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음은 어떤 마음인지요?
본문
질문
불교가 목표로 하는 것은 인간 문제의 해결, 구체적으로 말하면 인간 고(苦)의 해결이다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이 어떠한 존재인가를 알게 하기 위해서 초기 경전에서 오온, 십이처, 십팔계의 진리를 설하셨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일체 법의 참된 모습을 확실하게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것에 집착하고, 집착함으로써 그것이 변하거나 사라질 때 괴로워하게 되는 것이기에 물질과 정신이 모두 실체가 아니라는 것을 설명하고 계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의문이 생깁니다. 스님께서 그토록 강조하시는 한마음은 과연 어떤 마음인지요
댓글목록
큰스님 말씀
한마음이라는 그 뜻은 열반으로 들어가는 길이며, 자유인이 되는 길이며 해탈을 말합니다.
여러분이 너무 잘 아시는 사대(四大)에 대해서 말입니다, 색(色)은 사대라고 하고 수상행식(受想行識)은 바로 정신 내용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 정신 내용, 수상행식 그 자체가 사대하고 같이 합쳐지니까 몸과 마음을 말합니다. 그 몸과 마음은 어디에 또 상대가 있느냐는 얘기죠. 눈이나 귀나 코나 혀나 몸이나 의식 자체, 여섯 가지가 거기에 대두되는 거죠. 요거를 말씀해 놓고 내가 얘기할 게 있습니다. 거기서 대두되는 것이 뭐냐 하면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이 대두가 됩니다. 그 다음에 뭐가 또 대두가 되느냐 하면, 즉 말하자면 육식(六識)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은 시각이나 청각이나 후각·미각·촉각, 의식 자체 여섯 가지가 대두가 됩니다.
그런데 이것을 말로만, 이론적으로만 나누어서 생각하지 마시고 한번 제 얘길 들어 보시렵니까. 그게 네 가지입니다. 네 가지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네 가지 따로 있는 게 아니라. 그렇다면 우리가 개수가 없는 개수를 한번…, 숫자 없는 숫자요. ‘하나’ 하면 ‘몸’과, ‘몸’ 그러면 ‘하나’ 이렇게 합니다. 하나라고 치면 육근(六根), ‘둘’ 이럽니다. 내용적으로는 사대(四大)의 그 물질과 사람의 마음이니깐요. ‘하나, 둘’ 하면 이 하나는 과거로 벌써 돌아갔습니다. 예? ‘하나’ 하는 게 벌써 이 몸과 마음은 벌써 과거로 돌아가서, 즉 말하자면 절대적인 요소가 되는 거죠, 이 육근의. 안 그럴까요? 그래서 ‘둘’ 할 때 육근으로 와서, 벌써 이 하나는 둘에 포함이 되니까 하나는 없어지고 이게 하나가 되는 겁니다. 예? 아시겠습니까? 둘 하는 게 둘이 아니라 하나가 되는 겁니다. 상대성이 절대성으로 들어오니깐 말입니다. 그래서 이게 도로 하나가 됩니다.
그래서 육진(六塵)이라고도 하고 육경(六境)이라고도 합니다만 육진으로 다시 들면 그냥 셋이 됩니다. 그런데 둘이 또 없어집니다. 둘이라는 언어가 없어지면서 셋으로 갑니다. 셋으로 가는데 이 셋은 또 하나입니다. 여러분이 이 도리를 아셔야 납득이 돼서 결정적으로 들어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것도 하납니다. 육식(六識), 육식으로써 이것을 다시금 혼합을 한다면 십팔계가 되면서 이것도 하나입니다.
그래서 이게 한데 합쳐서 십팔계라고 했는데 십팔계는 무엇을 가지고 그러느냐 이런 겁니다. 십(十)은 언제나 여여하게 돌아가는 그대로를 말하는 겁니다. 팔(八)은 사무사유(四無四有)를 한데 합친 것을 말하죠. 여러분이 다 마음이 있죠. 여러분이 있으니까 있는 거지요, 불성이라는 그 자체가, 불(佛)이라는 자체가. 그것은 항상 움죽거리지 않기 때문에 십팔(十八) 하면 벌써 십구(十九)가 되는 겁니다. 하나가 언제나 거기 우뚝 서는 거죠. 그래서 사무사유가, 즉 말하자면 한데 합쳐서 팔로서 팔법륜(八法輪)으로서 그냥 돌아갑니다. 그게 우리 생활입니다. 십은 진리라고 하면 우리가 응용하는 이 중용은 바로 팔이죠. 이걸 그냥 납득할 수 있게 해 드리고 싶어서 그냥 내 의견대로 말씀드리는 겁니다.
그러면 이것을 완전히 벗어난다면 바로 벗어나는 그 자체가, 하나 없는 하나가 그냥 한마음입니다, 한마음. 하나라는 것도 세울 게 없기 때문에 그냥 한마음입니다. 대략 짐작하시겠습니까? 그래서 요걸 비유하건대 만약에 몸과 마음이 솥이라면 바로 거기에는 쌀도 있고 물도 있고 불도 있습니다. 요 네 가지를 또 한 번 표현해 보죠. 그런데 쌀을 씻어서 솥에 넣습니다. 물을 붓습니다. 불을 올립니다. 그러면 요것이 밥이 되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가 밥을 먹게 되죠? 그렇죠?
그래서 그 육식(六識)의 깊은 속에까지도 우리가 들어가서 굴러 나와야 밥을 먹을 수가 있다 이겁니다. 우리가 아무리 씻어 넣고 이거니 저거니 하고 이론으로 따져도 스위치를 꽂아서 밥을 다 익히지 않는다면 우리 입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그와 같습니다.
그래서 묵조선이니 간화선이니 하는 것도 그게 둘이 아니건만 불 질러서 밥을 하는 과정과 딱 먹는 거와 혼합이 돼서 하나기 때문에 이것저것 따지지 말자 이겁니다, 싸우지 말고. 과정을 다 해서 솥에 넣고 스위치 딱 누르면 밥이 되는 그런 거하고 또 갖다 씻어 넣는 과정하고 뭐가 다릅니까, 예? 그러니까 지금 밥을 해서 먹는다, 불이다, 그런다면 우리가 솥에 그냥 하나 갖다 넣으니깐 또 하나 줄어들고, 하나 갖다 넣으니까 또 하나 줄어들고 다 넣고는 불 꽂으니깐 다 먹는다. 이것을 지금 배우는 겁니다.
스위치 꽂아서 밥 해서 그냥 먹는 걸 배우는 겁니다. 그 과정은 여러분이 더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그 과정을 얘기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안 하고자 하는 것도 아니라 모든 분들이 다 알고 있는 사실이기 때문에 거기다 그냥 넣었으면, 한 솥 넣었으면 그냥 불 꽂아서 해 먹는 거를 우리가 배우자 하는 것입니다.
우린 공부할 수 있는 시기가 있고 바쁩니다. 우리 몸뚱이가 살아 있을 때에 이 뜻을 모른다면 천년만년 가도 이 윤회에서 벗어날 수는 없는 겁니다. 고(苦)에서 벗어날 수가 없는 겁니다. 배가 고파도 밥을 먹을 수가 없습니다. 그와 같습니다.
그런 거와 같이 우리가 하나 넣어도 하나요, 하나를 또 넣어도 하나요, 그래서 한 솥을 밥을 해 놓고 먹어도 그 하나마저도 없더라. 모두 나눠서 먹으니까 말입니다. 그 하나마저도 없더라. 그리고 또 갖다 넣은 것도 여러 가지 재료가 같이 들어갔는데 어떻게 불만이, 불만이 나라고 할 수 있겠느냐 이런 뜻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불이 나다’ 할 수가 없이 그것이 바로 한마음이요, 그 한마음마저도 집착을 하지 마라. 이거 될 때에 너라고 할 수도 없고, 쌀이 될 때 너라고 할 수도 없고, 불이 될 때 너라고 할 수도 없고, 솥이 될 때 너라고 할 수도 없다. 그러니까 한마음의 찰나 생활이 그대로 역력히 돌아가고 있으니 여러분이 그대로 자유스럽게 해 나갈 수 있는 그런 능력을 기르시라 이런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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