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생에 꼭 깨달음을 얻으리라 다짐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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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안녕하세요. 저는 처음엔 금생에 꼭 깨달음을 얻으리라 다짐했는데 갈수록 마음을 다스리는 게 쉽지가 않습니다. 아직 화나는 마음 하나도 다스리지 못하고 있으니 너무나 한심합니다. 어떡하면 이 마음의 힘이 단단해질 수 있을는지요.
댓글목록
큰스님 말씀
그런데 이 진짜 즉석으로 들어가는 이 공부는 줬다 안 줬다, 잘했다 안 잘했다 이런 논의가 없어요. 따귀를 맞았으면 맞은 대로. 또 줬으면 준 대로 내가 준 것도 아니고 내가 맞은 것도 아니에요. 그런데 내가 관여를 왜 합니까. 금방 요기서 요렇게 따귀를 때렸는데 금방 돌아갔으면 그게 없어지죠. 여기서 잘못됐다고 꼬집고 착을 두고 그냥 애쓰지 말라 이겁니다. 이건 금방 또 없어져요. 찰나찰나 화해서 돌아가는데 어느 때에 그것을 때렸다고 하며 어느 때에 내가 줬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나를 부처라고 세울 수 있을까요? 공부를 했다고 떳떳하게 세울 수 있을까요? 이름해서 세울 게 뭐 있겠습니까? 묵묵히 걸어가면서 바로 그렇게 물 한 그릇 마시면 대장부 살림살이 족할 것을 말입니다. 아까도 시를 한 수 읊었듯이
“음지 양지 없는 천지
한 손 들어 삿갓 쓰고
해와 달을 석장에 걷어 메고
푸른 산 한 발 딛고 물 한 그릇 떠 마시니
대장부 살림살이 이만하면 족하지 않을까.”
책을 읽어서 수많은 팔만대장경을 외로 읽고 거꾸로 읽고 이래도 이 자기의 참 생명수는 맛을 못 봐요. 책이 자길 보고 자기가 책을 보기 때문이에요. 사람은 글자를 볼 때에 글자를 외우고 외운 채로 말을 합니다. 몸 떨어지면 글자도 말도 다 떨어질 것을.
그런데 이 선맥은 어디에서 오는 것인가? 마음으로 마음을 전달하는 데서 선맥이 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자손들을 기를 때 얼마나, 그 자손이 만약에 물에 빠지게 됐다거나 공부를 못해서 영 낙오가 됐다거나 이런다면 얼마나 가슴이 아픕니까. 그 사랑하는 고 마음. 고것이 꺼지지 않는 불입니다. 세세생생에 꺼지지 않는 불! 누구나가 감춰진 불이 다 있어요. 중생도 불이 있고 부처도 불이 있는 겁니다. 여러분이 눈이 없으니까 보지 못해서 그 빛을 발하지 못할 뿐이지 중생이라고 해서 불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스스로서 자기 마음을 자기가 지키지 못하고 모르니까 바로 자기 빛을 자기가 못 보는 것뿐입니다.
어느 스님이 가다 보니까, 어떤 사람이 어엿하게 가다가 고만 어느 뱀소굴로 들어가더란 말입니다. 그래서 잡아서 다시금 또 사람 사는 데로 인도를, 인도환생을 시켜 놓고 껄걸 웃으면서 “내가 지옥으로, 나는 천당으로 가지 않고 지옥으로 가서 이렇게 건지려고 했더니 지옥도 천당도 둘이 아닐세. 삼라만상 내 마음에 다 들어 있으니 나지 않는다, 난다 개의할 게 없노라.”
그것은 보이는 모습을 가져야 산 게 아니거든요. 모습을 안 가졌어도 나 아님이 아니니 모두 내 모습이에요. 모두가 내 모습, 내 마음. 모른다 할지라도 한번 자기가 돼 볼 수 있는 아량과 지혜를 갖는다면 분단이 생기지 않고, 의리가 깨지지 않고, 화목하게 되고, 이해가 되고 슬기로워지고, 바로 이 도의 심을 알게 되는 거죠. 사람사람이 누구나가 급하게 화가 나면 남을 생각할 여지가 없죠. 그러나 한번 숨을 들이쉬면서 안으로 굴리면서 다시 한번 생각해 볼 때는 말도 공손하게 나가고, 또 한번 저 사람이 돼 볼 수 있는 여유도 생기고, 이랬을 때 바로 화목한 것입니다.
화목을 모르고 공한 도리를 모른다면 우리가 지금 천차만별로 돼 있는 생한 도리를 모른다 이겁니다. 하나도 버릴 게 없어요. 하나도 가질 게 없어서 나는 공부를 했는데 하나도 버릴 게 없더라. 그러면 가는 데마다 나고, 가는 데마다 내 자리고, 가는 데마다 내 아픔이고, 가는 데마다 내 웃음이고 즐거움이고 그러니 구태여 내 몸이 어떻게 될까 걱정하고, 또 어떻게 낙오가 될까 걱정하고, 내가 부처가 되려고 앨 쓰고, 내가 깨달아야지 하고 앨 쓰고, 그렇게 발광 안 해도 되지요.
그것이 깨달으려고 앨 쓰지 않는 마음이 있어야, 모든 것을 한데 주인공에서 나온 거 주인공에다가 모든 거 일체 다 놓을 줄을 알아야 사방이 터지지요. 이거는 문이 많은 데서 문을 찾으려니까 어렵고 문이 하나도 없는 데서 문을 찾으려니까 또 어렵다 이겁니다. 이 모두가 그러한 거예요. 우리가 생활하면서, 뛰면서 생각하고 생각하면서 뛰는 이 자체가 그대로 참선이인 거예요. 우리가 앉는다고 하고 앉고, 선다고 하고 서는 그런 사람, 공부 백 날이 가도 못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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