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죽은 이름 없는 이름이여 > 길을 묻는 이에게

길을 묻는 이에게


길을 묻는 이에게는
큰스님 법문 중에서 발췌하여 답을 올립니다.

건전한 게시판 문화를 위하여 성격에 맞지 않는 게시물, 광고 등 유해성 글들은 관리자가 임의로 이동, 삭제할 수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 질문을 올리기 전에, 게시된 글들을 참고하시면 많은 도움이 됩니다.

내가 죽은 이름 없는 이름이여

본문

질문

저희 집에 대행 큰스님께서 법회 중에 읊으신 “내가 죽은 이름 없는 이름이여. 나와 남이 두루 같이 죽은 이름 없는 이름이여. 나와 남이 두루 나투는 이름 없는 이름이여. 해산봉은 화산 터져 두루 불이 이름 없는 이름이여.” 이런 게송이 액자로 걸려 있습니다. 스님께서 말씀하시는 공부의 세 단계를 말씀하신 것이라 여겨지긴 하지만 그 뜻을 좀 더 자세히 알려 주시면 공부에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댓글목록

큰스님 말씀

관리자님의 댓글

관리자 작성일

“내가 죽은 이름 없는 이름이여.” 첫 번에 이랬습니다. 이게 무슨 뜻이냐. 이것은 바로 내가 공이라는 걸 안 것입니다. 내가 공했다는 걸 알고 자기가 그냥 함이 없이 생활을 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래서 “내가 죽은 이름 없는 이름이여.” 이랬습니다. 그거를 잘 생각해 보세요.
 
“나와 남이 두루 같이 죽은 이름 없는 이름이여.” 이랬습니다. 이것은, 첫 번에 있는 것은 깨달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깨달았어도, 나를 발견했어도 수억겁을 거쳐 나오면서 그 모든 악업 선업에, 즉 말하자면 의심과 모든 착과 욕심 그런 것이 그냥 모두가 남아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나와 남이 두루 같이 죽은 이름 없는 이름이여.” 둘이 아닌 도를 알아야만이 또 이것이 해당하는 겁니다. 모두가, 죽은 사람이나 산 사람이나 둘이 아님을 알아야 이게 그렇게 되는 겁니다. 우리가 생활하면서 자꾸 배우면서 지혜롭게 자꾸 둘이 아님을 알아야 영계성이나 유전성이나 내 앞에 닥친 이러한 모든 것을 대치해 나갈 수 있는 겁니다.
 
예를 들면 흉갓집이라고 하는데를 싸게 사서 들었습니다, 어느 분이. 그건 왜냐. 이 도리를 믿고 그런 거죠. 그래서 싸게 사 가지고 들어가서 둘이 아닌 도리를 아니까 그냥 삼켜 버린 거죠. 얼른 쉽게 말해서 영에다 영을 넣으니까 영이더라, 그대로. 수만 개를 영에다 집어넣어도 둘이 아니다라는 얘기죠. 그러니까 죽은 사람도 그렇지만 산 사람도 마음이 있으니까 전부 결부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내가 죽은 이름 없는 이름이여.” 이랬듯이 나부터 죽어야 모두가 둘 아니게 할 수 있지 않습니까. 내가 살고, 내가 있다고 자부하는 사람이 어떻게 보이지 않는 마음을 둘 아니게 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이 모든 게 공이다 하는 겁니다. 이것이 항상 고정됨이 없다. 고정됨이 없으니까 함이 없이 하는 거다. 발자국을 떼어 놓아도 떼어 놓은 사이가 없다. 그것에 집착하지 마라. 악을 저질렀다고 해도 어차피 지은 거 그냥 놓아라. 그것은 껍데기가 한 게 아니라 모든 거, 알맹이가 전자부터 한 거 알맹이가 해결을 해야지, 자기가 한 거 자기가 해결해야지 시자라고 하는 이 집이 왜 상관을 합니까? 일일이 왜 상관을 해요? 울고 찌고 바깥으로 헤매고 말입니다.
 
그러니깐 고정됨이 없이 이렇게 간다고 하는 그 자체가, 우리가 말을 해도 항상 이 사람하고 말을 했다가 그냥 그거 무심코 그렇게 놓고 가잖아요. 무심코 놓고 그냥 딴 사람하고 얘기하고, 또 이것 보고 저것 보고 자유롭게 보고 자유롭게 말하고 자유롭게 만나고 자유롭게 하시잖아요. 그게 바로 함이 없이 하는 거 아닙니까? 그런데도, 함이 없이 하는데도 이거는 있다고 우기거든요, 마음이. ‘내가 오늘 이렇게 이렇게, 내가 했는데….’ 이렇게 하거든요.

그런데 이게 고정된 게 하나도 없다 이겁니다. 여러분들이 생활하시면서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누가 왔으면 “어서 와!” 하고 말을 해 놓고 그러곤 갔어요, 얘기하고. 갔으면 그뿐이지 그냥 만나서 얘기했을 뿐이지 거기에 뭐가 있습니까? 또 그것이 바람처럼 달아나갔어요. 또 왔어요. 또 만나고 또 보고 또 듣고, 남편 만나고 자식 만나고, 부인 만나고 자식 만나고 형제 만나고 이래도 그냥 만났을 뿐이지 거기에 뭐, 뭐가 붙습니까. 거기서 뒤에 또 생각이 나면 또 거기다 놓으시란 말입니다. 그 놓고 그냥 하면은 함이 없이 되기 때문에 모든 게, 죄나 이런 것도 다 없다 이겁니다. 선도 없고 악도 없는 그 가운데서 여여하게 그대로 삶을 정말 통탈하게 살 수 있다.
 
그러니 공용으로 행하라. 그냥 행하라는 게 아니라 공용으로 행하라.  이게 두 번째의 둘이 아닌 도리에 관한 건입니다. 그래서 그 습관과 관습, 이 미움과 이쁜 거와 모든 착과 욕심 이런 문제들도 다 거기다가 한데 닥치는 대로 놓으면 이게 둘이 아닌 게 나오죠. 거기다 놓고 가다 보면 다 나오게 돼 있거든요.
 
“나와 남이 두루 나투는 이름 없는 이름이여.” 나와 남이 둘이 아니게 나툰다 이겁니다, 같이 더불어. 나투는 것은 우리가 화해서 변화하는 걸 말합니다. 화해서 변화해서 내가 몸도 바꾸어서 그 사람한테 맞추어서 절충하는 겁니다. 맞게 응하는 겁니다. 응해서 이렇게, 즉 말하자면 공용으로 공식하는 것이 그냥 그대로 여여한 것을 말하는 겁니다. 그러니 이 세 번째 이렇게 하고, “해산봉은 화산 터져 두루 불이 이름 없는 이름이여.” 했습니다. 그 이름 없는 이름이니 그대로 여여하더라, 그대로. 그대로 여여하더라. 이 고비를 다 넘어서 두루 그대로 여여하더라 이겁니다.
 
그래서 여직껏 여러분들한테 “주인공에 놓아라, 놓아라.” 하는 소리를 아마 헤아릴 수 없이 했을 겁니다. 한 소리 또 하고 한 소리 또 하고, 항상.  오직 내가 있기 때문에 나 한군데서 모두가 나가지 내가 없으면 뭐가 있습니까? 내가 있기 때문에 그 한군데서 모든 게 나갑니다. 우주도 있고 세상도 있고 과거, 현재, 미래도 있고 생사도 있고 말입니다. 이게 모두가 나한테 있는 겁니다. 내가 이 세상에 나와서 알았으니깐 말입니다.
 
  이런 예가 있습니다. 요새 텔레비전을 보니까 말입니다, 어느 남녀가 둘이 애인 사이인데 컴퓨터에 정열을 다 쏟아 가지고, 그 남녀가 둘 아니게 자기가 되려면 어떻게 되나 하고 컴퓨터로 10년을 그냥, 배우고도 10년을 그거를 다 할 줄을 아는 거, 남의 거 뺏어 오기도 하고 들이낄 수도 있고 그런데 그거를 못해서 10년을 간 거예요. 어떻게 애인과 자기가 둘 아니게 될 수 있을까. 근데 그것을 이 부처님 법으로 이렇게 빨리 알았으면 되었을 텐데 그렇게 고생을 한 거예요. 고생을 하고 났는데 나중에 결국 보니까 이 체가, 몸이 있어 가지고는 둘이 하나가 될 수 없다는 결론이 나온 거예요. 그러니까 컴퓨터에서는 한계가 있었던 거죠. 그거를 알고선 바로 그냥 불 질러 버렸어요.  불 질러 버리고는 죽어 버렸어요, 둘이 다. 하나가 되기 위해서. 실천을 하기 위해서.
 
그거 어떻게 생각하세요? 남들은 평생을 자기 일생을 저거 해서 둘 아니게 하나로 하기 위해서 그냥 자기 몸을 불에다 집어넣는데 말입니다. 어떻게 생각을 하세요? 그런데 살아 있으면서 불에다 넣으라고 그런 거예요. 본래 불에다 넣으라고 그런 게 아니에요. 본래 우리는 여여하게 그렇게 함이 없이 하고 간다니까요, 지금. 곰곰이 생각을 해 보세요. 그냥 여여하게 간단 말입니다.  아까 맨 끄트머리에 그냥 “그대로 여여하더라.” 이랬죠? 그 다섯 가지의 말이 다 이, “그대로 여여하더라.” 이 소리에 다 들어간 겁니다, 그게. 첨보되는 말입니다.
 
이 모든 사람들이 아주 깜짝, 그러니까 깜짝, 깜짝 한 생각입니다. 깜짝 한 생각! 여러분들이 이런 과정이 없다면 깨칠 수도 없으니까, 이런 과정을 거쳐야 되니까 이런 과정을 거쳐라. 이 자동적인 컴퓨터 얘길 만날 했죠. 거기에 과거에 입력된 것을 자꾸자꾸 현실에 자꾸 놓으니까 입력이 되는 대로 과거에 입력된 게 자꾸 없어진다. 그게 팔자 운명, 모두 자기가 지어 놓은 것들, 나쁜 거 이런 것이 모두 하나씩 하나씩 없어지는 겁니다. 그런데 이건 과거에 지은 모든 업보를 성급하게 한번 관하면 되는 줄 알아요. 물론 쉬운 것도 있죠. 금방 이렇게 저거 한 건 금방 관하면 금방 그건 될 수도 있죠.
 
그래서 늦게 된다, 금방 된다, 안 된다 이런 것이 없어요. 그건 자기 할 탓이니까. 자기 지혜에 달려 있고 요량에 달려 있어요. 공용으로 사용을 하느냐, 그냥 자기가 현실에 사는 것처럼 산다고 그냥 하느냐 이게 문제죠. 우리가 그대로 공용으로 하는 거예요. 그대로, 우리는 그대로 공식하고 있고요.  경전에서는 원식이라고 합디다만 그냥 공식이라고 해도 여러분들이 다 알아듣겠으니까 말이에요. 먹는 것만 식이 아니에요. 우리가 모든 생활하는 데서 나오는 걸 거기다 집어넣는 것도 공식이란 말입니다. 이렇게 해서 어떤 거든지 대치를 하고 어떤 거든지, 보이지 않는 데서 나를 친다 하더라도 대치할 수 있고, 보이는 데서 어떤 문제가 생긴다 하더라도 대치할 수 있고, 그렇게 자기가 여여하게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의 그 움죽거리지 않는 주장자를 싸고 있는 영혼, 자기 영혼…. 자기 영혼이 없으면, 불성은 그대로 있는 거지만 자기 영혼이 없으면 태어나지 못하거든요. 그 영혼을 구제를 해야, 영혼이 구제를 받아야…, 구제를 받는다는 건 그렇게 자꾸 해야 영혼과 불성과 둘이 아니게 되면서 이게 그냥 함락이 되는 거예요. 즉 우주가 함락이 되는 것과 같아요. 만약에 아까 컴퓨터 하는 사람이 이 도리를 알았더라면 그렇게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 데도 불구하고 왜 딴 이름은 믿고 딴 형상을 믿으면서 진짜 자기를, 수억겁을 거치면서 진화시키고 형성시켜서 나온 장본인을 못 믿는단 말입니까, 진짜 장본인을.

목록

대한불교조계종 한마음선원(13908) 경기 안양시 만안구 경수대로 1282Tel. 031-470-3100Fax. 031-470-3116
Copyright (c) 2021 HANMAUM SEONWON. All Rights Reserved.
"이 제작물은 아모레퍼시픽의 아리따글꼴을 사용하여 디자인 되었습니다."