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등공법(平等空法)에 대해서... > 길을 묻는 이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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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등공법(平等空法)에 대해서...

본문

질문

저희들이 자주 부르는 ‘삼세가 둘 아닌 노래’를 무심코 음미해 보다 보니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1절의 가사 중에 “일체가 내 부모 내 자식 아님 없거늘 어찌 끝없는 흐름에 평등공법 아니랴.” 하는 대목에서는 있는 그대로의 둘 아닌 도리인 법을 설하는 내용인 것 같고, 2절의 가사 중 “생명들을 둘 아니게 조복받아 공심이면 자유권을 자재하는 평등공법 아니랴.” 하는 대목에서는 생명들을 둘 아니게 조복받아 공심인, 행 아닌 행을 말씀하신 것 같습니다. 그것은 본래 그대로인 평등공법을 우리가 진정 알고 실천하기 위해서는 자유권을 자재할 수 있어야만 된다는 말씀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 봤습니다. 저의 생각이 맞는지요. 

댓글목록

큰스님 말씀

관리자님의 댓글

관리자 작성일

우리가 생각하면 걸어온 발자취가 없듯이 우리가 지금 생활하고 가는 것이, 듣는 것도 혼자가 아니고 또 보는 것도 혼자가 아니고, 말하는 것도 혼자가 아니고, 먹는 것도 혼자가 아니고, 만나는 것도 혼자가 아닙니다. 모두가 같이 더불어 돌아가는 이치죠. 그렇기 때문에 상하, 즉 사방을 총합해서 우리가 평등공법(平等空法)이라고 하는데, 우리 그 모두를 합해서 공했다…. ‘색(色)이다, 공(空)이다’ 하는 것은, 우리가 지금 말하듯이 하나도 혼자 하는 게 없고 혼자 걸어온 게 없어요. 여러분이 지금 이렇게 걸어왔지만, 내가 걸어왔다고 하지만 내가 걸어왔다고 내세울 게 없어요.

내가 항상 말씀드리죠? “몸속에 내 자생중생들이 많은 것이 다 나이기 때문에 내가 혼자 걸어온 게 없노라.” 하는 거요. 혼자 보는 것도 없고 혼자 듣는 것도 없습니다, 지금도. 그러니 내세울 게 어디 하나나 있겠습니까? 그러면서도 외부의 모든 생활 자체가 혼자 사는 게 또 하나도 없습니다. 그렇기에 모두가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의 이 세상만사가 다 공했다고 하는 겁니다. 보이면서도 보이지 않고 보이지 않으면서도 보이는 그 자체가 그대로입니다.

그래서 원칙은 영원한 것을 우리 자체가 모르기 때문에, 즉 50% 반쪽만 알기 때문에 우리는 ‘죽는다, 산다’ 여기에도 무척 걸리는 모양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걸릴 게 하나도 없는 자체가 무엇인가 하면 우리 일체 만물만생이, 즉 말하자면 가다가 만나고 가다가 보고 가다가 듣고 할 때마다…, 이런 게 있죠. 밥을 지어야 될 텐데 소켓이 맞지 않으면, 거기다 끼워도 맞지 않으면 불이 들어오질 못해서 밥을 못 지어 먹습니다. 그렇죠? 그러니까 우리 마음이 모든 내 자생중생들을 다스리면서 화(化)하게 만들어야 바로 그게 화한 부처님의 마음과 내 마음이 둘이 아니어서 항상 소켓이 맞는 것입니다. 그래서 통신이 되는 것입니다. 일체제불의 마음은 항상 우리들의 마음과 직결이 돼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마음이, 즉 말하자면은 주장자라고 하죠. 그런데 그걸 안테나라고 해도 됩니다. 내 마음의 안테나를 세워 놔야 일체제불의 마음이 내 마음을 통해서 불이 들어올 수가 있고, 즉 말하자면 만약에 소켓이 맞지 않는다면 불이 안 들어옵니다. 그래서 밥을 지어 먹을 수도 없습니다.

예전에도 얘기했지만 우리는 어항 속에서 한 발짝도 떼 놓을 수 없는 그 창살 없는 감옥에서 허덕이고 있습니다. 우리가 공기주머니에 있는 것이 어항 속에서 고기가 살듯 하는 것과 마찬가지니 그 어항 속에서 벗어나야 할 것이며, 내 자생중생들 그 자체 악업 선업에서, 그 업 굴레에서 벗어나야 될 것이다. 첫째는 내 업 속에서 벗어나야 그 어항, 업 속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벗어나야 구경경지(究景境地)에 이르게 되어 자유스럽게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자유인! 즉 자유인이란 부처를 뜻하는데 여래(如來)라고도 할 수 있죠. 여래라는 뜻은 우리가 한데 합쳐서 전체 돌아가면서 나투고 화(化)해서 돌아가는 그 평등공법(平等空法)이 즉 여래의 집이라고 합니다. 여래의 부처라고도 하고. 그러니까 우리는 생활선(生活禪)이자 여래선(如來禪)으로서 지금 공부하는 것입니다. 여래선!

전체 우리가, 하나하나가 이렇게 가다가 보면 꽃이 이쁘게 피었다 하더라도 한순간에, 찰나에 꽃과 나와 둘이 아니게 그 소켓이 맞기 때문에 딱 맞아 들어갑니다. 그러면 그 순간에 꽃은 화(化)합니다. 꽃이 화해서 내가 됨으로써 바로 나는 수많은 거를 넣어도 넣어도 두드러지지 않고 여기서 수없이 꺼내도 줄지 않는 도리가 있습니다. 그러니 여러분이 그렇게 알아야만 되겠다 하는 겁니다.

이 모두가 그러하니 우리는 이 껍데기를 벗기 전에 우린 자생중생들을 화(化)하게 해서, 즉 말하자면 보현(普賢)으로 해서 응신(應身)이 돼서 뭇 중생들의 마음을 통해서 응해 주게끔 만들어야 됩니다. 할 줄을 모르는 말이지마는 현재의 우리가 알고 듣고 감지하고 갈 수는 있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광대하고 무변하고 아주 참, 말로는 행할 수 없는, 말로는 수요를 말할 수 없는 이런 평등공법(平等空法)이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잘 알아서 여러분이 여러분의 밥을 먹어야 배가 부르듯이 우리가 평등공법이라 하는 것은 그대로 마음이 연결이 돼서 고정됨이 없이 돌아가는 그 뜻의 그릇을 말하고, 한 찰나에 만났다 한 찰나에 떨어지고 하는 그 자체를 볼 때에 우리는 한 찰나에 붙으면 바로 부(父)가 되고 한 찰나에 떨어지면 자(子)가 되듯이 한 찰나에 붙었다 떨어지면은, 이렇게 말할 수 있죠. “모두가 둘이 아닌 까닭에 물은 물대로 있고 산은 산대로 있느니라.” 성철 스님께서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 이렇게 말씀하신 자체가 법을 말하는 겁니다. 그렇지만 법이 한데 공(空)한 것을 말할 때는 바로 둘이 아닌 까닭에 법은 법대로 있고 바로 행은 행대로 있다 이런 뜻이죠.

그러니까 찰나에 붙었다 찰나에 떨어집니다. 여러분도 그러지 않습니까? 여러분이 “여보!” 하고 부르면 “그래.” 그러곤 대답을 하고 한 찰나에 그 마음이, 소켓이 딱 끼어지니까 둘이 아니게 불이 일어나서 마음을 서로 털어놓을 수 있는 겁니다. 그러다가 딱 떨어지면 소켓이 싹 빠져서 딱 떨어져서 또 나는 나, 너는 너예요. 나는 나, 너는 너. 이렇게 떨어졌다가 또 한 사람하고 또 딱 붙으면, “아버지” 하고 붙으면 또 아버지가 되고 아들이 돼서 딱 붙어서 또 소켓이 싹 들어가서 “아버지! 뭐, 어쩌고….” “응, 응….” 이러곤 한데 붙습니다. 하하하. 그렇게 수없이, 끝없이 돌아갑니다, 이 세상만사가.

그러는 것을 어떻게 나 하나가 개별적으로 ‘아이고, 잘했다, 내가 설법을 했다, 내가 잘 안다’ 이렇게 할 수가 있겠습니까? 여러분이 여기 와서 수없는 사람들이 좋아지고 모두 깨쳐지고 또는 병도 낫고 여러 가지 각색으로 성취한 사람들이 헤아릴 수 없지만 나는 내가 낫게 해 주고 내가 말을 해 줘서 여러분이 깨쳤단 말 안 합니다. 왜? 내가 없기 때문이죠. 내가 따로 없기 때문에. 여러분이 있어야 내가 있고 내가 있어야 여러분이 있듯이 또는 내 몸도 공(空)해서 내가 혼자 한 게 없기 때문에 내세울 게 없다는 사실이죠.

그러니 여러분도 그 뜻을 아시고 그저 자유스럽게 살 수만 있다면, 어항 속에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 모든 그 오신통(五神通)에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 오신통도 벗어나야 하니까요. 벗어날 수 있다면 정말 자유스러운 자유인으로서 삶의 보람을 느끼고 세세생생에 남의 모든 마음을 집어넣어서 굴려 내도 손색이 없고 굴려서 내보내도 손색이 없는 그런 자유인이 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구경(究竟)에 이르고 열반(涅槃)에 이르는 그런 길입니다. 여러분이 잘 생각하고 다스리시리라고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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