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직 참마음만을 전달하며 살아가려면... > 길을 묻는 이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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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참마음만을 전달하며 살아가려면...

본문

질문

“부처님께서는 마음과 마음을 전달하지 않으면서도 전달을 했고 이렇게 지금까지도 삼천 년 전 오늘이나 삼천 년 후 오늘이나 하나인 것입니다.”라는 큰스님 법문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그 말씀을 읽고 또 읽으면서, 시간도 공간도 한정되지 않고 오직 참마음을 전달하고 계신 부처님이 현현히 살아 계심을, 그리고 부처님뿐만 아니라 스님을 포함한 모든 선지식들께서 저희와 둘 아니게 항상 하심을 온전히 느낄 수 있었습니다. 저희가 나로 한정지어진 삿된 마음이 아닌 오직 참마음만을 전달하며 살아가려면 어떻게 수행해 나가야 하는지요. 

댓글목록

큰스님 말씀

관리자님의 댓글

관리자 작성일

예전에도 여러분한테 간단하게 얘기를 했습니다마는 우리 인간은 물질을 세우고, 내 몸뚱이라고 세우고, 말을 세우고, 이름을 세우고 이러기 때문에 자기 참마음의 전달이 되지 않는 겁니다. 참마음의 전달이 속속히 될 수만 있다면 참으로 이렇게 좋은 법이 없을 겁니다.

이렇게 좋은 법이 없건만 ‘어쩌면 이렇게 좋은 법을 모를까?’ 하는 안타까움에서 잠깐 일체 만물에 대한 문제를 생각해 봤습니다. 모든 무정물이나 생물이나 또는 날짐승들이나 낮은 동물들은 다 일 년에 지나가는 모든 것을 알고 생활을 하고, 또는 어떠한 무리가 닥쳐오는 것을 알고 지내고 있고, 기상이 나쁘다는 걸 알고 있고, 갖가지로 모두 알고 지내고 있는데 우리는 인간으로서 자유스러운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마음대로 제대로 전달을 못하는 원인은, 바로 몸뚱이와 말과 물질에 대한 욕심과 착을 떼 버리지 못해서 일이 벌어진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다고 떼 버리라고 해서 쉽게 떼 버려지는 게 아니라 우리 마음 밖에서는 절대로 내 자성불을 찾을 수가 없으며, 자성불을 찾지 못한다면 일체 만물의 마음을 모르는 것입니다. 모르기 때문에 전달을 못하고 또 일체 만물의 마음을 전달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사는 데 얼마나 복잡다단하고 괴롭습니까? 한 가정에서도 마음이 맞지 않으면은 지옥이라고 했는데 우리는 전체 만물과 더불어 같이 응용하고 서로 마음을 주고받는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여러분은 때에 따라서 내 생각의 범위 내에서 내 생각만 해서, 남 생각을 안 하고 남의 속에 들어가 보지도 못하면서 내 생각대로 말을 해 버리고 맙니다. 또 내 생각의 차원에 따라서 옳다고 주장하고, 또 내가 아니면은 이런 건 못한다고 하는 자만심, 이런 것 때문에 그르치는 겁니다, 모든 게. 벌레 하나도 허투루 볼 수가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예전에 운문 스님이 그런 말씀을 하셨답니다. 어느 날 대중을 모아 놓고 “이 세상에 모든 게 왈가왈부하는데”, 다시 말하면 ‘광활한데’ 하는 소립니다. 그러니깐 복잡다단하다는 얘기라고도 볼 수 있겠죠. 종이 울리니 어째서 너희들은 칠조 가사를 입느냐고 하셨답니다. 종소리를 듣고 어째 칠조 가사를 입느냐는, 뭣 때문에 그 칠조 가사를 입느냐 이런 말이죠. 거기에는 참 심중 깊은 의미가 들어 있다고 봅니다. 그 소리를 듣고 대중들은 제각기 달리 들은 겁니다. 똑같이 들은 사람이 하나도 없어요. 아주 심중 깊이 생각하고 그 말씀을 한마디 간단하게 하셨건만, 그건 말씀이 아닌 말씀이겠지요?

가사에는 칠조 가사, 구조 가사, 오조 가사가 있는데 최초로 가사를 두를 때 어떻게 생각을 했느냐 하면은 한 폭이면 한 폭, 두 폭이면 두 폭, 한 오락지면 한 오락지 이렇게 시주를 한 거니까, 오조는 조그만 오락지들 모아서 한 거고, 칠 폭을 얻으면 칠조로 하고 또 구 폭을 얻으면 구조로 하고 이렇게 한 걸로 알아듣는 사람이 있고, 어떤 사람은 심중 깊이 들었겠죠. 우리가 그 뜻을 한번 음미해 본다면 대답을 가벼이 할 수는 없습니다. 여러분 마음대로 생각하십시오.

예전에 여러분이 질문을 하고 말을 했습니다. 나는 또 대답을 했습니다. 이렇게 지금처럼 말입니다. 그러면 듣는 마음이나 대답하는 마음이나, 마음과 마음을 전달을 하는 겁니다. 말로 전달을 한 게 아니라 마음으로 전달이 된 겁니다. 여러분이 볼 때에 마음 밖에서는 부처를 찾을 수가 없거니와 마음 밖에서 어떻게 나를 찾으며, 마음 밖에서 어떻게 부처님의 배짱을 알 수 있겠느냐는 얘깁니다. 수천수만의 조사들의 그 배짱을 어떻게 알겠느냐? 그 말씀 한마디, 의미 깊은 말씀 한마디를 내던졌건만 그것을 모른다면, 내 소견만 소견이라고 하지 남의 소견을 모르니까 그거는 바로 귀머거리나 똑같은 얘기죠.

예전에 내가 이런 말을 했죠? 어느 스님이 탁발을 하러 가서, 보리쌀 뜨물 한 그릇을, 가난한 집에서 바리때에 담아 주는 거를 먹고서 너무 가엾어서 나무 한 짐을 해다 주러 갔노라고요. 나무 한 짐을 잔뜩 해 가지고 내려오니까 은사, 즉 산 부처가 있다 하는 소리가 “이놈아, 어쩌면 그렇게 좁으냐?” 이거죠. 너는 어째 그렇게 좁으냐? 너의 몸뚱이를 등을 받쳐 놓는 등대라 한다면 네 등잔은 마음이니라. 그런데 마음으로 말하면 거기엔 또 기름도 있어야 하고 심지도 있어야 된다는 얘깁니다. 심지도 있고 다 있는데도 불구하고 성냥으로 불을 당기지 못하는 사람은 사람값에 못 가. 무주상 보시(無住相布施)를 할 줄 모르는 사람은…, “나무를 한 짐 해줘 봤자 한 번 태워 버리면 그뿐일 것을, 그렇게 마음이 옹졸해서야 나무 한 짐 한 본의가 어디 있겠느냐.” 하면서 작대기로 정강이를 때렸다고 합니다. 그러니깐 나뭇짐째 그냥 디굴디굴 굴러서 낭떠러지로 떨어지자 거기서 ‘아차!’ 하고선 그 도리를 깨쳤다 합니다.

그런 거나 마찬가지로 우리가 한마디 들으면 가정에서나 도량에서나 자기 범위 내에서 생각을 하고 자기 차원에서 생각을 하지, 남의 차원에서는 좀체 생각하지 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고가 벌어지는 거죠. 내가 좀 더 그 도리를 이해를 하고 그쪽 방면으로 한번 서 보는, 잘못됐든지 잘됐든지 내가 서 보는 그런 마음이 돼야 하고, 그 마음이 됐다면 남들과도 서로 마음과 마음으로 전달을 하게 되는 자비심이 생겨서 가정도 조화를 이루고 또 생활 속에서도 조화를 이루죠. 인간이 살아나가는 데, 부부가 만나서 사는 데도 간단하게 생각이 되지마는 사람 사는 게 그렇게 간단하지는 않습니다. 가다 보면은 그것이 너무도 복잡하고 다단합니다.

그러고도 생활에 의해서, 자기 인연에 의해서 천차만별로 자기한테 주어진 대로 생활을 하게 돼 있죠. 장사꾼은 장사를 하고 정치인이면 정치를 하고 말입니다. 뭐든지. 내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그렇게 복잡다단하게, 내 몸도 복잡다단하게 생긴 겁니다. 그래서 한쪽이 폐허가 되면 또 한쪽이, 즉 말하자면 공장장이 폐업을 하고 파업을 일으킨다면 몸 전체가 기울어지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몸도 복잡다단하고 모든 생명들이 내 몸 안에 형성이 돼서 한 사람의 선장으로서 마음을 먹게 돼 있으니 얼마나 복잡합니까? 그런 데다가 가정도 그리 쉬운 건 아닙니다. 이 세상에 살아나가는 사회도 복잡다단합니다. 세계는 물론이거니와 우주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마음과 마음을 전달한다, 마음과 마음을 서로 주고받는다는 뜻은 우리 마음에 의해서 모든 것이 결부되어야 하는 것을 말하죠. 여섯 가지가 우리 몸 안에 있는 거를 비유를 한다면 등, 등대, 기름, 심지, 성냥, 사람이 움죽거려야 켭니다. 그래서 여섯 가지가 다 주어져 있다는 겁니다. 주어져 있는데도 불구하고 진수성찬을 차려 놓고 ‘너는 그것을 뭣 때문에 먹느냐’ 하는 거나 똑같습니다. ‘지금 칠조를 뭣 때문에 입느냐, 종이 울리는 소리를 듣고 너는 뭣 때문에 칠조를 입느냐’ 이런 것도 ‘밥을 다 해 놓고 먹을 걸 차려놓고 너는 뭣 때문에 그걸 먹느냐’ 이런 거나 똑같은 문제죠. 너는 뭣 때문에 사느냐? 이런 것도 똑같은 얘깁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 마음 하나로 인해서, 이 말은 참 심사숙고하고 들어야 하는 문제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이 체가 없으면서 듣고 있고, 나도 체가 없는 마음이 지금 움죽거려서 이 말을 하고 있는 겁니다. 그 듣는 마음과 하는 마음이 둘이 아닌 것입니다. 이것을 잘 생각해 보십시오.

마음 밖에서는 찾을 수가 없으니 마음 안에서 일체 만법의 활용을…. 자기의 환경에 따라서 자기에게 주어진 데에 따라서, 자기 차원에 따라서 말입니다. 지금은 예전과 같이 등잔과 등대가 있는 게 아니고 코드만 가지면 되는 세상입니다. 지금 이렇게 발전이 됐다는 얘깁니다. 예전에는 그렇게 여섯 가지 방편을 썼지마는 지금은 여섯 가지가 한 가지가 될 수 있고 한 가지가 여섯 가지가 될 수가 있는 거죠. 여섯 가지만 여섯 가지라고 볼 수 없는 거죠. 한생각에, 코드 하나에 끼웠다 뺐다 할 수만 있다면 안에서 끼고 바깥에서 끼고 할 수 있다면, 안에서 끼면은 바깥에 벌써 환하게 비치는 거 아닙니까? 가설은 본래 돼 있는 거고. 우리 인간이 살아 있다 하면은 벌써 이 세상 가설은 다 돼 있는 겁니다.

여러분이 그대로 마음과 마음을 전달해서, 즉 끊임없는 옛부터 지금 여기 나오기까지, 마음을 전달해서 이날까지 나온 것이지 마음을 전달해서 나오지 않은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래서 “끊어지지 않는 예로부터” 하는 소리는 억겁을 거슬러 올라가서 얘긴데, 그때서부터 마음과 마음을 전달하고 마음을 계발하고 마음의 계발이 됨으로써 진화가 되고, 진화가 됨으로써 몸이 바꿔지고 바꿔짐으로써 옮겨 놓고, 옮겨 놓음으로써 우리는 예까지 온 것인데, 지금 옮겨진 몸만 몸인 줄 알고 있죠. 어저께 굼벵인 줄 모르고 오늘 매미인 줄만 아는 그러한 속 좁은 마음이죠. 과거심도 현재심도 미래심도 한데 뭉쳐서, 일심(一心)도 고정된 게 없다는 걸 알 때에 비로소 우리는 생수 맛을 볼 수가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 전자에는 전자대로 끊어지지 않고 옛부터 오는 마음과 마음이 전달되는 이 마음을 “예로부터” 했단 말입니다. 옛 자리나 지금 자리나 똑같습니다.

우리는 인간이 돼 가지고 일체 만물의 선장인 부처라는 말을 들으면서도 왜 그렇게 폭이 넓지 못하고, 팔이 넓지 못하고, 마음이 넓지 못해서 우주의 근본과 일체 만물의 근본을 한마음에 넣고 굴리지 못합니까? 물론 새들도 재잘거리고 입으로만 말을 하지, 도대체 마음으로 말을 하지를 않아요. 그 말소리를 들을 수는 있죠.

그러니 그러한 문제를 놓고 볼 때 날아다니는 새도, “엄매 엄매” 하고 우는 소도 심중 깊이 마음으로써 말을 했다면 그건 말이 아닌 마음입니다. 마음을 전달한 겁니다. 아마 운문 스님도 마음을 전달해서 말을 했는데 하나도 듣는 사람이 없다면 그것은 무효가 되는 것입니다. 그 말씀이 무효가 되는 거죠. 그걸 한 사람이라도 들었다면 정말이지 이것은 마음을 전달한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 마음의 보배를, 우리가 싱그럽게 공부할 수 있는 그 마음을 가질 때는 언제나 나를 세우지 말고 남에 참견하지 말고 주변에 어떠한 문제가 있더라도 남을 탓하지 말고. ‘남이 이렇게 해서 이렇다’ 이러지 마세요. 남의 탓이 절대 없습니다. 자기가 모든 것을 놨을 때, 주인공에다 모든 거를 놨을 때는 스스로 돌아갑니다. 자기가 생각한 대로 스스로 돌아갑니다. 완화되고 그것이 아주 스무드하게 돌아가는데, 말로 이게 틀리다 저게 틀리다, 이 사람이 틀리고 저 사람이 틀렸다고 이런다면은 공부하는 거는 틀려 버렸고, 또 한 가지는 자기가 생각한 대로 돌아가질 않습니다. 그리고 오히려 말만 벌어져가지고 싸움만 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공부하는 데 심중 깊이 생각해야 할 점이라고 봅니다. 자기 생각대로 말하고 자기 생각대로 하는 그러한 관습적인 습을 몽땅 떼야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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