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높은 차원으로 등장하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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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티벳 사자의 서라는 책을 보면 우리가 사후에 보게 되는 그 모든 빛들과 신들의 세계가 사실은 우리 자신의 마음에서 투영된 환영에 불과하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지금 우리가 하는 이 마음공부가 산 세상뿐 아니라 죽은 세상에서도 벗어나는 길이라는 확신이 듭니다. 그렇지만 조금 무섭기도 합니다. 내가 만약에 한 차원 넘어선다면 좋을 텐데 마음의 중심을 놓쳐서 낮은 차원으로 떨어지면 어쩌나 하는 불안한 마음이 들어서요. 스님, 어떻게 마음을 내고 공부해 나가야 사후에 더 높은 차원으로 등장할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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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스님 말씀
내가 만약에 여러분한테 들은 글귀로만 이렇게 얘기를 한다면, 이 말 자체가 모두 한데로 떨어질 것입니다. 나는 거짓을 안 합니다. 한마디라도 내가 실험하고 체험하지 않고 하는 얘기는 없습니다. 알고 본다면 한마디도 한 게 없고, 한마디도 한 게 없는가 하면 한생각 한 것도 없고 한 행동 한 것도 없습니다. 이것을 여러분이 잘 터득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기독교나 가톨릭교나 불교나, ‘아제 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하죠? 저 언덕을 넘어서 만납시다, 또는 요단강을 건너서 만납시다 이러죠? 저편 언덕 뒤에는 항상 밝음이 있고 항상 생수가 있으니 그걸 없다고는 못하죠. 끝없는 밝음이 있기 때문에 컴컴하다 밝다 이런 언어도 붙지 않는 자리가 있노라고 말할 수 있겠죠.
그런데 여러분은 이 물질세계에 끄달리다 보니까 어떻게 되느냐. 세 마디로 규정을 짓겠습니다. 하나는 만약에 큰 독사가 여기에 있다고 합시다. 또 거위가 지렁이로 변해서 아주 커다랗게 돼 가지고 곤충이나 세균이 전부 나와서 그냥 늘비하게 있다고 합시다. 또 거기 들어가면 머릴 풀어 산발한 귀신들이 있다 합시다. 그렇다면 의식적으로 벌써 ‘어이쿠!’ 하겠죠? 거기 들어가겠습니까? 내 마음이 체가 없다는 사실을 모르고, 독사한테 물리면 죽는다, 안기면 맞아 죽는다, 또는 귀신한테 말려 죽는다 그럴 겁니다. 모두 징그럽게만 보이고 똥통의 구더기는 그냥 여지없이 크게 보이고, 내 이 사대(四大)가 다 흩어져서 원점으로 돌아가도 내가 배우지 못한 영혼이라면 그냥 거길 못 건너갑니다, 일차적으로.
그럼 이차적은 뭐냐? 기독교 가톨릭교에서는 ‘요단강 건너가 만나리.’했습니다. 불교에서는 ‘강을 건너 저 언덕에서 우리 같이 한자리를 하고 만납시다.’ 했습니다. 그랬는데 이게 물질세계의 의식이 꽉 차 있기 때문에 이 도리를 모르면 자기가 그냥 몸이 있는 줄 알아요. 그래서 배가 오기를 기다리니 오백 생을 기다린다 할지라도 배가 옵니까? 내 의식이 저 강에 들어가면 물이 깊어서 빠져 죽는다고 알고 있기 때문에, 배가 오지 않으면 도저히 건너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한생각 끄떡 하면 찰나에 갈 것을 그렇게 기다리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 그게 두 번째입니다.
세 번째, 지금 과학적으로 본다면 블랙홀이라고 한다지만, 부처님께서는 불바퀴라고 했습니다. 그 불바퀴가 세 번째 단계의 통로입니다. 그런데 그 통로를 넘지 못하는 것은 의식적으로 벌써 중생들은 거기를 넘어갈 때 타 죽을까 봐 뜨거워서 못 들어갑니다. 벌써 내가 물질세계에서의 그 의식이 꽉 차 있기 때문에, 내가 몸이 있는 줄 알기 때문에 못 들어갑니다. ‘나 아닌 나’는 없습니다. 그래서 그게 통로인데도 뜨거워서 죽을 이유도 없고 뜨거울 이유도 없고, 간다 온다 할 까닭도 없고, 어딜 들어간다 하더라도 들어가는 사이가 없고, 나온다 하더라도 나오는 사이가 없건만, 그대로 여여하게 뚫리고 그대로 여여하건만 몸이 있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못 들어간다는 얘깁니다.
그것은 첫번에 벌써 내 이 몸속에 있는 그 의식들이 전부 모습을 그렇게 해 가지고 보이니 그 길을 못 간다는 얘기죠. 그게 딴 데서 와서 보이는 게 아닙니다. 이 몸뚱이가 사대로 흩어지니까 내 몸속에서 그 영혼들이 말입니다, 그 의식들이 그냥 쫙 앞을 가리고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그러한 것이 딱 보일 때 중심을 잡고서 ‘허, 너와 나와 둘이 아닌데….’ 하고서 딱 한생각을 넘기면 그냥 다 보살로 화하고 부처로 화할 텐데, 이건 한생각을 못하기 때문에 그냥 넘질 못하죠. 재차 말하지만 빠져 죽을까 봐 넘지 못하고, 배를 기다리고 있는가 하면, 타 죽을까 봐 그 불바퀴 속을 못 들어간다 이겁니다. 그러니 그 도리밖에 없거든요. 우리의 이 마음, 내 마음 빼놓고는 부처를 이룰 수가 없고 내 마음 빼놓고는 도저히 앞뒤 뚫린 용문을 열 수가 없습니다. 본래는 여여하고 열려 있는데 자기 생각이 딱 닫아 놓고 있으니까 말입니다.
그리고 하나에서부터 열까지 나는 나고 너는 너고, 미운 걸 보면 그렇게 밉고, 잘못하는 걸 보면 그렇게 보기 싫고, 또 부부지간도 그렇고 자식지간도 그렇고 일일이 그거를 미워해요, 잘못하는 걸 보면. 그러나 예쁜 일을 조금 할 때는 좋아서 그냥 발발발발 하고, 누가 좋은 말을 해 주면 좋고, 속이야 어떻게 됐든지 좋은 말을 야불야불 해 주면 아주 좋아하고, 진실로 ‘너는 이렇다’ 지적을 해 주면 그게 듣기 싫어서 왈칵 화가 나고, ‘너 두고 보자’ 이러고 말입니다. 이러는 마음이 자기를 깎아먹게 돼요. 이 세상은 내가 없으면 아무것도 없어요. 내가 있으니깐 모두 내 탓으로 돌리라는 거죠. 그래야만이 내가 공해서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될 테니까요.
불(佛)은 뭐냐. 불바퀴는 왜 불바퀴라고 그랬느냐. 그냥 생명만 있는 게 아니라 그 생명이 바로 영원하기 때문에 불바퀴라고 했습니다. 불이라고 한 것은 여러분의 생명의 근본, 즉 말하자면 영원한 생명의 근본, 그걸 불이라고 했다 이겁니다. 본래 자성불은 있는 건데, 자기 자성불에서 모든 거를, 나고 드는 것이 전부 그 능력으로 나오는 건데도 불구하고 자기 자성불은 믿지 않고 저기 계신 딴 부처님을 믿고선 ‘부처님! 날 좀 잘되게 해 주시오.’ 하는데 그건 기복이지 공덕이 아니에요. 공덕이라는 건 무엇 때문에 공덕인가. 한마음으로 돌아가야 공덕이 아닌가. 나 아님이 없으니까 내가 하지 않는 일이 없고, 내 아픔 아닌 것이 없고 내 몸 아닌 것이 없는데 어찌 그게 공덕이 안되겠나. 일체제불과 일체 보살, 역대 조사가, 역대 중생이 진드기 하나 버리지 않고 전부 한마음으로 돌아가는 것을….
그래서 그 한마음마저 없다는 사실은 한마음이 고정되게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죠. 부처님께서 한마음을 내실 때에 보살로서 화해서, 법신으로 화하시고 그래서 남이 응해 달라는 대로 응해 주시는, 한마음이 돼 주시는 그 마음 말입니다. 그러니 만약에 큰 호랑이가, 큰 소가, 큰 코끼리가 또는 독사라는 이름을 가졌어도, 어떤 사람이 백정 노릇을 했다 할지라도 그 마음이 아! 부처님한테 귀의해서 내 마음 가운데 항상 넣고 끊어지지 않는 그 마음이면 그대로 한마음이죠.
그러니 여러분이 일을 할 적에나 똥을 눌 때나 잠을 잘 때나 일어설 때나 앉을 때나, 바로 내 부처가 내 마음 속에 있는 한마음의 그 주인공이라고 생각할 때, 뭐든지 거기다 놓고 갈 때, 모든 걸 놓고 아주 잔잔하게 한데 한생각을 일으키면 그게 법이 된다 이 소립니다. 그렇게 하면 일체제불이, 일체 보살이, 일체 조사가 다 그냥 한마음으로 들어서, 한 찰나에 드셔서 그 묘법을 가르쳐 주시고 한 찰나에 나신다 이거예요.
이 묘한 도리를, 이 무심도법(無心道法)을 여러분이 그렇게 갑자기, 도심으로써 열심히 하지도 않는데 어떻게 터득하실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아는 것은 아마 나보다도 여러분이 더 잘 아시리라고 믿습니다. 알기만 하면 뭘 합니까? 행하는 게 문제죠. 백 가지 천 가지를 안다 하더라도 한 가지 행을 못한다면, 그건 한 가지 행하는 것만도 못합니다.
사람은 죽는다고 끝나는 게 아닙니다. 모습을 바꿀 때는 하나도 없이, 실오라기 하나 걸칠 게 없이 다 놓고 갑니다. 하나도 가지고 가는 게 없습니다. 재물이나 보물은 방에서 인사를 하고 헤어지고, 집이 아무리 좋아도 대문 안에서 인사를 할 것이고, 친척 부부 지간이나 아무리 좋은 친구다 할지라도 동구 바깥에서 인사를 할 겁니다. 그러나 내가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서 그 업식은 그림자처럼 따라갈 것입니다.
그러니 그 업식을 짊어지고 이 세상에 다시 나오게 된다면 그 고초는 면할 길이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죽으면 그만이지 하지 마시고 꼭 알아둬야 되겠습니다. 우리는 차원을 높여서 꼭 진실로써 한 걸음 한 걸음, 조그맣지만 한 걸음 한 걸음 떼 놓을 때에 진실한 실천궁행이 되도록 이렇게 나아가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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