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공을 걷는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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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행 스님의 법문집 제목도 ‘허공을 걷는 길’인데 허공을 걷는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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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스님 말씀
우리가 한마음으로써 점프를 해서 뛰는 것이 허공을 걷는 건데, 지금 여기서 계단을 밟지 않고 오는 것도 허공을 걸어서 온 거예요. 그래서 “길에서 길 아닌 길을 찾아라.” 그리고 또 “뜰 앞의 잣나무니라.” 한 것도 우리가 둘 아닌 도리에서 어느 거든지 둘 아니게 모두가 공생이면서 공심이면서…, 그 뜻이 거기에 다 담겨 있는 겁니다. 그런데 말만 배웠지, 이론만 알았지 도무지 실천에 들어가질 않으니까 그게 무의미하게 그냥 떨어지죠.
이 중세계에서 일체 만물만생이 다 모습은 천차만별이지만 그 모습 속은 모두 곤충 주머니예요. 이 곤충 주머니를 벗어나지 못한다면 우리는 허공 길을 디딜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항상 살아나가는 데 관습과 의식이, 욕심이 모든 게 그렇게 습관이 돼서 그걸 벗어날 수가 없죠. 그러니까 죽어도 자기 모습이 그대로 있는 줄 알거든요. 그래서 지옥고를 딛고 나가려도 디딜 수가 없고, 강을 건너려도 건널 수가 없고, 또 불 수레를 건너가려도 벗어날 수가 없단 말입니다. 그 자기가 있다는 관념 때문에.
그러면 우리가 이 중세계에서 살아나가는 데에 어떻게 살아야 편안하겠습니까? 이 부딪치고 부딪치고, 이렇게 수레가 돌아가면서 부딪치듯, 우리가 살아 있으니깐 이렇게 부딪치는 이 천차만별의 이치, 우리는 거기에서 바로 지혜도 생기고 물리도 터지고 이렇게 하는 겁니다. 그래서 생명은 ‘불’이요, 바로 부딪치면서 살아나가는 것은 ‘교’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이게 진리의 언어지, 어떠한 중들만 불교를 믿는다고 하는 그런 국한된 마음이 아닙니다. 이 불교라는 자체는 끝이 없는 진리인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둘 아닌 일대사의 인연을 맺으셨다고 했죠. 우리가 미생물에서부터 진화되고 형성돼서 부모가 되고 자식이 되면서 연방, 수억겁을 거쳐서 나왔단 말입니다. 그거 나온 거를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렇다면 내 부모 아닌 게 없고, 내 자식 아닌 게 없고, 내 도량 아닌 게 없고, 내 모습 아닌 게 없습니다. 안 그럴까요? 개구리가 돼 가지고 올챙이 적 생각을 못 하지만, 개구리라고 그래 봤자 올챙이 과정을 거쳤단 얘깁니다.
그런데 우리가 먹지만 않는다면, 먹는 게 없다면 이렇게 강도도 없을 거고, 사기도 없을 거고, 싸움도 없을 거고, 그렇지 않을까요? 먹으니깐 똥을 눠야 하고 잠을 자야 합니다. 이 잠자고 똥 누고 먹고 이러는 게 없다면, 그렇게 세 가지를 다 안 할 수 있다면 그건 별천지죠. 부처님의 한도량이죠.
그 한마음 도량에서 관세음보살도 되고, 지장도 되고, 칠성도 되고, 주산신도 되고, 주해신도 되고, 전부 보디가드도 되고, 길잡이도 되고, 의사도 되고, 아니 되는 거 없는데 여러분은 그렇게 그냥 발버둥이를 치고 애를 쓰니…. 자기 나무는 자기 뿌리를 믿어야 공덕이 있는 거지, 자기 뿌릴 믿지 않고 형상이나 이름을 믿고 그렇게 한다면 그것은 저를 벗어나기가 어렵습니다.
또 이런 것도 있습니다, 두 가지가. 하나는 몸체를 두고도 배움의 길에 있어서 속도가 너무 빠르게…, 저 거리를 걸어간다면 보이지 않습니다, 여러분 눈에. 속도가 너무 빠르면 보이지도 않고 바람만 설설 일어나죠. 이런 거 짐작해 보셨습니까? 또 체가 없는 나가 허공 길을 걸어갈 때는 가고 옴이 없이 갔다가 전체를 요만하게 만들어서 갖다 놓고 볼 수도 있죠. 큰 거를 그 가운데 들어가서 보려면은 다 못 봅니다. 작아야 전체를 볼 수 있죠.
여러분들이 그렇게 허공 길을 뛰어넘을 수 있어야만이 마음도리…, 아까 얘기했죠. 관세음보살이 되고 지장보살이 되고 그런다고요. 만약에 이 계단을 올라올 때 마음이 올라온다면 점프해서 그냥 올라올 수 있는데, 몸으로 오려니깐 한 계단 한 계단 밟아야 되지 않느냐. 그런데 그 마음으로는 그렇게 이 세상 삼천대천세계를 두루 할래도 할 수 있는 마음의 도리란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처님과 같이 둘 아니게, 즉 말하자면 어느 모습 하나도 내 모습 아닌 게 없고, 내 생명 아닌 게 없고, 또 내 작용 아닌 게 없고, 내 공식 아닌 게 없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얼른 쉽게 말해서 다 그렇게 어떠한 인연에 따라서 용건이 들어와도 나는 허공 길을 걸어야만 되겠죠. 찰나에 그 모습으로 화해서 나투어야죠. 만약에 짐승이 나를 청했다. 그걸 ‘짐승을 건져야겠다’ 이런다면 내가 그 짐승이 돼야 되겠죠.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내 모습 아닌 게 하나도 없느니라.” 했어요. 그러니까 내 마음 아닌 게 없고, 내 생명 아닌 게 없고, 공용이다, 공식이다 이러는 겁니다. 그러니까 남을 건져 주는 데도, 하다못해 물에서 노는 고기 한 마릴 건져도 내가 수많게 화해서 그 고기로도 들어가고 짐승에도 들어가고 사람에게도 들어가고, 그렇게 해서 바로 그걸 건지는 겁니다.
부처님만 그러신 게 아니라 여러분들도 그렇게 마음공부 하는 분들에 한해서 그렇게 할 수 있다 하는 전제를 하고 지금 하는 겁니다. 마음으로 점프를 해서 계단을 한걸음에 올라올 수 있다면 강은 못 건너가겠습니까? 강 속은 못 들어가겠습니까? 은산철벽은 못 뚫겠습니까? 삼라대천세계는 못 가겠습니까? 두루 하죠. 덮고도 받치고도 남음이 있죠.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그 길을 알아야 요다음에도 허공 길에 발을 떼어 놓을 때 서슴없이 떼어 놓을 수 있다는 얘깁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은 ‘어휴, 나는 뭐, 중생인데 어떻게 허공에 발을 떼어 놓을 수가 있나?’ 이러지만, 우리가 그냥 거기다가 맡기고 관하고 이러는 게 그대로 내가 죽는 방법이요, 내가 함이 없이 하는 방법이요, 둘 아닌 도리를 아는 방법이요, 구경계에 이르는 방법이요, 전부가 아니 되는 게, 아니 하는 게 없는 방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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