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 아닌 도리를 실천하려면 > 길을 묻는 이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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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묻는 이에게는
큰스님 법문 중에서 발췌하여 답을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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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 아닌 도리를 실천하려면

본문

질문

물질세계는 번연히 나와 남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어떻게 둘 아니게 실천해 나갈 수 있을는지요. 내가 한다는 생각 없이, 내가 산다는 생각 없이 무심으로 생활 속에서 진실하게 실천해 나갈 수 있도록 가르침 주시기 바랍니다. 

댓글목록

큰스님 말씀

관리자님의 댓글

관리자 작성일

이 세상에는 모든 사람들이 더불어 주고받고 삽니다. 더불어 살지 혼자 사는 사람 없어요. 옷도 더불어 같이 주고받고 입었고 먹는 것도 주고받고 먹고 모두가, 일체가 다 그래요. 그런데 어떻게 둘 아니게 실천을 하느냐 이 문제입니다. 어떻게 둘 아니라고 하느냐. 분명히 줬고 분명히 받았는데 어째 둘이 아니라고 하느냐 이러겠죠.

그런데 내가 전깃줄 얘기를 가끔 하죠. 전기, 전력이 들어왔을 때는 이게 불이 들어옵니다. 전력이 끊어졌다 이럴 때는 전기가 들어오지 않습니다. 그런데 양면의 전깃줄을 갖다가 이렇게 이어야 전기가 들어옵니다. 그렇듯이 이거를 주고받을 때, 이걸 주고 이걸 받을 때 이 한 순간은 같이 이 마음이, 즉 말하자면 정신계가 둘 아니게 이어진단 얘깁니다. 이어지니깐 찰나에 주고받은 예가 없단 얘기죠. 찰나에 주고받은 예가 없다. 그리고 함이 없이 살고 있다. 삶이 없이 살고 있다.

왜냐하면, 방편으로 이렇게 표현을 할까요? 그전에 말했듯이. 머슴을 산다면 자기네 집이 아니죠. 자기네 집이 아니니까 자기네 맘대로 할 수가 없죠, 머슴은. 주인이 맘대로 하죠. 그래서 주인이 시키는 대로 할 뿐이지 자기 마음대로 할 수가 없어요. 그렇듯이 이 주인이 이렇게 시키면 시키는 대로 내가 듣는데 듣는 순간, 주는 순간, 말을 하는 순간에 하나가 돼 버리는 거예요. 그래서 주인 대신 내가 하는 거죠. 그러니깐 항상 그 한 찰나 찰나마다 이게 따로따로가 아니라 함이 없이 하게 된단 얘기죠. 그래서 자기 속에서 한생각이 나서 ‘이걸 해야겠다’ 이러고 하는데도 함이 없이 하게 되고요, 남이 주는 거를 받았다 하더라도 받은 사이가 없고 그 상대방도 준 사이가 없다는 얘기예요. 이거 이해가 가시는지 모르겠지만 이해가 모두 가셔야 될 겁니다, 아마.

모든 사람들이 살아나가는 데 ‘이게 둘이 아니다’라는 실천을 해야 할 텐데 둘이 아니라는 것을 말로만 알고 있지 실천을 할 수가 없단 얘기죠. ‘항상 둘이 아니라고 그러시는데 이게 어째서 둘이 아닌가. 저쪽에서 나를 줬고 내가 저쪽에서 받았는데 어떻게 둘이 아닐까.’ 이렇게 생각하시죠. 근데 한순간 전깃줄에 닿는 거와 같단 얘기죠. 이 마음이라는 건 그렇게 빨라요, 속도가. 마음이라는 게 그렇게 속도가 빨라서 한생각에 그냥 그저 갖다 놓고 ‘고맙다, 고맙지 않다’ 하더라도 그렇고 하나로 그냥 이어지기 때문에 고맙단 말 없이 그냥 고맙게 되는 거죠.

그래서 여러분들이 무슨 말을 하시게 되면 말을 하시고 그냥 가셔도 되는데 꼭 말을 들으려고 그러거든요, 뒷말을. 뒷말을 들어서 되는 게 아니거든요. 내가 하는 게 아니기 때문이죠. 그렇기 때문에 이 스님네들도  ‘자기 몸은 시자로 쓰고 자기 정신은 부처로 쓴다’ 이런 말이 있죠. 그래서 항상 스스로서 ‘둘 아니다’ 이렇게 나오는 것을 실천을 하시는 데에 그게 묘미가 있다. 어떻게 그러면 생각을 하고 실천을 하느냐. 생각을 하지 않아도 본래 잠재해 있다면 그냥 해도 그게 둘 아닌 줄 알게 되는 거죠. 모르고 우리가 그냥 주고받고 이렇게 해도 그게 둘 아니게 그냥 실천이 됐다는 얘기죠.

모두 내 몸뚱이 네 몸뚱이를 가지고 이렇게 둘 아니게 실천이 되게끔 된다면 일일이 생각을 안 해도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뿌리가 뭐, 떨어졌다가 붙었다 이렇게 하는 것이 아닌 항상 자기 뿌리는 자기 뿌리가 가지고 있죠. 자기가 있는 데에 자기 뿌리가 있는 거죠. 그렇기 때문에 항상 상대방이 나를 줘도 상대방 그 사람도 자기 뿌리를 가지고 있고요, 나도 내 뿌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근데 한순간에 그 뿌리와 뿌리가 한데 합쳐져 버려요. 합치게 돼 있어요. 이 텔레비전을 끄면 안 나오죠. 켜면 나오죠. 그렇게 자유자재해라 이 소립니다. 우리가 그냥 이렇게 하게 되면 벌써 둘이 아니게끔 된다 이 소리죠.

처음에는 서툴지만 그게 둘이 아니가 되기 때문에 서툴러도 하다 보면은 물리가 터지게 되고 자꾸자꾸 늘어나가게 되죠. 이렇게 되면 생각 자체 하는 것도 요이하게 되고 생각하는 것도 유유하게 그냥 자연적으로 그냥 생각이 들고 말입니다. 부처님께서도 얘기하셨지만 “악한 거나 선한 거나 둘로 보지 마라.” 이랬죠. 그거는 이 모두를 합류화시키는 데 있는 겁니다. “이 몸뚱이도 나 하나로만 보지 마라. 수천, 수천 개가 이 몸속에 살아 있다. 그것이 바로 내 모습이자 내 생명들이다. 그러니깐 너 하나만의 모습을 보고선 너라고 그러지 마라.” 이랬죠.

그런데 이게 말로는 할 수가 없는 말이죠. 둘 아닌 도리를 어떻게 실천을 하느냐 하는 그 얘기는 내가 할 얘기가 아니에요, 사실은. 여러분들이 그대로 마음 놓고 생각 없이 그냥 “아, 이것 좀 먹어 보오.” 이러고 줬는데, 그냥 줬는데도 그냥 둘 아닌 줄 알아라 이거죠. 그걸 생각을 일일이 해서가 아니라. 둘 아닌 줄 알고 이렇게 줬어도 그렇고 받았어도 둘 아닌 줄 알게 되면은 이 받은 것이 저절로 일로, 이 대가가 일로 가요. 가는 줄 모르게 가고 오는 줄 모르게 온단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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