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생활이 그냥 참선이라 하시니… > 길을 묻는 이에게

길을 묻는 이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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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스님 법문 중에서 발췌하여 답을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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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생활이 그냥 참선이라 하시니…

본문

질문

예로부터 보통 공부를 하는 스님들은 어떤 선지식을 찾아다니거나 화두를 받아서 공부하거나 선방에서 공부하거나 다양하게 공부하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만 저희같이 생업에 쫓기는 사람들은 그렇게 공부하기가 참 힘듭니다. 그러나 스님께서는 일상생활이 그냥 참선이라고 하시니 너무나 반가운 소식이 아닐 수 없습니다. 짧게나마 가르침 부탁드립니다 

댓글목록

큰스님 말씀

관리자님의 댓글

관리자 작성일

지금 부처님이 가르치는 뜻은, 일상생활이 그냥 참선이라고 하는 뜻은 시공을 쫓아가는 게 아닙니다. 시공이라는 언어도 붙질 않죠. 자유스러운 겁니다. 그대로 자유스러운 거예요. 우리는 내 몸에도 법망이 있고, 지구에도 법망이 있고, 우주에도 법망이 있어서 내가 한 생각을 내면은, 하여튼 누구 욕을 했다 할지라도, 누구 원망을 했다 할지라도 그건 습에 의해서 그게 업보예요. 다른 게 업보가 아닙니다. 나는 업보 지은 예가 없다고 하는데 그 지은 예가 없다고 하는 그 자체가 업보예요. 모든 사람들이 그러면 다 맡겨 놔라 하면은 “맡겨 놓고 인간이 어떻게 삽니까?” 하거든요. 그러면 어떻게 사는 거까지 놔야 돼요. 그렇게 모두 맡겨 놓는다면 그것은 대의의 무주상으로 돌아가는 겁니다. 자기 중생을 무주상으로 돌리지 못한다면 남도 무주상으로 돌릴 수가 없어요. 내가 무주상으로 돌려야 남도 무주상으로 돌림으로써 공덕이 양면에 다 이익이 가는 것입니다. 내가 내 몸을 공으로서 즉, 공덕으로 돌리질 못하는데 어떻게 남을 공덕으로 돌릴 수 있겠습니까. 이것이 모두 상대성 원리면서도 한 점의 도리입니다. 한마음의 도리.
 
옛날에 인도에서나 중국에서나 그 많은 선지식들이 났어도, 또는 우리 조선에서도 많이 선지식들이 났어도 모두 사람들이 마음으로 높은 데만 생각하기 때문에 찾지 못하는 겁니다. 아주 턱 밑에다가, 못났든 잘났든 자기 턱 밑에 있는 거를 불구해 놓고 먼 데서, 먼 데서 전자의 선지식들이 선맥을 이어서 그렇게 훌륭했다는 거를 스승으로 삼고 화두를 쥐고 나가니까 허, 자기 그 법망도 해결 못하는 거죠. 그러니 십 년, 이십 년, 삼십 년, 백 년이 간들 무슨 소용이 있으며 아니, 억 년이 간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리고 인도에서나 중국에서 하던 것을 그대로 그때의 시절에, 그때의 상황에, 그때의 방편으로서 했던 그 방편을 지금 시대에까지 끌어내려서 똑같이 이것을 해 나간다면 그것은 앞으로 길잡이의 뜻이 그릇돼 돌아가는 겁니다. 우리 스님네들은 그 티끌 같은 불씨로서의 전 우주를 비추면서 길을 인도해야 하는 의무를 갖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도 그것을 아예 생각으로서 어떠한 스승이 나 이외에 또 있는 줄 알고 생각한단 말입니다.
 
그러니 아주 위대하고 그런 걸 생각을 하다 보니까 아, 자기 콩씨도 못 찾는 거죠. 자기 콩씨를 못 찾으면 남의 콩씨를 어떻게 봅니까. 어떻게 찾고. 자기 콩씨로 인해서 콩씨가 한데 모이는 법인데. 콩씨로 인해서 한자리에 콩씨가 담기는 법인데, 한 그릇에. 콩나무로서 콩씨를 못 본다면은, 콩씨가 없다면은 아예 한 그릇에 담기지도 못할 거 아닙니까. 작년 콩씨 찾다가 올 콩씨 한 그릇에 들어갈 수도 없는 거죠. 그 콩씨라는 것은 언제나 유생 무생을 다 먹이고도 그 콩씨 하나는 되남아요, 항상. 이 도리를 우리는 넓혀서 우리 선정에 의해서, 모든 것을 선정에서 나오는 거 선정에다 맡겨 놓는다고 하면 믿는 것에 의의가 있다 이겁니다. 믿어라 이거예요. 믿고 자기 몸이 자기 마음을 다스리고 자기 마음이 몸을 다스려요.
그렇게 해 가면서 그것은 한생각에서 나오는 거니까 둘이 아니라는 그 공한 도리를 안다면 바로 거기에서 즉시 또 지혜의 무기로써 모든 것을 해 나가면서 체험하면서 보림하는 것, 그것이 우리가 바로 공부해 들어가는 일이요, 또한 우리가 평상시에 그대로 참선이라 이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지금 시대에 옛날의 그 선지식들이 공부하면서 방편으로서 해 나간 걸 고집부리지 말고 지금 현 시대에 물결치는 대로 전부가 그대로 참선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전부가 참선이 아니라면은 어디에고 걸립니다. 앉았다는 데서 걸리고 섰다는 데도 걸리고, 참선이라고 하는 데도 걸리고, 좌선한다고 하는 데서도 걸리고, 인제는 다 했다는 데서도 걸리고. 모든 게 다 걸리는 거예요. 내가 해야겠다고 발심을 내는 데도 걸리는 겁니다, 공에 들지 못하면. 어떤 사람은 공에 들어서 또 편안만 하면 되는 줄 알고 잘한다고 그러죠. 몸으로 아무리 공에 들어서 그 앉는 기술이 좋다고 그래도 그건 기술이에요. 참선이 아니라 그것은 기술이에요, 어디까지나. 몸을 단련해서 잘 앉아 있고 오래 앉아 있는 거는 기술이지, 그것은 참선이 아니에요. 참선이라는 건 가다가도, 걸어가면서도, 빈 배는 걸어가면서도 나 할 일 다 하는 것이 참선이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이렇게 살아 있을 때 알아 놓으신다면은 뭐든지 올바로 눈이 뜨이고 코가 뜨이고 맛을 알고 귀가 뜨여서 어디고 모르는 데 없이 착착 가시게 되는 거죠. 만약에 여러분이 이 도리를 모르고 기복으로만 나가는 그런 분이 있다면 죽어도, 살아서 모르니깐 죽어도 어딘지 몰라서, 항상 그러죠. 개집도 들어갈 수 있고, 뱀 소굴도 들어갈 수 있고. 그건 그 식만, 어쩌다 살던 식만 남아서, 그 습만 남아서 그냥 들어가는 겁니다. 깜깜한데 어떻게 찾아 들어가나요? 그러니 살아서 눈을 뜨지 못하면은 아니 되고, 귀가 떠지지 않으면 아니 되고, 전 우주의 그 향기 냄새를 맡지 못하면 판단을 할 수가 없는 거죠. 그리고 맛을 못 봐요.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이 살아 있을 때 여러분들이 차원을 높이고 또 지혜를 넓히고 해서 모든 일체 신이 도로 내 한 점의 마음에 있다는 그 사실을 알고 방황하지 않는다면 내 앉은 자리가 부처 자리요, 바로 법신 자리요, 화신 자리요, 보신 자리요. 모두가, 어디에서 찾을 게 없죠. 나한테 있으니까, 모두가.
 
그렇게 한다면 이 지구도 영원히 지속될 것이요, 또는 여러분도 영원하게 지속될 것이요, 끄달리지 않을 것이요. 업보라는 언어도 붙지 않을 것이요, 또는 윤회 아니, 유전성도 붙지 않을 것이요, 가난과 우환도 붙지 않을 것이요. 모두가 붙지 않을 거다 이겁니다. 여러분이 선을 행했으면 선이 붙을 것이요, 악을 행했으면 악이 붙을 것이니 선과 악을 다 놔라 이겁니다. 그래야 자유인으로서 방방곡곡 어디 안 닿는 데가 없이 살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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