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의 공법이 어떤 단계인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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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우리가 마음공부를 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리고 스님 법문 중에 무의 공법이라는 말씀이 있던데 그것이 어떤 단계인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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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스님 말씀
우리가 공부를 하는 것은, 미생물에서부터 진화되고 형성돼서 인간까지 왔으니만큼, 이 인간 중에서도 진짜 인간이 되려고 하는 것입니다. “진짜 인간으로 태어나려면 모든 것을 벗어나야 한다.” 하는 부처님의 말씀이 있죠. 그러니까 이 마음의 주장자의 자리를 완벽하게 해 놔야 된다는 건데, 이게 결국은 보림하는 겁니다. 즉 말하자면 수억겁을 통해서 겪어 온 관습이나 욕심이나 아상, 아만 이런 모든 거, ‘딴 사람은 죽어도 내가 살아야겠다.’ 하고 잡아먹는 거, ‘딴 사람은 죽어도 나는 살아야겠다.’ 하고 정신을 뺏어 먹는 것, 이런 행위를 함이 없이, 둘 아니게 너도 살고 나도 사는, 둘 아닌 도리를 이렇게 배우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이 도리를 이제 어지간히 좀 알았다고 할 때…, 내가 여러분한테 여직껏 질문 한 번도 해 본 예가 없죠, 네? 그게 여러분이 완숙되도록 노력을 한 겁니다. 예를 들어서, 싹이 나서 너풀거려야 바람이 부는 소리도 듣고, 흙냄새도 맡고, 거름 주는 것도 알고, 스스로 자기 자신에 대한 문제를 해결해 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때로는 바람이 분다 하면 뿌리를 좀 널따랗게 잡는다거나 하는 경향도 있습니다. 사람이라고 다 알고 이런 식물이라고 모르는 것이 아닙니다. 다 압니다. 그러니만큼 일체 만물만생과 더불어 둘 아닌 도리를 알려면 나부터 알아야 됩니다. 나부터 알기 위해서는 다스리는 의식과 그 모두가 내 주인공으로 통일돼야 됩니다. 그래서 찾으라고 그러는 게 아니라 믿으라고 하는 겁니다. ‘진짜 믿어라. 진짜 믿는다면 한군데서 그 선장이 중생들을 이끌고 다 조복을 받는다.’ 이런 겁니다.
그런데 내 몸속에 있는 중생들을 다 둘 아니게 조복을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 모두가 항상 그렇게 한군데서 들고 나는 거지 여러 군데서 들고 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 군데가 아니고 내 이 한마음에서 들고 나죠. 예를 들어 말하자면, 반가워서 악수를 할 때 마음이 먼저 갑니까, 손이 먼저 갑니까? 마음이 먼저 가고 안 가고 간에 마음이 일어나니까 손이 가는 겁니다. 오래간만에 만나서 반가운 사람이라면 반갑게 마음이 내어지고, 또 ‘그냥 인사를 해야겠다.’ 하더라도 인사하기 위해서 손이 갑니다. 그거 뭐 정확합니다. 또 마음이 안 가는 사람한테는 손이 안 내밀어지죠. 그래서 그냥 그렇게 사는 게 여여하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의 마음에 따라서 차원이 주어지고 삶이 주어지고 모습이 주어집니다. 그것을 한 번이라도 생각해 보신 적이 있는지요. 여러분은 많이 해 보셨으리라고 믿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서 모습이 주어지고 삶이 주어지고 또는 차원이 주어집니다. 차원이 주어지기 때문에 모습과 삶도 주어지는 거죠.
여러분, 지금 텔레비전을 많이들 보시죠. 거기에서 연기하는 것을 보면 아주 진짜처럼 하죠. 진짜로 잘하죠. 역을 맡아 가지고 그렇게 잘할 수가 없어요. 그렇게 진짜처럼 잘하는데, 우리도 진짜처럼 살고 있단 얘깁니다. 탤런트들처럼 그렇게 자기의 차원에 따라서 삶도 주어졌고 모습도 주어졌으니까, 그렇게 주어진 대로 그대로 살아야지 거기서 빼고 끼우고 할 수가 없습니다. 이게 팔자 운명이라는 뜻이죠. 그런데 우리가 그 운명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느냐, 자유자재권을 갖느냐, 이게 문제입니다. 이왕 사람이 되었다면 그런 계단 없는 계단을 밟아서 차원의 급수를 높일 수 있어야 한다는 거죠.
그래서 돈오는 갑자기 어린애를 낳아서 “으앙” 하고 우는 거를 말하는 것이고, 자라기 위해서 바깥에 나와서 세상을 살면서 배우는 것을 바로 점수라고 이름할 수 있겠죠. 그런데 우리가 그렇게 탤런트처럼 사는데, 가만히 생각들 해 보십시오. 우리가 탤런트라면 그냥 아무 역이나 자기에게 주어지는 대로 맡아 가지고 나갑니다. 그런데 여러분한테 진짜로 죽는 역, 또는 아주 하(下)의 사람의 역, 강도 역, 사기 역, 그런 역을 맡아서 나가라면 아마 안 나갈 겁니다, 죽는 역은 더군다나. 그렇죠? 진짜로 죽는다면요. 그런데 그 탤런트들이 진짜로 죽는 게 아니기 때문에 그 역을 맡아 가지고 나간단 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내가 지금 말하는 것은 ‘우리가 진짜로 사는 게 아니니까 모든 것을 다 거기 놔라. 선장이 있는데 선장이 다 알아서 할 거니까 그 선장한테 맡기고 놔라.’ 이러는 겁니다. 그래서 들고 나고 들고 나고 하는 것을 다 거기 놨을 때 그것이 일차적인 보림입니다.
그래서 그것이 완벽하게 보림이 돼야…, 예를 들어서 여러분이 오륙도 같은 데 뭐, 깊은 산속 같은 데, 걸어가다가 큰 돌이 서 있으면 ‘아 참, 저 돌 잘생겼다.’ 하고 쳐다볼 수도 있겠죠? 또 그런 곳이 아니라도 이렇게 지나가다 보면 뭐든지, 작든지 크든지 말입니다. 비실비실하고 비틀어지고 뿌리를 박지 못한 나무 한 그루도 그렇고 말입니다. 혹시 여러분 중에 그런 나무들이나 돌이 손을 내밀면서 내 손을 잡아 달라고 한 예가 있었습니까? 이것도 공부의 단계니까. 나무들이나 돌이나 어떠한 거든지 손을 잡아 달라고 하는 소리를 들었습니까? 이것은 우리 마음속에서, 엄연히 손 없는 손이 내민 겁니다. 손 없는 손이 나에게 손 없는 손으로 ‘잡아 다오.’ 한 겁니다. 그러면 잡아 주는 순간 둘이 아니게 그냥 하나가 돼 버리고, 하나가 되었다가 또 둘이 되고, 이렇게 자유자재하는 겁니다. 그래서 보이지 않는, 없는 손을 건져 줄 때는 없는 손에다 넣으면 손이 둘이 아니게 되고 형체가 없으니 그대로 여여하다는 뜻이죠. 그래서 둘 아닌 공부의 실천입니다, 그게. 그러니까 나를, 수억겁을 거쳐 오면서 진화시키고 형성시킨 자기 자신과 통했단 얘깁니다. 통했기 때문에 그 자신이 그 나무로 통해 가지고, 돌로 통하든지 해 가지고 자기를 가르치기 위해서 ‘손 좀 잡아 다오.’ 하는 겁니다. 둘 아닌 도리를 가르치기 위해서입니다, 그게.
이것을 이론으로만 알아서는 도저히 무(無)의 세계의 법도를 모르고, 무의 세계의 공법을 모르고, 무의 세계의 가고 옴이 없는 도리를 모른단 얘깁니다. 그리고 실천할 수가 없다는 얘깁니다. 여러분 중에 그런 분들이 있다면 여기서 벌써 싹이 텄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싹이 터서 그 싹은, 예를 들어서 그 나무까지, 목신하고 둘 아니게 손을 잡을 수도 있다는 얘기죠. 그러니까 내 이 몸속에 있는 중생들은 다 합일이 됐다는 얘기죠. 조복을 받았다는 얘기죠. 그러니까 거기서 무의 도리로, 이것을 손 없는 도리로, 손이 있든 없든 그대로 둘 아니게 건질 수 있다는 얘기고 또 배우는 도리입니다. 그게 두 번째 보림할 수 있는 도리를 배우고 가는, 즉 말하자면 무의 공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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