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의 어떤 과정에서 나온 것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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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사량심이 앞서다 보니까 평소 때 관하면서 맡겨 들어갈 때 과연 이게 공부가 어느 정도 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늘 회의가 생깁니다. 그래서 가끔 꿈으로라도 어떻게 공부하는 과정이 나타나는 것인지 안 그러면…, 저는 가슴을 향해서 눈을 내리깔고 사무실에 있을 때나 길을 갈 때나, 집에 있을 때나 가끔 어떤 사안이 없어도 관을 해 봅니다. 그럴 때 가슴이 아련히 아려져 오는 그런 감을 느낄 때도 있습니다. 이것이 공부를 하는 중의 어떤 과정에서 나타나는 것인지 안 그러면 괜한 생각을 두고 있는 것인지 한번 여쭤 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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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스님 말씀
우리가 가슴이 아련해짐을 느끼고 이러는 것도 그것이 있다는 증거의 과정이죠. 그런데 확실치 못한 것은 사실이죠. 그러나 그것이 확실치 못하다고 없다고 미심쩍게 생각진 마세요.
그런 점도 있죠. 옛날에 나는 그렇게 서로 상응하면서도, 그 마음이 말입니다, 그때가 스무 살 정도? 그러니까 6·25 나기 전이니까. 야! 참 신기한데 말이야, 내 깐에는 뭐 절에서 스님네들한테 많이 들은 것도 아니고 경을 본 것도 아니고 이러니까, ‘야, 당신이 있다면 내 손을 들어서 확실하게 있다는 걸 증명을 하고 그렇지 않으면 아닌 걸로 하자.’ 이렇게 하고선 딱 앉았단 말입니다. 그랬는데 웬걸요. 꼼짝도 안 하는 겁니다. 그래서 ‘에이, 그러면 그렇지.’ 하고선, 그래도 나는요, 믿지 않거나 그런 게 아니고 ‘허! 명령이 되는 모양이지?’ 이렇게 하곤 고만뒀어요. 그랬는데 막 이렇게 일어나려고 하는데 그냥 별안간에 이 팔이 말입니다, 그냥 공중제비로 올라가는 겁니다. 그러니 없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때부터 때에 따라서는 내가 한문 글씨를 모르던 때인데, 지금은 뭐, 아나요? 하하하, 국문도 잘 몰라요. 절 도량에서 그전에는 불을 많이 때서 숯을 썼거든요. 숯 하나를 집어 들면 이게 내 손이 아니에요. 모두가 이게 내 몸도 아니고, 내 손도 아니고, 내 눈도 아니고, 내 귀도 아니고 전부 아니에요. 이렇게 해 보니깐요. 그래서 그때서야 ‘아하! 들 것도 없고 안 들 것도 없고 몽땅이구나, 몽땅이야!’ 그러고 웃은 예가 있습니다.
그러니 그렇게 못 믿게 생각을 하지 마시고 몸뚱이 하나가, 즉 내가 있기 때문에 그가 있는 거를 아셔야 돼요. 내가 있기 때문에 그 마음의 근본이 있지 내가 없는데 어떻게 마음의 근본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항상 부착이 돼서, 지금 속에 정맥 동맥이 같이 돌아가듯 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뿌리와 나무가 둘이 아니게 그냥 살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어떻게 나무가 뿌리를 못 믿습니까? 그와 같은 거죠.
그러니까 자꾸 그렇게 하다 보면 웃음이 나서도 웃을 거고, 화가 나서도 화를 낼 것이고 이렇게 만드시란 얘깁니다. 허! 너무 기가 막혀서 이제 이쪽은 저쪽이 없는 줄 알고 막 그냥 생각을 하고 웃기다가 보면 거기서 껄껄껄껄대고 웃는단 말입니다. 거기서 웃는 게 바로 자기가 웃는 겁니다, 예.
그러니까 색경을 봐도 자기 모습이 보이는 게 아니고 자기 참이 보일 때 바로 둘이 아니게 볼 수 있는 거죠. 옛날에는 무쇠로다가 면경을 만들어서 그 면경을 자꾸 들여다보면서 했다고 하는데 그럴 필요도 없죠. 바로 진짜로, 진짜로 믿고 들어가셔야 됩니다. 아리송하면 안 되죠. 잘하든 못하든 그냥 진짜로 믿고 ‘생활하는 내 몸뚱이 전체가 다 그놈이 하는 짓이로구나. 생활하는 자체가 앞으로도 그렇게 할 것이고 과거에도 그렇게 했고 지금도 그렇게 하고 나가는구나. 머리카락 하나도 내 게 아니로구나.’ 하고 ‘응, 바로 네 울력에 내가 이렇게 울력을 하고 있구나!’ 이렇게 생각하면 아주 하는 일도 걸림이 없이 잘될 겁니다.
그런데 모두 여러분이 100% 내가 사는 거 따로 있고 믿는 거 따로 있게끔 하거든요. 참 이상해, 그거 보면. 그러니 자기가 자기 부처인 줄 모르죠.
그러니까 진짜로 자기를 의심하지 말고 이 몸속에 있는 생명의 의식들과 더불어 한마음으로써, 한마음의 그 선장이 바로 자기의 마음이라는 거를 아십시오. 이 몸속에 있는 생명들이 바로 배를 타고 허허바다에 지금 가고 있는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면 당신들의 마음이 선장이 돼서 바로 안으로, 배 안으로, ‘야, 배 뒤집힐까 봐 무섭다. 가만히 좀 있어! 여기를 벗어날 때까지 좀 가만히 있어. 좀 조용하게 있어. 배 뒤집히면 너도 나도 다 죽어.’ 하고 안으로 다스려야지, 바깥으로 “살려 주시오, 살려 주시오.” 해 봤던들 소용이 없거든요. 아니, 생각들을 해 봐요. 안 그런가? 내 몸속에 지금 중생들이 잔뜩 배에 탔고 내가 지금 배가 돼서 가고 있습니다. 내 마음이 선장이 돼 가지고 지금 자꾸 끌고 가는데 그냥 허허바다예요. 우리가 지금 살아나가는 게 허허바다를 지금 헤매고 가는 겁니다.
그런데 아니, 너도 나도 다 죽자고 안에서 악업 선업들이 그냥 요동을 칩니다. 악업이 나올 때는 마음이 금방 좋았다가도 요렇게 삐뚤어져서 그냥 이런 게 치밀고 어떤 건이라도 별거 아닌데도 화가 나요, 화가 나게 되는 거니까. 또 어떤 건은 웬만큼 화날 거라도 아, 슬기롭게 넘어간단 말입니다. 그리고 잘 돼서 이렇게 하는 때도 있고. 바로 잘돼 나갈 때는 ‘아, 너희들 참 감사하구나. 이렇게 이 배를, 노를 젓고 가는 데도 절대 손색이 없게 하니 참 감사하구나!’ 하고 거기다 놓고, 또 여기서 막 우왕좌왕할 때는 ‘야, 가만히 있어. 우왕좌왕하는 것도 너니까 가만히 있는 것도 너 아니야.’ 하고서 다스리는 것이 바로 관(觀)입니다. 어떤 사람은 생시에 이렇게 저렇게 했던 것도 꿈에 나타나서 채찍질을 해서 가르친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꿈도 생시고 생시도 꿈입니다, 지금. 예전에도 자주 탤런트 얘기 했죠. 이 탤런트들도 꿈과 같이 탤런트들 그 소임을 맡아 가지고 하죠? 우리 지금 사는 것도 탤런트들이 연극하는 거와 같죠. 지금 연극하는 배우들이에요, 우리가. 허허허. 그러니까 꿈에는 이 몸을 벗어나서 마음이 가르침이요, 또 몸과 마음이 한데 합쳐서 가르침이요, 그러니까 생시나 꿈이나 같이 공부입니다, 이게. 꿈 따로 보고 생시 따로 보지 마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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