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삼독마저 둘로 보지 말라는지? > 길을 묻는 이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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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삼독마저 둘로 보지 말라는지?

본문

질문

탐진치 삼독을 끊고 소멸시켜야 내가 청정해지고 부처가 된다고 알고 있는데, 왜 스님께서는 탐진치 삼독마저도 둘로 보지 말라고 하시는지 그것을 여쭙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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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스님 말씀

관리자님의 댓글

관리자 작성일

옛날에 어떤 어른이 “쓰레기통이 돼 봐야 쓰레기의 이치를 아느니라. 금은보화 담은 창고가 되지 말고 쓰레기통이 돼라.” 하셨는데, 예전 일입니다만 왜 그런 소릴 했는가 하고 곰곰이 생각을 해 보니까 쓰레기통에는 별의별 게 다 담깁니다. 그리고 쓰레기통이라는 건 고귀한 데 있는 게 아니라 바깥에 아주 그냥 팽개쳐져 있죠. 그 쓰레기통 노릇 하기가 상당히 어렵다고 생각을 합니다.

여러분도 쓰레기통이 되지 않는다면 자식을 올바르게 키울 수가 없습니다. 어떤 거든지 쓰레기 같은 것은 자기가 갖고 좋은 것은 자식을 주려고 하는 부모의 심정은 부처님의 심정과 같은 것입니다. 죽는 것마저도 그렇죠. 자세히 말을 하자면 부모의 마음이 죽는 것도 대신할 수 있을 만큼 돼 있죠. 사는 것도 그저 고생 없이 살기를 원하는 것이 부모의 마음이죠. 그 부모의 소망이 작고 클 뿐이지 그 마음은 똑같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사생자부(四生慈父)로서, 알로 낳고 태로 낳고 습한 데서 낳고 화(化)해서 낳고 하는 그 사생들이 전부, 자기 몸 아님이 없고 자기 아픔 아님이 없고, 한 도량에 있지 않음이 하나도 없고, 죽고 사는 것도 자기 아니 됨이 하나도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런고로 한 가정에서 부모가 자식들 생각하는 것과 부처님이 사생자부로서 생각하는 바가 크고 작을 뿐입니다. 우물물과 바닷물이 크기만 다를 뿐 물은 같듯이.

우리가 생활할 때 항상 주인공, 나의 불성 뿌리에다가 모든 거를 놓으라고 하죠. 좋은 것은 감사하게 놓고, 언짢은 거는 언짢지 않게 하는 것도 너라고 놓고, 그렇게 오신통을 잘 굴리라고 했습니다. 오신통은 누구나가 다 가지고 있는 겁니다. 보는 거, 듣는 거, 말하는 거, 가고 오는 거, 또 내가 어디서 나온 걸 아는 거 말입니다. 또 상대성을 알고 말입니다. 그러니까 다섯 가지의 문제를 볼 때에 거기서 나오는 모두를 거기다 놓되, 두 가지 여건이 있습니다. 하나는 감사하게 놓고, 하나는 구정물도 거기서 나오는 거니까 거기서 맑은 물로 대치할 수가 있다는 믿음으로 놓으라는 얘기죠.

나는 이렇게 곧바로 여러분한테 얘기합니다만 수많은 조사들이나 수많은 스님네들은 “탐진치(貪瞋癡)에 구르면 삼독(三毒)에 빠진다. 삼독에 빠지면 헤어날 길이 없다.”라고 다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내 말은 그것을 넘어선 얘깁니다. 고(苦) 집(集) 멸(滅) 도(道), 이런다면은 탐진치가 있기 때문에 고가 있는 것입니다. 집착하고 말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거기다가 감사하게 놓고, 굴려서 놓고, 다 놓는다면 ‘멸’이 됩니다, ‘멸!’ 일체, 일거수일투족이 다 ‘멸’이 됩니다. 그래서 삥삥 돌리지 않고 직선적으로 얘기해 드리는 겁니다. 그렇게 실천을 하시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거기에 다 놓게 되면 ‘멸’이 되는 이치에서, 자꾸 멸해 들어가면은 ‘도’다 이겁니다. ‘멸, 도’ 아닙니까? ‘멸’ 하면 ‘도’다 이거예요.

이 ‘멸’이라는 것을 가만히 생각해 보십시오. 그렇게 실생활 속에서 감사하게 놓고, 모든 것이 거기서 나오는 거니까 거기서 해결해야 된다는 것을 믿고 거기다 놓을 때에 바로 멸함이 생기면 도가 있고, 도심이 생기면 바로 우리가 넓게 볼 줄 알게 되고, 넓게 들을 줄 알게 되고, 넓게 말하게 되고, 지혜롭게 말입니다. 그러니까 둥글게 나온다는 얘기죠. 둥글게 나오고, 그 둥글게 나오는 반면에 우리는 ‘아, 이거 둘이 아닌 까닭에 이렇구나!’ 하는 것도 알게 되고요.

또 우리가 그것을 잘 굴릴 수 있게끔 될 때에 비로소 웃물이나 바닷물이나 똥물이나 핏물이나 흙물이나, 어디에든 젖는다는 걸 알게 됩니다. 이 물 저 물 따지지 않고 젖는 거. 젖는 이치! 어디든지 다 젖는다. 어떠한 물에도, 똥물에도 젖는 것은 마찬가집니다. 이 방편의 말을 안 하면 그 이치를 모르겠기에 방편으로 말을 하는 겁니다. 젖는 이치만 안다면, 여러분이 주인공의 그 뿌리에 모든 것을 놓는다면 하나에 젖을 뿐이지 이것저것 가리는 게 없다. 가리는 게 없는 반면에 젖는 걸 알고, 젖는 걸 아는 반면에 그 젖는 거마저도 공했다는 걸 알게 됩니다. 이것은 최상승의 얘깁니다.

우리가 실생활에서 해 나가는 게 뭡니까. 우리가 이득이 없다면 할 것도 없지요. 할 것도 없다는 걸 아는 그 사람이 바로 이득이 충분하고 남과 나에게 다 이득이 충분한 사람입니다. ‘할 것이 없다’ 할 때까지…. 우리가 고정됨이 없이 찰나찰나 화해서 찰나찰나 나투면서 끝없이 돌아간다는 사실을 잘 아시죠? 그거를 아신다면 젖는 도리마저도 공했다는 얘깁니다.

이 세상의 이치가 그렇게 천차만별의 굴림이 있겠지만 단 한 군데서만이 굴릴 수 있다는 사실! 그리고 단 한 군데서만이 전체가 통할 수 있다는 사실! 그 한 군데서만이 상대하고 나하고 통할 수 있다는 사실 말입니다. 그 한 군데서만이 나투어서 죽은 사람의 영혼이든 산 사람의 영혼이든 찰나찰나 만날 수 있다는 얘기죠. 살았어도 영혼이 있기 때문에 살아 있는 거고 죽었어도 영혼이 있기 때문에 다시 태어날 수 있다는 얘기죠.

그래서 쓰레기통이 되는 것도, 어떠한 거든지 막론해 놓고 그게 아주 중요합니다. 불로 가고, 물로 가고, 또 흙으로 가고, 바람으로 가고, 그렇게 정리를 잘해서 다시금 이 세상에 조립을 해서 내놓을 때 쓸모 있는 기계로 내놓을 수 있게끔 만드는 겁니다. 그러니까 재생이죠. 그런데 재생이라고 할 것도 없는 게 뭐냐 하면 끝없이 돌아가면서 그렇게 진화돼서 형성되고, 형성되면서 또 진화돼서 흩어졌다 모였다 흩어졌다 모였다 하는 과정이 끝이 없으니까요. 다함없이 했다고 하더라도 한 게 없어요. 그러나 다함없는 그 속에서, 끝없는 그 속에서 우리가 어떠한 삶을 살아야 되는지, 그건 여러분의 마음에 달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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