에서도 한 사람이 죽어서, 이 죽은 사람들이 모일 때 깡통은 깡통대로 모이고 금은 금방에 모이고 넝마는 넝마전에 모인다는 말을 내가 가끔 합니다.
여러분! 한 가족이 모여서 사는 것도 잘 생각하십시오. 이거는 꼭 알아야 할 일입니다. 깡통이 저런 데 버려져 있으면 깡통을 집어서 깡통 모인 데 갖다 놓지 깡통을 집어서 금방으로 디밀진 않습니다. 안 그럴까요? 그리고 이 세상 돌아가는 걸 가만히 보세요. 배나 사과도 큰 거는 큰 것대로 작은 거는 작은 것대로 골라 놓고, 금은 아무리 하치않은 금이라도 금방으로 갈 것이고, 넝마는 넝마전으로 갈 것이고, 깡통은 깡통전으로 갈 것이고, 무쇠는 무쇠대로 무쇠전으로 갈 것이고, 사람이 사는 법도에서도 정치인은 정치인대로 모이고, 스스로 자동적으로 말입니다. 교수는 교수대로 모일 거고 기사는 기사대로 모이고, 안 그렇습니까? 그거 몇 마디만 해도 아시겠죠?
그렇게 끼리끼리 모이듯이 한 가정을 이룬다 하더라도 우연은 하나도 없습니다. 끼리끼리 모여서 살게 마련이거든요. 자동적으로 그렇게 끼리끼리 모이게 돼 있어요. 그런데 부부지간이나 부모자식지간이나 네가 잘했느니 내가 잘했느니, 네가 잘났느니 내가 잘났느니 이렇게 모두 각각 놀기 때문에 화목하지 못하고 불화가 일어나고, 불화가 일어나면 자식들은 그걸 배우고 그걸 따라가게 돼 있고, 은연중에 부모가 하는 대로 따라가게 돼 있습니다. 그러니 한 깡통이 부슬거린다고 이 깡통이 저쪽 깡통을 “너는 깡통이 돼서 그래!” 그러고 나무랄 수 있겠습니까. 자기도 깡통인데요.
그래서 잘 살고 또 마음의 발전을 이루어서 자유인이 되려면 자식을 원망하지도 말고 부모를 원망하지도 말고 부부지간에 각자 서로를 원망하지도 마시라 이겁니다. 모두가 끼리끼리 차원대로, 5차원이면 5차원대로 만나고 1차원이면 1차원대로 만났으니까 말입니다. 그래서 ‘자기가 이렇게 이 세상에 나왔으니까 상대가 생겼고 상대가 생겼으니까 말썽이 생긴 거지 내가 이 세상에 나오지 않았다면 말썽이 어디 있겠는가. 상대가 어디 있겠는가. 세상이 벌어진 줄 어떻게 알았겠는가. 부처님이 계신 줄 알았겠는가. 죽고 사는 걸, 생사의 모든 거를 알았겠는가. 아무것도 몰랐을 거다. 내가 이 세상에 있으니까 모두를 잘 알게 됐다.’ 하는 거죠.
그러니 내가 이 세상에 나서 이 모두를 보고 배우니 일체 만물만생이 다 스승 아님이 하나도 없다 하는 거를 생각해 보십시오. 길을 가다가 거룩한 나무가 한 그루 섰을 때에 내가 그걸 보고 좋아하면서 ‘아하, 저것 참 묘하게 생겼는데….’ 하고 쳐다볼 때에 그것도 스승인 것입니다. 발부리가 돌에 차여 발부리가 아파서 ‘아이고, 아파.’ 하고 있을 때에 바로 내가 있기 때문에 돌부리에 차인 거고 돌부리에 차였기 때문에 아픈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도 또한 스승인 것입니다. 이 세상에 스승 아닌 게 하나도 없어요. 그런데 원망을 해요? 그런데 번연히 자기가 잘못한 줄 알면서도 내가 ‘나’라고 세우고 이렇게 하니까 부처님께서 “모든 일을 네 탓으로 알고 네 모습으로 보고 네 아픔으로 보고, 네 부모로 보고 네 자식으로 보고 네 형제로 봐라. 그렇다면 수억겁을 미생물에서부터 거쳐서 진화돼서 사람까지 된 그 역사를 알 수 있느니라.” 하셨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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