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보고 듣고 말하고 울고불고 하는 이놈은 누구입니까?
본문
질문
“내가 없다. 나는 공해서 없다.” 하시는데 저는 그 말씀이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번연히 이렇게 보고 듣고 말하고, 울고불고 화내고 하는 이놈은 누구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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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스님 말씀
참, 마음이라는 것이 상당히 요상합니다. 보이지도 않는 것을, 마음내기 이전을 말해서 자기 불성이라고 하죠. 영원한 근본이라고도 하고 뿌리라고도 하죠. 그런데 그 마음을 냈다 하면 법신(法身)이라고 하고, 그 마음에 따라서 육체가 움죽거린다 하면 화신(化身), 응신(應身)이라고 하죠. 화신은 바꿔지는 걸 말하고 응신은 서로가 대하는 걸 말하죠. 그래서 그걸 종합해서 주인공(主人空)이라고 했던 거죠.
그런데 마음을 안 냈을 때 나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마음을 냈을 때 나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육체를 움죽거릴 때 나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또 내 몸속에 많은 중생들이 들어 있습니다. 그런데 장이냐, 심장이냐, 위냐, 식도냐, 방광이냐, 콩팥이냐, 정맥이냐, 동맥이냐 하는, 일체 이름해서 움죽거리는 그 자체가 바로 어떠한 부분에서 움죽거릴 때 나라고 할 수 있겠느냐. 정맥이 움죽거릴 때 나라고 할 수 있겠느냐, 동맥이 움죽거릴 때 나라고 할 수 있겠느냐. 그 많은 생명체들이 작용을 하는데 어떠한 것이 작용할 때에 내가 했다고 할 수 있겠느냐 하는 거죠.
여러분이 잘 생각해서 알아보신다면 참 기가 막힐 일입니다. 왜냐하면 생각나기 이전에도 내가 했다고 할 수가 없고, 또 생각을 냈을 때도 내가 했다고 할 수 없고, 몸이 움죽거릴 때나 육체 속에서 정맥 동맥이 움죽거릴 때, 또는 눈귀가 움죽거릴 때도 내가 했다고 할 수 없죠. 그런데 이 천차만별의 이름이 전부 내 한 그릇에 있습니다. 내 몸뚱이 한 그릇에. 그런데 그게 다 누가 하는 거죠? 누가 하는 겁니까? 모두 본인이 하는 거죠? 남이라고 할 수 없죠? 몸 안에 들어 있는 것도, 어떠한 거위 한 마리도 나 아님이 없죠? 그러니 내가 했다고도 할 수 없고 안 했다고 할 수도 없어요. 그런 걸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러니 어떠한 거를 할 때 내가 했다고 할 수 없으니 “나는 없다” 하는 겁니다. 나는 없다! 여러분이 생각해 보실 때, 여러분 자체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정맥 동맥이 쉬지 않고 뛰면서 이어져 돌아가는데, 정맥이 뛸 때 내가 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동맥이 뛸 때 내가 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전체를 볼 때에 어떤 걸 내가 했다고 할 수 없으니까 “내가 없어!” 하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없어! 나는 공동체야! 공동체니만큼 모든 것을 해도 함이 없이 하는 것이다. 그래서 자기 몸이 함이 없이 하기 때문에 손도 손 없는 손이 하고 있다. 그리고 없는 발이 한자리를 디뎠다. 이게 평발의 뜻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에게 부처님 법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고 항상 말씀드렸죠? 그래서 여러분 법이, 여러분 마음이, 여러분 작용하는 생활이 그대로 부처님 법이고, 여러분이 법신이자 부처님이자 바로 화신입니다. 그리고 상대성 원리로써 상대가 있기 때문에, 내가 있기 때문에 상대가 있는 거니까 항상 응신으로서 베푼다 이겁니다. 타의의 어떠한 신이 있어서 그러는 게 아니니까 나 자체부터 알아야 합니다, 나 자체부터. 나 자체가 이 세상에 나왔기 때문에 상대가 있다는 걸요. 나 자체가 나왔으니까, 내 몸뚱이 속에 있는 그 자체가 모두, 바로 악업 선업이 인과가 돼서 영혼의 근본과 더불어 같이, 어머니의 살을 빌리고 아버지의 뼈를 빌려서, 즉 정자와 난자를 말하죠. 그래서 합류화돼서 합성 체제로서 형성이 됐다는 얘기죠. 그러니까 모두 몸속에서 작용을 하는 거나 외부에서 내 몸뚱이가 작용하는 거나 모든 것이 전체가 함이 없이 하는 겁니다. 왜? 어떤 걸 했을 때 내가 했다고 할 수 없으니까 말입니다.
항상 여러분한테 이렇게 말하죠. 가정에서 아버지 노릇 하랴, 남편 노릇하랴, 아들 노릇 하랴, 형님 노릇 하랴, 아우 노릇 하랴, 사위 노릇 하랴, 친구 노릇 하랴…, 사회에 나가서 어떠한 회사나 직장에 있다든가 어떠한 지위를 가졌을 때 또 이름이 붙죠? 그러니 따로따로, 몸뚱이 체가 따로 있어서 따로 행하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자동적으로…. 아주 묘법이죠. 그게 묘법입니다. 내가 자연스럽게 자동적으로 “여보!” 하면 뜻과 행과 말이 동시에 남편이 되는 거죠. 그런데 남편 노릇 할 때 내가 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아들 노릇 할 때 내가 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나라고 할 수 있겠느냐는 얘기죠. 아버지 노릇 할 때 나라고 할 수 있겠느냐는 얘기죠. 그거나, 그 지금 말씀드린 거나 모두가 하나로 통과가 됩니다. 이 모두가 내가 했다고 할 수 없고, 내가 됐다고 할 수 없고, 내가 말했다고 할 수 없는 까닭에 모두가 공했다는 겁니다.
모두가 공하고, 모두가 함이 없이 했고, 모두가 비었다. 어느 것도 내가 아니다. 내가 없다! 내가 없으니 물이 있으랴. 물이 없으니 강을 건널 게 있으랴. 이렇게 나오죠? 그러니 한 찰나, 찰나라고 하는 소리도 그 까닭입니다. 찰나에 아버지가 됐다 찰나에 남편이 됐다 이렇게 하듯, 부처님의 마음도 역시 그렇게 찰나에 바로 칠성부처가 됐다가 지장이 됐다가 관세음보살이 됐다가, 약사가 됐다가 용신이 됐다가 지신이 됐다가 온통 그렇게 화해서 나투죠. 자동적으로 이게 됐다 저게 됐다 이게 됐다 저게 됐다 하는데, 여러분이 지금 실질적으로 생활 속에서 하고 계시니까 그걸 납득을 하시죠?
그래서 부처님 마음도 동방에 이름을 지어 놓든가 서방에 이름을 지어 놓든가 지장이라는 이름을 지어 놓든가, 어떠한 이름이든지 그거는 이름일 뿐입니다. 지금 생활 속에서도 아버지다 남편이다 아들이다 하는 거는 바로 이름일 뿐이죠. 그런데 이름이 자동적으로 누구한테나 주어졌지만 누구한테나 주어진 그 이름이 진실하기도 합니다. 영원하기도 하고요. 그래서 알고 본다면 그렇게 공하고 그렇게 ‘내가 없는 가운데 바로 너는 너대로 있고 나는 나대로 있구나. 산과 물이 둘이 아닌 까닭에 물은 물대로 있고 산은 산대로 있구나.’ 하는 거나 똑같습니다. 그러니 마음이라는 것이 참 묘하기도 하고 말로 어떻게 형용을 할 수가 없는 겁니다. 아무리 잘나고 아무리 잘 배우고 권세나 모든 게 아무리 다 좋다 하더라도, 그 마음이 그 사람에게 작용을 한다면 망하든지 흥하든지 둘 중에 하나입니다. 미치든지 성하든지 둘 중에 하나입니다. 그러니까 이거는 순전히 마음의 꼭지에 달려서 끌려다니고 움죽거리는 체(體)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마음이 주인이 아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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