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을 점안하실 때 어떤 마음으로 하시는지요?
본문
질문
제 짧은 생각으로는 큰스님께서 직접 점안해 주신 선원의 부처님들은 눈 아닌 눈이 트였고, 귀 아닌 귀가 열려서 오고 가는 중생들의 마음을 둘 아니게 이끌어 주신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스님들께서는 부처님을 점안하실 때 어떤 마음으로 하시는지 그리고 어떤 능력이 주어져 있는지 그것이 궁금합니다. 그리고 저희들이 어떤 마음으로 그 부처님께 예를 올려야 참다운 예배가 될 수 있을는지 가르침을 구합니다.
댓글목록
큰스님 말씀
속 눈이 있고 겉 눈이 있습니다. 속 귀가 있고 겉 귀가 있습니다. 과거의 내가 살던 나의 자성 부(父), 즉 지금 나를 끌고 다니는 부가 있습니다. 그 자성 부와 현실에 사는 자(子)가 둘이 아니게 눈이 밝아져야 속 눈을 떴다고 합니다. 그래서 내가 정신세계 50%를 왕창 간파하려면 딱따구리가 나무 뚫듯이 언제나 자문자답하면서 생각 하나하나, 움죽거리는 하나하나 모두가 둘이 아니라는 걸 아셔야 됩니다. 왜냐하면 몸뚱이 속의 모든 생명체 의식들이 먹는 것도 혼자 먹는 게 아니고 하는 것도 혼자 하는 게 아니고, 말하는 것도 혼자 하는 게 아니고 만나는 것도 혼자 만나는 게 아니고, 일하는 것도 혼자 일하는 게 아니고 돈 버는 것도 혼자 버는 게 아니고, 전체가 혼자 하는 게 없기 때문입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세요. 여러분 몸속에 그렇게 많은 생명들이 있는데 혼자 먹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공생이면서 공심이에요. 그리고 공용, 공체, 공식화하고 돌아가고 있죠.
그러니 내가 잘못했다고 하더라도 잘못한 것이 없으며 병고가 있다고 하더라도 개별적인 나에게 병고가 있는 게 아니며 업이 있다고 해도 내게 업이 있는 게 아니다. 붙을 자리가 없다 이겁니다. 그렇게 많은 것이 공동 분담으로 쉴 사이 없이 찰나찰나 돌아가기 때문에 쉬었다가 가다가 쉬었다가 가다가 이래야 그게 붙을 자리가 있는데, 쉴 사이 없이 돌아가거든요. 한 찰나에 돌아간단 말입니다. 그런데 거기 먼지 앉을 자리가 어디 있겠느냐 이 소립니다. 그러니까 사람이 그렇게 너그럽고 넓고 크게, 좀 더 지혜롭게 마음을 냈어야 하는데 여러분은 마음으로 항상 살아오던 습과 착에 매달리고 애정, 사랑, 욕심, 악의적인 애욕이라든가 이 모든 것을 다 한데 안고서 생각을 안 할 수가 없으니 거기에 그만 막히는 거죠.
더군다나 배우는 사람이나 가르치는 사람이나 똑같이 기복으로만 이끌어 가고 따라가니 구덩이에 빠질 수밖에요. 예를 들어서 옛날에 부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찰은 많지만 그 사찰에 사람이 있어야 부처가 있느니라. 장님이 장님을 끌고 가다가는 넘어지기도 하고 구덩이에 빠지기도 하지만 눈 뜬 사람이 장님을 끌고 갈 때는 절대로 구덩이에 빠지지 않느니라.”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침착하게 잘 생각하셔서 다른 어떤 분들보다도 공부들을 열심히 하셔야 될 것입니다.
이 얘기를 먼저 해야만이 납득이 될 것 같아서 얘길 했습니다. 부처님 점안식을 함으로써 그 속 눈이, 우리들의 마음이 보이지 않는 세계의 일체 부처님의 마음과 항상 통하게 됩니다. 부처님의 마음은 항상 여러분 마음으로 통해서 갑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통하는 줄 모르고, 받아들일 수가 없고, 그릇도 없고 그래서 받아지지 않는 것뿐입니다. 일체제불과 우리 스님네들의 마음이 첨보되고 종합돼서 한마음으로 눈, 귀, 발, 손 없는 손, 몸이 오고 감이 없이 오고 가는 그 자체를, 그 마음을 그대로 전달해 놓은 겁니다. 꽃에도 우리의 마음을 전달하면 아주 이쁘게 자랍니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이 ‘아휴! 저건 별로보기 싫어.’ 하면 그것도 빨리 시듭니다. 정말입니다! 그렇듯이 여러분으로 하여금 눈 밝고 귀 뜨게 해서 발 없는 발, 손 없는 손으로 가정을 이끌어 갈 수 있도록 그 마음을 발전시키고 창조력을 기르게끔 스님네들이 환희심을 가지고서 이끌어 주는 그 마음이 저 부처님한테 다 실렸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은 이제부터 저 법당에 계신 부처님을 둘이 아니게 끌어 잡아당겨서 내 마음의 뿌리, 주인공에다 놓고 삼배를 올리든지 일배를 올린다면 정말 좋을 겁니다. 급하면 일배를 올려도 삼배가 되는 것이고 급하지 않으면 삼정례를 그냥 하시고, 칠정례나 팔정례나 삼정례나 일정례나 다 똑같습니다. 급하면 일정례를, 급하지 않으면 칠정례를 해도 되고 삼정례를 해도 됩니다. 그러니까 상황에 따라서 하는 거지 못 박아 놓은 게 아니다 이 소립니다. 이 세상 모두가 그래요. 먹고 사는 것도 모두 고정되게 못 박아 놓은 게 아니지 않습니까? 이 때에는 이거를 해 먹기도 하고 저 때에는 저걸 해 먹기도 하고, 어떤 때는 국수도 먹고 어떤 때는 밥도 먹고 어떤 때는 잡곡도 먹고, 고정되게 먹는 게 없지 않습니까? 그거와 같이 마음도 역시 고정된 게 하나도 없습니다. 마음 씀씀이도 고정된 게 하나도 없어요.
지금 점안식 얘기 하다가 이리로 가고 저리로 가고 하는데 말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해 놓으시면 여러분의 마음이 아주 간편하죠. 저 부처님 한마음을 끌어 잡아당겨서 내 마음으로 통하게끔 하나로 놓고 절을 하고, ‘주인공, 당신만이 해결할 수 있어.’ 하고 일배를 하더라도 그렇게 친근히 하신다면 아니 될 게 하나도 없어요. 모두 자기가 생각하고 움죽거리고 행을 하셔서 체험을 하시고 그 맛을 본다면 ‘부처님께서 보이지 않는 데서 저렇게 베푸시니 이렇게 묘하고 광대무변한 법이 또 어디 있을까!’ 하고 정말 한나절 울어도 시원치 않을 만큼 그렇게 즐거움이 있으실 겁니다.
- 이전글불교를 믿어야만 구원의 길을 갈 수 있는지... 21.10.25
- 다음글저의 근본과 저 사이의 칸막이를 활짝 젖히려면? 21.10.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