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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식에 대한 애착이 커서

본문

질문

안녕하세요? 예전에 제가 자식을 갖기 전에는 자기 자식을 너무 과잉보호 하는 사람들을 보면 참 왜 그럴까 싶었는데 제가 이제 그렇게 살고 있습니다. 자식에게 거는 기대가 크다 보니 자꾸 충돌도 일어나게 되고요. 어느 새 내 뜻대로 자식이 따라 주길 바라게 됐나 봅니다. 자식에 대한 이런 애착을 두면 안 되겠죠? 

댓글목록

큰스님 말씀

관리자님의 댓글

관리자 작성일

애착을 두지 말라는 거는, 부모한테도 그렇게 애착을 두지 말고 효도를 하라고 그랬습니다. 그건 자식이나 부모나 또는 남이나 똑같이 항상 남을 이익 하게 할 수 있는 마음을 갖고, 겸손할 줄 알고, 마음으로 고개 숙일 줄 알고, 이렇게 살면 누구한테든 인과응보라는 그런 소리조차 없을 것이고 또는 자식과 부모지간에 다시 만난다 할지라도 금끼리 만나고 이렇게 된다 이 소립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전생에 무슨 죄가 있어서 이렇게 내가 고생을 하고, 이렇게 받아야 하고, 이렇게 아파야 하나 이러지만 그것이 애당초부터 자식이 자식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서로가 서로의 인연에 따라서, 인과응보에 따라서 만났기 때문에 그 고통을 면치 못하고 애를 쓰고 이렇게 살아나가는 거죠. 그렇다면 그런 대로 우리가 지금 살아 있을 때 이 도리를 알고 배워야, 지금 살아 있을 때의 그 애착과 모든 걸 다 몰락 버리고서, 애착을 두지 않고 욕심도 두지 않고 내가 한생각 전부 놨을 때 죽어서도 그것은 시공이 없는 그 대공의 한자리를 할 수 있다 이 소립니다. 끄달리지 않고. 우리가 윤회에 말리는 것도 억 겁을 거쳐서 말리지만 우리가 한생각 돌려서 이 도리를 몰락 놔 버리고 안다면 영원토록 또 말리지 않고 끄달리지 않고 영원히 살 수 있습니다.

예전에 내가 산으로 돌아다닐 때 빨치산으로 붙들렸거든요. 그러니 어디 가서 죽은 줄 알았는데, 어머니가 조회를 했나 봅니다. 조회를 해서 산으로 찾아온 거죠. 그런데 보니깐 부모는 부모이기 때문에 참, 그 마음은 어디다가 다 할 수가 없어서, 나는 사람 같지도 않으니까 어머니가 그 자리에 펄떡 주저앉으시면서 그만 몸을 못 쓰게 돼 버렸던 모양입니다. 얼마나 충격을 받았으면 그렇게 됐겠습니까. 그런데 나는 또 몸을 못 쓰고 뭐고 그런 건 아랑곳없이 거기에서 그냥 “어머니! 어머니의 진짜 자식이라면 요다음에 다시 내가 사람이 돼서 올 것이고 어머니의 자식이 아니라면, 진짜 사람이 못된다면, 다시는 어머니 앞에 나타나지 않을 겁니다. 자식이라고 생각하지 마시고, 아주 애착을 떼 버리시고 죽었다고 생각을 하십시오.” 하고 떠났거든요.

떠날 때에 어머니가 좋은 옷을 두 벌을 가져왔는데, 바지가 이게 다 떨어지고 그랬으니까 말입니다. 그런데 그 몸에다가 그 옷을 걸치면 뭘 하겠습니까. 아니, 말도 못하게 찢어지고 피가 나고 딱지가 앉고 사람 같지도 않은 데다가 그 옷을 입으면 뭘 하겠어요? 그래서 가다가 그 좋은 옷은 또 딴 사람 주고 이러고는 한 산모퉁이로 돌아섰을 때 가랑잎이 자욱자욱 밟히더라고요. 그 소리가 요란하게 나면서 나를 울리는 겁니다.

그러면서 나도 모르게 하염없이 눈물이 흐르는 거예요. 이렇게 덧없는 인간의 이 모습의 그림자를 보시고 저렇게 쓰러지셨으니 눈물이 너무나 쏟아지는 거예요. 이것마저도 보이지 않으려고 했던 건데 이렇게 보이게 됐다는 것이 너무나 마음이 아파서 나는 몸둘 바를 몰랐습니다. 하지만 그냥 돌아섰어요.

그런 예가 있듯이, 진짜 자식이라면 금과 금이 마주 있을 때에 금은 둘이 아닌 겁니다. 금은 금이기 때문이죠. 근데 뭘 애착을 갖고 그럽니까. 다시금 이 세상에 나왔으면, 그 모습을 한 번 만났으면 헤어지는 일이 틀림없을 텐데, 헤어졌다 만났다 헤어졌다 만났다 반복하는 이 시점에서 무엇을 내 자식이라 하고 무엇을 내 부모라고 하겠습니까. 그저 내가 뿌린 거니까 내가 해결을 해야겠으니 착이 없이 그대로 이익 하게 시봉을 하는 거지요. 나는 예전에 아주 못생긴 소나무를 봐도 “아이, 너도 나와 같이 못생겼구나. 이 위의 순을 자르면 넌 모가지까지 달아나가니 너하고 나하고 만난 인연도 인연이니 우리 같이 살아 보자.” 하고 맨 밑바닥에 달린 그것을 소나무 가지로 꺾어서 그 잎을 씹어 가면서, 또는 그 대를 씹어 가면서 물을 마시고, 그런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나는 내 양심에 부끄럽진 않습니다. 내 생각으로 누구를 해치려고 생각을 한 번도 해 본 예가 없으니까 말입니다. 그러면서도 이건 끊임없이 돌아가기 때문에 ‘오늘 저녁에 간다 하더라도 실과나무는 오늘 저녁까지는 심어야 한다.’ 이런 게 투철하죠. 착이 없으면서 그대로 하는 겁니다.

그러니 인과응보로서, 유전성으로서 그건 그대로, 과보대로 그냥 가는 거죠. 그러니까 막지 말라 이거예요. 애를 쓰고 괴롭게 살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도 괴로울 게 없습니다. 이 세상에 살면서 뭐가 그렇게 괴로울 게 있습니까? 다 우리가 해 놓고서, 자기 자신들이 해 놓고서 그렇게 된 거니까 이제부터라도 알고 착을 탁, 끊어서 놔 버려라 이겁니다. 내 마음의 주처가 있듯이, 그 인연된 사람들의 마음의 주처도 엄연히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가 자기 못되게 하진 않아요, 절대로요. 그러니까 놔 버려라 이겁니다.

누구든지 발등에 불이 떨어져 보세요. 어미 아비 생각 하고 자식 생각 할 사이가 없이 그냥 뛰죠. 자기 살 구멍은 다 찾습니다. 그런데 왜 애를 써야 합니까? 애를 쓸 필요 하나도 없어요. 우리가 만남이 이 짚단을 이렇게 한데 붙여놨다가 헤어질 때 되면 훌훌 헤어지는 거나 마찬가지예요. 근데 왜 애를 씁니까. 언제 적의 부모 자식이며 언제 적의 부부였고, 언제 적의 한 식구였습니까.

예를 들어서 이런 게 있어요. 부모가 “넌 이리로 가는 게 좋을 것 같다.” 이랬다 한다면 자식은 “난 이리로 가는 게 좋겠소.” 그럴 때에 이 부모가 생각할 때 ‘아이, 이리로 가면 안 되는데….’ 하는 생각이 든다 이겁니다.  그럴 때에 자식은 부득이 이리로 가겠대요. 예를 들어 얘기예요. 그러면 “아!  네가 그리로 가는 것이 옳다. 그리로 간다 할지라도 부처와 중생은 둘이 아니니까 항상 가는 대로 길을 네가 찾아가면 되니까.” 하고 하나도 애를 쓸 필요가 없어요. 떨어졌다 붙었다 이래도 애를 쓸 필요가 없어요. 언젠가는 자기가 찾아 자기가 가게 돼 있습니다. 부처님께서도  뒷받침을 그렇게 해 주고 원하는 자에게 마다 안 하시고 중생들에게 해 주셨죠. 지금까지도 해 주고 계십니다. 여러분의 마음이 있는 이상 부처님은 항시 살아 계시니까요. 아주 꽉 차 계십니다.

그러니까 결론적으로 다시 한 번 말씀드리자면, 사실 우리 인생이라는 게 시한부 인생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예전에는 학교 학생들이 공기 가지고 놀지 않았습니까. 또 자치기도 하고 손으로 이렇게 꼽아서들 하고 놀잖아요. 잠시 잠깐 그렇게 와서 놀다가 종 땡땡 치면 그냥 쓱쓱 지워 버리고 그냥 들어가잖아요? 우리가 소꿉장난하다가도 그냥 그렇게 집으로 들어가듯이, 그냥 “아무개야!” 부르면 “예!” 그러고선 다 지워 버리고 들어가듯이, 우리 인생이 그런 인생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애착을 둘 게 뭐가 있어요? 그냥 내던져라 이겁니다. 그렇게 바로 움쭉을 안 하는 그 마음이 돼야만이 자기 마음대로 자유자재한다 이 소립니다. 잠시잠깐 캠핑 나왔다가 집으로 돌아가면 그 뿐이라는 것을 아신다면 부모 자식이라 할지라도 집착하지 않고 그런 마음들도 자기 마음 중심에 항상 놓아 가면서 살아야 함을 알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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