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와 자를 상봉시키려면... > 길을 묻는 이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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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와 자를 상봉시키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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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부와 자를 상봉시키려면 관법을 수행해야 합니까? 그러나 스스로에 대한 확신이 서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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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스님 말씀

관리자님의 댓글

관리자 작성일

나는 어떤 존재인가에 대해서 먼저 말하겠습니다. 나는 크게 나누어 두 가지 면이 있습니다. 그 하나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나’입니다. 이 나는 항상 생각이 바뀌고 마음이 편안치를 못합니다. 바로 이 나의 입장에서 볼 때 이 세계가 ‘고(苦)’라고 말해지게 됩니다. 그런데 그런 나 말고 또 하나의 나가 있습니다. 아니, 이렇게 말하면, 그 또 하나의 나가 나와는 다른‘또 하나의’ 나인 줄 알게 될지도 모르니 ‘참나(眞我)’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니까 생멸하는 중생심으로서의 나는 ‘거짓 나’이며, 그런 나까지도 다 포함하는 나의 참된 면모가 있다는 말입니다. 불가에서는 예로부터 나를 찾아라, 나를 찾아라 하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때의 나란 말할 것도 없이 참나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참나는 거짓 나와 떨어져 따로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거짓 나의 근본 그 자체가 참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중생심·번뇌심·삼독심을 ‘끊고’ 참나를 얻는다기보다, 그것들을 되돌려 놓음으로써 참나로 되바뀐다고 하는 편이 옳을 것입니다.

진실히 믿든 안 믿든 잘하든 못하든, 알든 모르든, 내가 없으면은 아무것도 다 소용이 없습니다. 나로부터 있는 거니까 내가 있기 때문에 책을 볼 수도 있고 내가 있기 때문에 말을 할 수도 있고, 이렇게 천차만별의 작용을 하면서 살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면 그렇게 작용하는 나를 누가 형성시켰을까요. 바로 자기란 놈이 형성시켜 놓은 게 아닙니까? 자기란 놈이 형성시켜 놨으니까, 그 형성시킨 그놈이 바로 부(父)가 되는 겁니다. 참나가 되고. 그런 거니까 형성된 자(子)의 마음은 바로 부의 마음과 둘이 아닌 까닭에, 꼭 나무는 제 뿌리를 믿어야 한다 이런 겁니다. 나무는 제 뿌리하고 뗄래야 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나무가 자기만을 고집하니 그걸 무명이라고 합니다. 흙이 덮여서 나무가 제 뿌리를 못 보게 된 것을 무명이 덮였다고 합니다. 우리 인간도 영원의 근본 뿌리를 못 보는 것은, 바로 무명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에 자기 뿌리를 자기가 못 본다고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내가 잘 알고 모르고 그걸 떠나서 진실하게 물러서지 않는 믿음을 가져야만 합니다.

참나를 진정으로 찾아서 실현하게 되면 그때에는 중생으로서의 거짓 나 또한 참나의 한 모습임을 알게 됩니다. 그러니 나를 발견하기 위해서 일상 자체를 지켜보고 관하고  그 자리에 믿고 맡기는 생활을 해나간다면 그 속에서 내 안의 참나가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러니 참나를 발현하고 안하고를 떠나서 먼저 내 안에 참나가 언제나 항상 함께 하고 있음을 먼저 믿어야만 되는 것입니다. 무엇을 하기 위해서, 무엇이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본래 내재되어 있는 나의 근본을 꼭 알아야겠다는 신심으로 일상을 그 자리에 맡기며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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