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도 기복이 아닌가 하는 우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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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엄마와 두 동생과 함께 살고 있는데요, 엄마는 아파서 드러누워 있고, 때문에 제가 엄마와 동생들을 위해서 관을 많이 하게 돼요. 그런데 가끔 이렇게 관하고 맡기다 보면 이것도 기복이 아닌가 하는 우려가 생기기도 하는데 제가 잘하고 있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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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스님 말씀
기복이라는 건 상대를 두고 믿는 거를 기복이라고 그러죠. 절대 상대를 두고 믿는다면은 그건 기복이에요. 그러나 이게 불성, 생명의 근본은 다 똑같은 것입니다. 다 똑같은데 마음 쓰는 거라든가 차원이라든가 모습이라든가, 모든 게 다르죠.
그러니까 엄마는 엄마대로 받을 수 있는, 즉 말하자면 물을 이쪽 컵에서 이쪽 컵으로다가 부을 때에 컵이라도 들고 있어야 이게 받아지거든요. 그러면 그냥 이쪽 컵에 있는 물도 이쪽 컵으로 한데 옮기면 그냥 한 그릇이 돼 버리죠. 마음도 역시 그렇습니다. 그래서 이걸 모르더라도 받아들일 수 있는, 그 관하는 도리는 가르쳐 줘야 됩니다. 그런데 저쪽에서 만약에 받아들이지 않을 때는 그냥 저쪽 주인공으로 내 마음이, 그냥 내 마음을 줘 버리고…. 이게 바로 손을 폈다가 오그렸다 하는 도리에요. 이게 중용입니다. 작용이 아니라, 활용이 아니라 중용이에요. 왜냐하면 내가 이쪽으로 가면은 이쪽이, 엄마가 하나가 돼 버리고, 엄마 마음을 나한테로 넣으면 내가 하나가 돼 버려요. 이 도리를 모두 모르고 있기 때문에 어려움이 있는 겁니다.
이 마음이라는 것은 수만 개를 갖다 넣어도 그 마음은 두드러지지 않습니다. 수만 개를 꺼내 내도 줄지 않아요. 그렇기 때문에 이 도리, 이 어마어마한 도리를 모두 실험하고 체험하고 알아야 되겠기에 이 '되돌려 놔라' 하는 작업을 하라고 하는 겁니다. 진짜로 믿고 작업을 해라. 이 내가 나를 발견치 못하면, 부(父)와 자(子)가 한데 상봉을 못한다면 어떻게 자가 부로 가면은 부가 하나가 돼 버리고, 부가 자로 오면 자가 하나가 돼 버릴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깐 그 도리를 알기 위해서 우리가 지금 공부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관하는 법을 똑똑히 가르쳐 드리세요.
모든 가정에서 용도에 따라서 나한테 다가오는 것을 다 주인공에다 놓고 용도에 따라서 굴릴 줄 아느냐. 거기다 맡기고 지켜보고, 용도대로 거기다 맡기고 또 지켜보고. 그저 믿으면은 맡길 수가 있지만 믿지 못하면 맡길 수가 없다 이겁니다. 그리고 만날 '주인공! 해 주시오.' 한다는 거는 그건 어불성설이에요. 그건 있을 수가 없어요. 그건 상대성이 있기 때문이다 이겁니다. 그 사람을 위해서가 아니에요. 자기를 위해서지. 그 사람이라고 그러면 벌써 상대가 되지 않습니까. 이 모습은 둘이 있을지언정 어찌 마음이야 둘이겠느냐. 이 전구는 여러 개가 있지만 전력이야 어찌 둘이겠느냐. 안 그렇습니까.
그 어떠한 것도 현실에 그냥 떨어진 게 아니에요. 과거로부터, 과거에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서 내가 그 차원을 가지고 나오는 겁니다. 그러면 그 차원에 의해서 그 업식이, 죽어도 업식은 꼭 따라다니거든요. 그 업식이 고만 조절이 돼 가지고는 지금 현재 사는 걸로 나오는 겁니다. 물질적인 컴퓨터는 입력을 해서 넣어서 빼 쓰지마는 이 자동적인 컴퓨터는 그냥 자동적으로 입력이 돼 버려요. 그래서 입력된 거니까 지금 현실에 나오는 거죠. 그래서 되돌려서 거기다가 입력을 한다면 앞서 입력이 없어질 것 아닙니까. 얼마나 쉽고 빠릅니까.
그러니까 그 입력되는 대로 자꾸 앞서 한 거 없어지고, 우리가 걸음을 걸을 때 한 발 딛고 한 발 없어지고 한 발 딛고 한 발 없어지고 하듯이 말입니다. 되돌려 자꾸 믿고 '아, 내가 하는 것 다 거기서 하는 거다.' 이런다면 그냥, 들어가는 대로 다 그냥 앞서의 입력이 없어지면서 또 들어가고 또 없어지고 또 들어가고 없어지고…. 그렇게 함으로써 홀연히 그릇이 비고 그러면은 홀연히 내가 나타난다 이 소립니다.
지금 여러분이, 늙었든 젊었든 애들이든 다 이 정신계의 50%를 충당해야 됩니다. 지금 병원도 있지만 한 35%밖에는 병원에서 고칠 수가 없어요. 그럼 65%는 어디서 충당합니까. 여러분이 다 충당해야 돼요. 그뿐이 아니에요.
병 증세를 하나 연구해서 약을 발견하고 그것을 고친다 하더라도 과거에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서 업식을 제거 못 시키면 그것이 또 딴 걸로 화해 버린다 이겁니다. 딴 걸로 화해서 재난이 돼 버려요. 이건 학술적인 거하고 이론적인 거하고, 이 모든 것이 물질적인 의학이지, 즉 말하자면 심성의학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디에서 어떻게 돼서 이것이 왔느냐는 걸 모르기 때문에 100%를 못하는 것뿐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항상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네들 몸뚱이 속에 수십억의 생명과 의식과 모습들이 들어 있다고요. 그게 내가 어디서 왔는지 증거다. 미생물에서부터 그냥 온 것이 증거이고, 내 몸뚱이가 지수화풍이라는 것도 증거다. 그 증거가 바로 내 몸뚱이 속에 다 들어 있어요. 그러면 그 몸뚱이 속에서, 한 파워에서, 즉 말하자면 공장이라고 한다면 심장 공장이라든가 간장 공장이라든가, 대장 소장 척수 척추, 방광 콩팥…, 이 모든 공장들이 있지 않습니까. 이 공장들에서 한 공장만 망해도 이 몸뚱이는 다 쓰러져 갑니다.
그러니깐 이 내 몸뚱이 속에 중생들이 그렇게 많은데, 다들 사람들이 이름을 지어 놔서 이름도 가지고 있고 그런데, 나 아님이 하나라도 있습니까. 보세요. 위 공장도 자기 공장이요, 자기요, 세균 하나하나도 자기 아닌 게 없어요. 그거를 알아야 합니다. 그 수많은 의식들이 털구멍을 통하여 들고 나면서 파워를 일으키면은 몸뚱이가 그대로 가 버려요. 그러니깐 모든 걸 종합해서 이 몸뚱이 속의 수십억의 그 의식들을 내 한마음으로서 귀결을 지어라 이겁니다. 귀결 지어서 돌아가는 것이 주인공입니다.
그러니깐 이름들을 가지고 논의하지 말고 실천궁행하는 데에 노력을 해라. 그리고 실험을 통해서 체험해라 이겁니다. 옆의 사람이 어떠한 문제가 있을 때에 실험해 보기 좋지 않습니까. 내 마음을 글로 줘서 '참, 주인공! 저 사람하고 나하고 둘이 아니잖아. 네 몸 네가 이끌고 건강하게 끌고 가야잖아.' 하고 던져 놓고 지켜본다면 거기서 알 바가 있을 겁니다.
그게 내가 주는 방식과 나한테로 넣는 방식이 있어요. 소나 짐승들이나 닭이나 이런 거를 모두 이렇게 할 때는 그냥 나한테다 전부 넣어 버리는 거죠. 그게 모두, 즉 말하자면 모르니까. 그러나 사람들이 모르는 거하고 짐승이 모르는 거하곤 또 달라요. 그냥 넣는 것이 넣을 자리가 있어서 넣는 게 아니라, 주인공에다 맡기지마는 때에 따라선 그 주인공에다 그냥 줘 버리는 겁니다. 둘이 아니니까. 일로 와도 둘이 아니요, 절로 가도 둘이 아니거든요.
심려가 하나도 들어갈 게 없어요, 이 공부라는 게. 그러니까 고라고 생각을 하지 말라 이겁니다. '아이고, 이게 또 닥쳤구나. 이걸 어떡하면 좋은가?' 하고 그냥 벌렁 나자빠지면 어떻게 되는 줄 아세요? 몸뚱이 속에 있는 의식들이 다 그냥 벌렁 나자빠져요. 자기 말대로, 생각대로.
그러면 병이 들게 돼 있죠. 그러면 내가 그걸 여여하게 '흥! 가져 갈 것도 없고, 가져 온 것도 없는데 뭘 그래? 너 알아서 네가 잘 끌고 다녀라. 네 심부름을 하다가 이렇게 됐으니까 네가 알아서 해!' 하고 턱 맡기고 여여하게 싱긋이 웃을 수 있는 그러한 사람이라야만이 여기 육체 속에서 의식들이 다 그런 마음으로 한번 굴려주는 겁니다. 그럼 병 안 드니 좋지, 가정 화목하니 좋지, 다시 일어나니 좋지. 아, 그게 재료가 되는 거 아닙니까. 사람으로 생겨서 들고 나는 걸 모르고, 높고 낮은 걸 모르고, 길고 짧은 걸 모른다면은 100%를 할 수가 없거든요.
그러니까 이 모습을 보지 말고 '너와 나와 둘이 아닌데 너만이 이끌어 줄 수 있잖아.' 하면은 되는 거지, 산란하게 사단을 하면은 똑바로 집혀지지가 않죠. 그러니까 빨리빨리 공부들 하세요. 해 보세요, 한번. 생활 속에서 그대로 하는 거니까. 이 도리를 공부하면서 실험을 통해서 체험을 해 보세요. 얼마나 고교하고 묘하고 광대무변한지 스스로 알게 됩니다. 어렵더라도 잘 넘기면서 직발 활을 쏘도록 하는 그 심력을 기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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